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코니엘 선생님과는 형제처럼 지내고, 모든 일을 상의했다.
제대 군인 등 몇몇 골초들은 학교 교정 후미진 곳을 택해 매(每) 시간이 끝나면 모여서 연초파티를 벌였다. 나도 골초 중 상골초였다. 다행히 선생님도 담배를 좋아해서 서로 나누어 피우는 처지가 되었는데 갑자기 학교에서 담배가 떨어지면 슬그머니 교무실에 들어가 뒷짐을 지고 돌아서면 담배 두, 서너 개비를 손에다 쥐어 준다. 아마도 선생님으로부터 담배 조달을 당당히 받는 골초 고교생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우리 집에 오신지 5~6개월이 되고, 나의 진학공부도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처지가 되어 선생님의 생활은 나에게 매우 부담이 되었다. 마침 헌병근무 시절 같은 부대에 있던 姜씨라는 분이 선생님을 자주 찾아왔는데 하루는 내가 장난말로 선생님을 장가보내자고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김해 자기 집 근처에 사는 「old miss」한 분과 이야기를 건네 보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가족은 많고 어렵게 산다고 했다. 혼담이 잘 진행이 되어 약혼하고, 결혼식도 사모관대 제대로 갖추어 혼례를 치렀다.
학교 근처에 전세를 얻어 보금자리를 틀고 행복한 생활이 시작되어, 누구보다도 내가 기뻐했다. 신부는 가무잡잡했으나 한국인으로서는 큰 키였고 교양도 있어 보였다. 이제 선생님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고 진학 공부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
고등학생으로서의 생활은 순탄했고 동급생들도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3개 반이 있었는데 능력별 학급 편성이다 보니 모두가 한 반처럼 사귀며 지냈다. 나는 몇몇 후배들과 어울려 영어웅변 반을 만들고 「코니엘」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열심히 연습도 했다.
마침 Herald Tribune誌가 뉴욕에서 세계 주요국의 고교학생 한명씩을 초청 「국제 학생포럼」을 개최하는 행사가 있었다.
「코」선생에게 부탁해 스피치 원고를 만들었다. 제목은 「Athens became Sp-arta.」즉 민주국가 「아테네」가 전제주의국가 「스파르타」를 정복하려다가 스스로 독재국 「스파르타」가 되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원고는 A4용지 두 장에 간결한 문체로 잘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고교생이 다루기에는 너무 고차원적이고 어려웠다. 좀 쉬운 걸로 평이(平易)한 일상생활의 문제를 다루었으면 했는데 「코」선생의 생각은 달랐다.
친구 김문수 군을 대동하고 인근에 있는 「구덕수원지」의 수림 속에 몰래 잠입해 열심히 원고를 외우고 다음날부터는 큰 소리로 외치며 제스처까지 곁들였다. 선생님 앞에서 예행연습을 하고, 다음날 경남도청 학무과장 앞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약 15분 스피치 했더니 OK다. 부산, 경남 대표로 선발된 것이다.
장장 일곱 시간의 야간 급행열차에 시달리며 새벽에 그리운 서울역에 도착했다. 인솔자도 없이 혼자서 시험장소인 종로2가에 있었던 한국외국어대학 대강당으로 향했다. 간단한 필기시험과 곧이어 「스피치」가 시작되었다. 각 지방 그리고 서울에서 참가한 학생이 11명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마 나이 순서로 정했는지 내가 일번타자가 된 것이다. “경남 대표, 김진휴 학생 나오세요.” 한다. 숨도 고르지 못했는데 엉겁결에 연단으로 올라가 굽신 인사를 하고 웅변을 시작했다. 연습을 충실히 한 터인지라 막힘없이 끝냈고 박수소리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다른 10명의 학생연사들은 생활 속의 평범한 주제를 잡았다. 쉽고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나의 농촌봉사활동」「왜 나는 노래를 좋아하는가?」그리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는 방법」등등. 나의 합격은 물 건너 간 것으로 느껴졌다. 옆에 계시던 외대 교수라는 분이 “학생 영어 많이 했구만 발음, 인토네이션 다 좋았어” 하시면서 말미에 “그런데 서브젝트(주제)는 貴下가 잡은 것이 아니지?” 하신다.
오후 2시 문교부(옛 중앙청 자리)에 방을 보러 갔다. 예측한대로 불합격이었다. 기대는 아니했지만 좀 섭섭했다. 합격자는 경기고교 출신의 백모라는 학생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한 인솔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99%는 서울, 경기야 지방은 기회가 없어!” 하신다.
오래간만에 서울에도 올라와 봤고 스피치 대회에 참가해 경험도 쌓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당일 야간열차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