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까지는 이렇게 여유도 있었고 낭만도 있었다. 그러나 3년차가 되면서 병역문제 그리고 졸업 후의 취업문제 등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또한 25~6세가 되면서 애인들도 나이를 먹어가 결혼이라는 건(件)도 신중히 생각하게 된다. 우선 병역문제가 해결되어야 그 위에서 모든 일의 해결 실마리가 풀린다.
3학년 2학기 무렵, 휴전 후 중지됐던 정규 통역장교 모집의 공고가 붙었다. 육군중위로 임관하되 전과 달리 논산훈련소에서 사병과정을 마치고 육군보병학교에 입교 3개월의 OCS 과정 후에 임관하며 후기교육으로서 육군부관학교(副官學校) 군사영어班에서 3개월 훈련을 받고 부대배치가 된다는 내용이다.
1기생이라는데도 매력이 있지만 장교로서 복무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도록 묵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전란(戰亂) 동안 공부를 마치지 못한 우리 선배들은 군복을 입은 채 시간을 내 강의를 듣고 학기 시험도 치르면서 졸업하는 학생이 많았다.
나의 경우 학도병 심사를 받고 병력을 필(畢)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경력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1950년 동란 발발(勃發) 당시에 못다 이룬 장교의 꿈을 다시 실현 매듭을 짓는 기회이기도 해서 결심을 빨리 할 수 있었다.
1957년 1, 2월로 기억하는데 시험을 치르고 아직 잔설이 남아 바람이 찬 3월 초, 논산훈련소에 입대, 사병 군번을 부여받고 훈련에 돌입했다. 조악한 급식, 고된 사병훈련은 모두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괴로웠던 것은 기간사병들의 욕설과 폄하(貶下)였다. 몇 개월 후면 장교가 될 사람들이니까 구타나 심한 기합은 없었다. 그러나 소새끼, 개새끼 하는 욕설은 선임하사부터 졸병 기간요원에 이르기까지 입에 물고 다닌다.
약 1개 소대병력이 좀 못되는 40여명은 대부분 대학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지식인들로서 훌륭한 인재들이 많았다. 후일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윤형섭(尹亨燮)박사를 여기에서 만나 여생의 친구, 동지로서 교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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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련병 시절 / 아래 좌측에 훗날 문교장관을 지낸 윤형섭 장관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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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내무반에서 점호가 끝나고 취침하기 직전의 일이다. 우리 내무반 선임하사는 경비대 출신으로 노병(老兵)이었다. 후보생들을 관리하는 직책인지라 대접을 해서 노병을 배치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날 밤 점호 때도 소새끼, 개새끼하고 여전히 욕이 튀어나왔다. 윤형섭 훈병(訓兵)은 그 언어폭력(verbal abuse)에 참을 수 없었던지,
“소대원 여러분! 옛날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 태조로 등극을 하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를 회유하기 위해 내외(內外)끼리 회식(會食)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충신 포은은 고려를 망가뜨린 태조의 쿠데타를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성계 앞에서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지요. 이성계는 포은을 좀 누그러뜨리고 웃기기 위해 장난을 꾸몄습니다.
‘여기 있는 이 돌부처는 우리가 거짓말을 하면 움직이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할 때만 까딱거리며 움직이게 되어 있소이다. 서로 진실만 이야기해 봅시다.’ 하고 자신의 황후에게 평소에 자신만이 품은 생각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황후 왈 무서운 비밀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만조고관(滿朝高官)이 모이는 조례(朝禮)에 보무당당하게 걸어오는 무관(武官)을 보면 내 몸이 이상해 짐을 느낍니다.’ 돌부처가 까딱까딱 움직였습니다. 진실을 말한 것입니다.
다음 포은의 부인 왈 ‘저는 포은 선생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합니다.’
다음 차례가 이성계입니다. ‘나는 포은 선생이 항상 장난기 많은 원숭이같이 보입니다 그려.’ 했습니다. 그러자 포은 선생이 ‘네, 그렇습니까? 저는 전하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개나 마귀처럼 보인다고 답이 나올 것을 기대했던 태조는 실망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면서 포은 왈, ‘개 눈에는 개밖에 보이질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했답니다.”
이제 윤 훈병(訓兵)의 마지막 한마디 “훈병 여러분! 개새끼, 소새끼 외치는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게도 개새끼, 소새끼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섭섭하게 생각지 말기 바랍니다.” 하고 끝냈다.
우리 소대의 욕설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우리 선임하사 신(申) 상사는 그 후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 일체 X새끼 소리를 하지 않았다.
제식훈련, PRI(사격술 예비훈련)등 부대 내에서의 훈련은 고달프고 힘들었다. 그러나 사격훈련, 야외 훈련 특히 야간행군은 우리에게 다소 자유를 누리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동주보(移動酒保)라는 것이 있어 돈만 주면 배를 채울 수도 있고 야간행군 때 제일 후미에 따라가면 수통에 막걸리까지 넣어주는 아주머니 장사가 있어 행복했다.
일요일이 그렇게도 기다려진다. 나의 직접적인 면회가 아니더라도 친구를 따라 나가는 「나이롱면회」라는 것이 있어 배불리 얻어먹고 올 수 있는 명절이다. 어머니, 애인, 형수님들이 바리바리 이고 지고 와서 굽고, 끓이고 목에 찰 정도로 먹여 돌려보내는 풍경 아마 세계에서 우리나라 말고 이런 자식 사랑, 가족 사랑의 한없이 넓은 이런 공간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여비해 오시느라 쌀말 깨나 파셨을 터인데 네모 반듯하게 꼬깃꼬깃 접은 지전(紙錢)을 아들 손에 꼭 쥐어주며 무언가 한마디 하시고 눈물짓는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이제 역사(歷史)로 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