판문점에서는 휴전회담이 의외로 빨리 진행되는 것 같았다. 같이 있던 미군장병 모두 회담의 성패 여부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1953년 7월 초가 되자, 이승만 대통령의 일방적인 결단으로 남한에 우호적인 부류의 북한 포로(반공포로라 불렀음)와 중국포로를 석방하고 말았다. 대외적으로는 우리 헌병이 수용소의 문을 열어 놓았더니 모두 도망갔다고 주장했다.
휴전 후 내가 부산으로 내려갔던 당시에도 반공포로들은 삼삼오오 떼 지어 다니며 구걸을 하거나, 간단한 일용품, 연필 등을 가가호호 다니면서 팔고 있었다. 대책 없이 풀어놓은 반공포로들은 약 1년여 동안 남한 일대에서 혐오 군상(嫌惡 群像)으로 떠돌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주도의 UN군 휴전회담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맥아더」장군의 파면 이후 「워싱턴」조야(朝野)의 한국전에 대한 견해와 정책에 대하여 매우 불신했다.
당시 포로석방만 하더라도, 포로교환이라는 절차가 있을 것이 틀림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세계 여론에 反하고 미국을 곤경에 빠트리면서까지 이 대통령이 석방을 단행했던 것은 미국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된 것으로 안다. 미국의 평화주의와 낙관주의 때문에 공산측이 벼랑 끝 작전으로 집요하게 우기면 포로 개개인의 의사에 반할지라도 포로들이 북으로 몽땅 송환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 대통령의 잠재적 공포와 불신 때문으로 본다.
이제 우리 부대에서도 이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 장교(將校), 사병(士兵) 사이에서 빗발쳤다. “갓뎀, 시기”(미군들은 이대통령을 비판할 때는 Sigi, old guy. Sigi는 Singman Rhee를 줄인 말) 라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지거리를 했다. 대부분의 사병들은 자기 나라에서 6,000마일이나 멀리 떨어진 이 산골에 와서 고생하고 또 자기들이 죽음까지도 모험을 해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대리전쟁이야. 한국이 공산화되면 일본도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따라서 태평양의 무역로는 완전히 소련, 중공 수중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 미국은 고립되고 세계는 공산 독재가 지배하게 돼! 넌 그것이 좋으냐?” 내가 말하는 이론은 간단했다. 그러나 대화했던 사병의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I don't give a damn. It is none of my business!(제기랄, 그건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참말로 많은 토론도 하고 설득도 하려고 노력했다.
장교들과의 논쟁은 재미있고 확실했다. 비교적 참전의 정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침략자는 응징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박사의 고집이고, 응징하기 위해서는 북진만이 해결책이고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 파견 국가들은 충분한 명분과 국력이 있다고 믿은 것은 이박사의 생각이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 내봉장(來鳳莊)에서 시작된 유엔군과 북한 사이의 휴전회담은 장장 24개월, 158차례의 만남 끝에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한 달 평균 8일을 회담으로 지새웠고, 북한, 중공군은 이 회담을 통해 시간을 벌고 정보를 수시 입수했을 것이다.
휴전 서명이 성사됐다는 소식은 장병들에게 일대 희소식이었다. 모두 환호했다. 그러나 전투 종결까지 앞으로 3일 동안 살아남은 자만이 휴전의 값진 열매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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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년7월27일 조인한 정전협정문 [사진 : 국방부홍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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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공의 동맹군은 전투 종결까지 사용 가능한 모든 장비를 동원하고, 비축했던 모든 탄약, 그리고 인력을 투입, 최후의 일전을 결행했다. 적군은 UN군의 제공권(制空權) 때문에 보급, 탄약의 추진에 많은 애를 먹었고, 지구전(持久戰)을 위해 언제나 제한된 탄약을 전략적으로 써 왔다.
그러나 이제 전투 종결이 되면 탄약은 필요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인제는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유리한 고지들을 일격에 점령하려는 시도였다. 밤낮으로 포탄이 떨어진다. 「크리스마스 고지」쪽에는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고, 낮에는 새벽부터 항공기의 지원을 받아 폭격하고 또 폭격하는 영웅적인 최후 전투가 이루어졌다.
