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전(停戰)도 되었고 나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K.S.C PX 차를 얻어 타고 오래간만에 춘천에 내려갔다. 춘천우체국장에게 인사를 갔더니 아버님이 최근 부산지방 체신청장이 되셨다고 한다. 이제 큼지막한 관사도 생겼을 것이고 피난 생활은 면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부대에 돌아와 사의(辭意)를 표했다. 온 부대가 금새 “Mr. Kim is going back to school!” 사발통문이 돌았다. 1$, 2$, 5$, 10$ 십시일반으로 나와 가까웠던 장교, 사병들이 돈을 모아 전별금도 마련해 주었다. 좋은 전우들이었는데 작별하기 아쉬웠다.
춘천을 거쳐 서울 그리고 부산에 도착했다. 서대신동 2가 166번지 청장관사(廳長官舍)는 일제 때 고등관이 살던 집이라 정원도 넓고 집이 좋았다. 드디어 3년 만에 노숙을 피해 지붕이 덮인 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부산은 많이 변해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국제도시에다 전쟁과 평화가 공존해 있었다.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부산은 원래 토박이란 것이 없었다. 동래읍을 이야기한다면 몰라도 대개 출신 고향을 따져보면, 김해, 울산, 양산, 밀양 정도로, 중학 동창들에게 “니 어디고(너는 어디서 왔나)?” 하면 70~80%가 위 4개 군에 다 수용되고, 몇몇이 “남해, 함안 아이가” 한다. 그렇게 오순도순 살아 왔었다.
피난 수도 부산은 우선 출신지역의 「칵테일」이 되었다. 이북사람, 서울사람, 전국의 김(金), 이(李), 박(朴)이 다 모였다. 여기에 코쟁이까지.
점심이 지난 2, 3시경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나지막한 소리로 “마른 멜치(멸치) 사이소.” 하는 자갈치의 중년 어른의 모습도 이제는 볼 수 없다.
국제시장은 그야말로 전투장이 되어 있었다. 없는 물건이 없고 공격적인 눈매의 아저씨, 소리소리 지르는 생소한 말투의 아줌마들 투성이다.
부산의 새벽을 여는 소리 하단 고개를 넘어 첫 발 대신동 어귀에서 “재치국(재첩 조개 끓인 국물) 사이소오(사세요), 재치국 사이소오!” 하는 낭만적인 소리도 이제는 왜 이리도 템포가 빨라졌는지.
재첩 아주머니를 부르면 그 자리에 재첩통을 내려놓고 고객을 기다리지, 고객을 위해 뒷걸음질이 없는 것이 재첩 아주머니의 행보법칙인데 이제는 발걸음도 완전히 속보(速步)로 변했다. 해장국 하려고 뒤쫓아 갈라치면 한참 따라가야 만날 수 있는 속도(速度)시대가 되었다.
100년이 걸릴 민족 대혼합(大混合)이 불과 2, 3년 만에 이루어지고 이질(異質)과 동질(同質)의 살벌한 공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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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중의 부산. 임시 수도 항도부산에 100여 만의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 NARA7대 국회에 막 등원했던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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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부산의 생활문화가 달라진 만큼 교육, 학제(學制)도 대폭 바뀌고 나의 학교 동기생들도 모두 군이 아니면 대학에 진학하고 있었다. 우리는 중학 6년제(中學 6年制)의 학제였는데 중학 3년 그리고 별도의 학교로 분리되어 3년제 고교가 각각 생긴 것이다.
그동안 나는 인천중학교에서 인천고교로 모든 학적부가 이관되어 인고(仁高) 학생이었다(인천상업이 인천고교가 됨).
인고(仁高) 재학증명서를 가지고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었으나 무슨 실력으로 좋은 전통이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단 말인가. 영어는 계속해 왔던 과목이니 별 문제가 없었으나 수학과 과학이 문제였다.
책방에 가서 고교수학을 들여다보니 캄캄했다. 국민학교 6학년 분수(分數)를 다시 익혀야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 실력 가지고는 소위 일류학교라 하는 곳에 명함을 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의 옛 모교인 경남고등학교에 찾아갔다. 우리 5회(回)는 한명도 학교에 남아 있는 친구가 없다. 모두 대학 졸업반 어른들이었다. 친구 동생들이 고교졸업반에 있었다.
선택은 영수학원에 다니면서 진학준비를 나 스스로 하느냐, 아니면 고교에 편입학해 동생들하고 같이 공부하며 정식 진학준비를 하느냐의 기로에 섰다. 아버님도 걱정이 되셔서 체신청 내(內) 부산 토박이를 동원, 학교를 두루 알아 보셨다.
혼자서 독학으로 준비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침 경남상업고등학교는 문교부의 새 지정학교로서 제대자(除隊者) 또는 만학도(晩學徒)를 위해 능력별 반 편성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영어는 A, B, C반, 수학도 A, B, C반으로 되어 있었다.
1, 2(年)년이 대수냐 장기전으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0월 초 경남상고 2학년 2학기에 편입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도보로 불과 10여분 거리에 있었고, 교사도 제대로 된 건물이었다.
우선 영어는 A반에, 수학을 C반에 신청했다. 기하, 대수, 인수분해 정도를 다루는 반인데 겨우 따라갈 만 했다. 이제부터 수학에 몰입하는데 학교 수업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고 수학만 밤에 학원에 다니며 보충하기로 했다.
동급생들은 모두 3, 4세 아래이고 나를 부를 때는 “김 형” 이라고 불렀고, 선생님들도 나이 많으신 한문담당 신(申) 선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를 대접해 주셨다. 가끔 영어 A반의 선생님이 결강을 하시면 내가 text를 가지고 대신 도와드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경남고가 아닌 경남상고를 참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능력별 반편성도 나에게 이로웠지만 상업학교에서 배운 부기, 회계는 장차 행정기관에서 행정, 관리 책임을 맡았을 때 많은 도움이 됐다.
무료할 때는 바로 옆에 부산대학가가 있었는데 과거의 동기들과 밤에 어울려 맥주 한잔씩도 나누면서 기성인답게 객기도 부려보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