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5일 후, 구술시험 차 안암동 고려대 도서관에 갔다. 김상협(金相陜 : 정치학과 교수)선생님과 조동필(趙東弼 : 경제학과 교수)선생님이 면접을 보셨다.
김 교수님이 싱긋 웃으시더니 대뜸 “자네 하이카라를 좋아 하는구만.” 하신다.
“네?”
“고등학생이 머리가 뭐 그런가!”
최근에 열심히 머리를 길러서 반 뼘쯤 꼿꼿하게 고슴도치처럼 서 있는 것을 그날 아침에 이발소에 가서 연탄불 고데로 깨끗하게 넘겨 붙인 것이다. 그래서 멋만 부리는 학생으로 오해하신 모양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의 고교 내신과 원서 등으로 고향이 어디고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김 교수님은 나의 정주(廷周) 숙부님과 가까이 지내셨고, 6.25 때 1차 피난 시 부산에서 같은 방을 쓰시고 계셔 우리 아버님하고도 자주 만나셨던 처지였다. 아마 친구의 자식이 왔으니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책상 위에 있던 영자신문(英字新聞)을 내 앞으로 밀면서 읽어 보라고 하신다. 「New York Times」이었다. 일면 상단(一面 上段)에 나와 있는 사진을 가리키신다. 밑에 서너 줄 해설을 읽으라는 것이다. 고등학생에게 좀 과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모르는 단어가 없고 문장이 비교적 명쾌해서 「인토네이션」을 제대로 구사하면서 좍 읽어 나갔다. 김 교수님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다. 아마도 만족하신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오면서 나의 영어 시험에 무슨 문제가 분명히 있었지 않나 생각했다. 재차 테스트를 해서 필기시험이 본인의 실력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약 1주 후 그때의 의문점이 말끔히 풀렸다.
아버님이 서울 출장을 오시는 김에 고대(高大)에 가셔서 나의 입학금을 내시고, 정재각(鄭在覺 敎授 : 아버님의 중학 동기로 매우 친숙하셨음) 교수님을 방문 후 김상협 교수를 찾아가셨더니 “아드님, 영어가 만점이야!” 하시더란다. 아버님이 대단히 기뻐하시고 부산에 내려오셔서 직장 그리고 주변 친구들에게 얼마나 자랑을 하셨는지 여러 사람으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았다.
1955년도 실업학교로서는 경남상고가 최고 진학률을 기록했다. 서울 상대에 3명, 고대(高大)에 7명, 그리고 연대(延大)에 3명, 부산대에 80%, 동아대에는 지원자 전원이 입학했다. 아마도 제대자 가산점과 능력별 반 편성이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1955년 3월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피고 진달래 붉게 물든 안암동 교사(校舍) 2층 강당에서 유진오(兪鎭午) 총장님의 환영의 말씀으로 우리는 정식으로 고대(高大) 학생이 되었다. 우리 정치과 학생은 약 120여명이며 2학년 때 편입생까지 합쳐서 129명이 졸업했다.
영예롭게 여학생도 2명 있었는데 윤정숙(尹正淑)씨 임영빈(任英彬)씨이다. 쟁쟁한 창덕여고(昌德女高)와 숙명여고(淑明女高) 출신들이다.
그전부터 고대는 지방출신이 많은 학교다. 우리 반의 출신지 분포를 보면, 고대(高大)가 피난 시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영남이 40%, 서울을 포함한 중부가 40%, 그리고 제주 및 호남이 20% 정도였다. 고교 배경을 보면 대부분 출신 고교의 학생회장(學生會長) 또는 대대장(大隊長) 출신들로서 자존심과 자아가 아주 강한 친구들이 많았다.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데 연단(演壇)을 차지하면 내려올 줄을 모른다. 계속 자기 P.R하고 정견발표(政見發表)까지 한다. “그만하고 내려와라.” 소리가 나와야 겨우 물러서는 악바리도 여럿 있었다. 모두 정치계 지망생이 많았다. 하기야 우리 반에서만 4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으니 말이다. 개성들이 강하고 독불장군들이 많아 어떤 의제(議題)가 있으면 결정을 보기가 힘들었다. 옆 반 경제과는 1학년 봄, 가을 소풍을 다녀왔는데 우리 정치과가 소풍가는 데는 딱 1년이 걸렸다.
2학년 1학기 드디어 윤천주(尹天柱 : 前 문교부장관) 교수 인솔 아래 정릉에 다녀왔다. 날카롭게 세웠던 각들이 서서히 마모되면서 지금은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 세월이 해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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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대 입학기념 / 유진오 총장, 김상협 교수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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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교색(校色)은 진홍색, 교수(校樹)는 잣나무, 교수(校獸)는 호랑이, 교주(校酒)는 막걸리다. 여기에 푹 빠져 지내게 되었다.
생각나는 교수로는 헌법특강(憲法特講) 유진오 교수인데 눌변(訥辯)이지만 강의 준비가 철저해 언제나 알맹이 있는 강의로 우리를 매료시켰다. 다음은 준비와 달변으로 명강의 시리즈를 연출한 김상협(金相陜) 교수, 매 강의마다 깨끗한 흰 손수건을 교탁 모서리에 가지런히 놓고 간간이 입을 닦으며 명사십리 일사천리로 강의해 나가신다. 특히 정치학원론(政治學原論)은 타교(他校)에서 온 학생들도 청강하곤 했다. 가까운 서울상대 학생들이 특혜자들이다.
대기자(大記者)가 될 잠재력의 이종식(李鍾植) 군이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이집트의 ‘나기브’나 ‘낫세르’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는데 우리나라 군인들의 군사혁명 확률은 어떻습니까?” 난감한 질문이다. 한참 생각하시더니 “글쎄, 우리 군대는 미군(美軍) 빵을 먹고 자란 군대라 쿠데타는 없을 것으로 보네.” 하신다. 3, 4년 후에 5.16이 터졌다. 여하튼 가장 인기 있었던 교수였다.
다음은 조동필(趙東弼)교수의 경제원론(經濟原論), 처음부터 웅변으로 시작한다. 말씀도 청산유수이고 예(例)도 그때그때 잘도 끌어다 붙인다. 그분께서 간혹 던지는 Joke(와이당)은 일품이었다. 그런데 강의가 끝난 다음 노트를 정리해 보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법철학(法哲學)의 이항녕(李恒寧) 교수를 빼놓을 수가 없다. 칼칼한 검사 논고(檢事 論告)식의 강의는 알맹이도 있고 듣기도 좋았다. 가끔 일제(日帝) 때의 자신의 행각을 고해성사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재학 중, 고등문관시(高等文官試)에 패스하고 초임으로 경남 하동군수 임명을 받았다 하신다. 23세(歲)의 약관에다 국민복(일제 말엽 관료들의 정복)을 입고 진주~하동행 버스에서 내리는 까까머리 李 군수(郡守)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영접 나왔던 군 간부(郡 幹部)들이 부임하는 군수가 보이지 않자 모두 식당에 가서 반주를 곁들인 점심을 먹고 느지막이 군청으로 돌아와 보니 까까머리 청년이 군수 회전의자에 날름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가혹한 공출(供出)의 독려, 유기그릇의 수집 헌납 그리고 가장 뼈아팠던 일로서 징병, 징용 그리고 정신대 등 전시행정(戰時行政)에 관여했던 일 등을 학생들에게 그 잘못을 정중히 사죄하시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