28일 밤 늦게부터 내리던 비는 폭우로 변해 개울이 범람하고, 지척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후퇴를 위한 준비 명령이 내려졌다. 부대장 Joe Richardson 중령과 나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 화천저수지 「판툰바지선」이 있는 부두까지 폭우를 뚫고 내려갔다. 철수를 위한 지형 정찰이다. 군용 짚차가 물속에서도 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탄복했다. 앞 「디퍼렌셜 기어」를 넣으면 4륜구동이 되는데, 45도 경사도 오르고, 어지간한 개울물도 붕붕거리며 물을 가르고 무사히 건너간다.
부대로 돌아오자 의외로 전선이 조용했다. 아마도 폭우 때문에 쌍방이 공격을 멈춘 모양이다. 먼동이 트자, 대대장과 함께 전방으로 차를 몰았다. 약 1km 정도 협곡을 따라 진입했더니, 한국군의 짚차, 트럭 등이 포탄에 맞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아래 계곡 쪽에 차를 두고 병력이 능선 진지에 가 있는 사이 그 차들이 폭격을 당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한국군 부대가 대열을 짓지 않고 삼삼오오 떼로 몰려 철수하고 있는 것이다. 계급장도 다 떼고 말이다. 선두에서 내려오는 장교 같은 군인을 붙들고 물어본다. 적의 포격 압박에 일부 노출된 부대가 후퇴한다는 것이다. 곧 부대에 무전으로 철수에 관한 부대 간 협조가 있었는지 조회했다. 전혀 협조가 없었다는 회답이 돌아왔다.
중령의 표정은 기가 찬 모양이다. 차를 되돌려 쏜살같이 부대로 돌아와 비상소집을 걸고,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완전 무장하고 호 또는 벙커에서 대기하도록 명령했다. 전투공병대가 적의 보병공격을 받으면 매우 심각하기 때문이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떴다. 9시쯤 지축을 울리는 비행기 소리가 요란하게 계곡에 울려 퍼졌다. 나지막하게 뜬 수십 대의 헬리콥터가 우리 북쪽 고지 쪽으로 날아간다. 미 해병대 특수임무조가 방어에 투입된 것이다. 참말로 십년감수 했다. 오전 내내 병력이 수송됐다. 드디어 7월 29일 0시에 포격과 전투가 멈췄다. 우리 부대는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휴전이 발효되었다. 포성이 멈춘 것이다. 우리 부대는 전방의 현 위치에서 군사 분계선까지 하루 한 번씩 정오에 백기를 달고 출입해 휴전의 이행을 감시했다. 장교 한명과 운전수, 경비요원 등 3명 1조가 되어 매일 나가본다. 그런데 어느 날 순찰 나갔던 이들이, 위치 이탈한 미 해병을 구출해, 급히 후송해 온 것이다. 우리 부대의 의무실에서 응급처치를 했다. 듣자하니 전투 종결 직전에 허벅지를 얻어맞고 고지에서 기어 내려와 계곡에서 물을 구해 마시며 숨어 있었던 것이다.
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관통상이 심했다. 부상한지 벌써 3일이 되고 치료를 하지 않아 심한 염증이 시작됐다. 다행히 본인이 야전교본대로 지혈을 성실히 했기 때문에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는 없었던 모양이다. 호주머니에서 산개구리와 풀뿌리 등이 많이 나왔다. 비상식량을 비축한 것이다. 교본대로 했음이 증명되고, 그것으로 이 해병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남는다는 걸 보여 주는 듯 했다.
이제 부대에서는 죽음이라는 공포는 없어지고, 언제 집으로 돌아가느냐 만이 화제가 되었다. 드럼, 파이프 등으로 간이 샤워장을 개울에 개설하고 오래간만에 마음껏 더운물을 들이부을 수가 있어서 기분이 최고였다.
이게 또 웬 일인가. 보급차에 PX 물품이 대량 추진되면서 맥주가 부대에 도착한 것이다. 근무가 끝나고 오후 6시면, 깨끗하게 흐르는 일급수 시냇물에다 맥주를 박스 채 담그고, 마시고 또 마시고, 저녁식사도 잊어버리는 강술꾼도 있었다. 완전 해방이다.
그들 대화의 내용을 들어보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자동차 자랑, 그리고 애인자랑 등이다. 주말 애인을 앞좌석에 태우고 호수가로 드라이브 갔던 이야기 등, 우리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어느 행성의 이야기였다. 당시 미국의 자동차 보급률은 대충 3인에 한 대 꼴이다. 나도 이들과 어울리다 보니 집 생각도 나고, 학교도 가급적 빨리 복학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용케도 살아남았고, 나름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했구나 하는 자부심도 한구석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