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토요일 오후, 연대장실(聯隊長室)에서 호출이라는 전갈과 함께 한 병사가 인솔하러 왔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누가 면회를 왔다는 것이다. 면회 온 것은 분명한데 누굴까 궁금했다. 인솔사병으로서는 알쏭달쏭했을 것이다. 애인이라기엔 너무 나이 들어 보이고 어머니라고 하기는 너무나 젊고 37세의 우리 어머님이 논산 우체국장의 안내로 특별 면회를 오신 것이다. 부연대장(副聯隊長)인 중령 한분이 반갑게 맞아줬다.
어머니가 “고생하지” 하신다. 아버님은 얼마 전 부산 체신청장에서 光州 청장으로 좌천되셨단다. 지난 1월에 있었던 ‘부산 대화(大火)’ 에 화재 책임을 지시고 말이다. 사소한 부부싸움 끝에 넘어진 호롱불이 옮겨 붙어 바다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부산의 도심을 깡그리 태워버렸다.
부산시 역사상 최악의 화재였다. 부산역, 세관, 우체국 등 개항기(開港期)에 건설되었던 문화재들이 이때 깡그리 소실(燒失)되었다. 화재 전에 당시 사변 직후인지라 세계 여러 구호기관에서 많은 원조물자 특히 의복이 답지되어 우체국 지하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대화재(大火災) 때 아버님은 서울 출장을 가 계셨고 우체국장은 이 물품을 소개(疏開)시키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워낙 불길이 세고 빨라서 고스란히 태우고 말았다.
이러한 여파로 부산시장을 비롯해 관련 기관장이 모두 해임 또는 좌천된 것이다. 다행히 아버님은 좌천으로 끝나셨고 친구가 많은 광주에 부임하셔서 다행이시라고 한다. 관할구역도 전남, 전북 그리고 제주도 등 3개도(道)의 우체국, 전화국 그리고 건설국을 총괄하셨으니 권한도 짱짱하셨으리라.
어머님이 가지고 오신 먹을 거리를 챙겨들고 막사로 돌아왔다. 일부는 기간 사병들에게 상납하고 친구들과 나눠 먹었다. 지금도 생각나는데 미국제 「미니 소세지」가 들어있는 깡통이 하나 있었는데 이 소세지를 건빵 사이에 끼워 샌드위치 식으로 해서 먹은 그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고소하고 푸짐했다. 이가 득실거리는 방한복, 침낭을 뒤집어 쓰고 입에다 건빵 하나 집어넣고 오물거리면 어찌 그리 맛이 좋은지.
6주(週)의 기본훈련이 끝나간다. 통역 2기(期)들도 입소해 훈련을 받고 있다. 그 흔한 「원산폭격」「대동강 다리」등 폭악한 기합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몇 번 받고는 출소하는 것이다. 다만 아찔한 순간은 한번 있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누가 내 모자를 탈취해 도망간 것이다. 졸업 무렵이라 보충을 해놔야 하는데 난감하다. 다행히 내가 잘 아는 기간요원 하나가 해결해주었다.
졸업 날 연대장(聯隊長)의 환송사를 끝으로 우리는 대열을 지어 수용연대(收容聯隊)로 행군했다. 이틀이 지난 다음, 보병학교 입교자 호명을 한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호명에서 나의 이름이 빠진 것이다. 불가사의 했다. 2주가 지나 3주가 되어 2기생이 수용연대에 도착했다. 행정착오이니 이번에는 틀림없겠지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또 명단에서 빠진 것이다.
기간사병중 고교 후배가 있어 사정을 알아봐 주기를 부탁했다. 포병학교(砲兵學校) 사병(士兵)으로 분류되어 있고 내일 출발 한단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간혹 간부 후보생 지망자 중에 신원 상 특기(特記)가 있으면 사병으로 미끄러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아차! 연좌제에 걸렸구나. 틀림이 없다. 이북에 가 계신 제헌의원 넷째 삼촌 그리고 경찰계에 계시다 납북된 다섯째 삼촌 모두 나의 신원조회에 나타날 것이었다. 참말로 난감했다. 그 당시 6촌(寸) 이내에 월북했거나 행방불명이 되면 여지없이 장교임관이 취소됐던 시절이었다.
여하튼 명령대로 광주 포병학교로 내려갔고 다음날이 토요일인데 1기생(一期生) 동료 몇이 2기생(二期生)을 통해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 외출허가를 받아 포병학교에 찾아왔다.
그 중에 김은석(金銀錫)군, 그리고 윤인식(尹仁植)군이 있었는데 김 군은 평양 출신으로 형님인 김용환 중령(金龍煥 中領)이 방첩대(防諜隊) 정보과장으로 있었고 윤 군은 형님이 육국본부 부관감실(副官監室) 장교과장(將校課長)으로 계셨다. 동원할 수 있는 빽은 든든했고 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핵심인물이 신원조회 담당을 하는 바로 은석이 형님 김 중령이었다.
1기생 모두가 일어나 작전을 꾸몄다. 우선 외출증(外出證)이 있으니 서울로 은석이를 급파하고, 몇몇 친구는 광주 시내 체신청장 관사로 급히 찾아가 아버지께 나의 사정을 전하고 대책을 숙의(熟議) 했다.
놀라신 아버님이 야간열차로 서울에 올라가셔서 은석 군과 합류 김 중령을 찾아갔다. 아버님의 설명은 간단했다.
‘애비는 대한민국 고급 공무원으로 체신청장을 하고 있다. 셋째 숙부는 서울 철도청장으로 있고 일곱째 숙부는 서울 마포경찰서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가장 모범적인 가정이다. 아홉 숙부 중 한 사람으로 인해 후보생이 장교로 임관할 수 없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더구나 후보생 본인은 사변 때 학병(學兵)으로 3년간 참전도 했다.’
김 중령은 “즉시 조치하겠습니다.”하고 약속을 했고 마포경찰서장 정주(廷周) 삼촌은 경무대서(景武臺署)에까지 연락을 하셨다고 한다. 참으로 기동성(機動性)있게 대처해 불과 2, 3일 만에 문제를 모두 풀어냈다.
광주지구(光州地區) 방첩대 상사(上士) 한 사람이 찾아와서,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걱정 마시고, 2기생(二期生)은 이미 입교해서 훈련에 들어갔으니 합류가 안 되고 다음 번 3기생(三期生)과 같이 입교하도록 조치가 되어 있다 한다.
그 후 김 중령은 5.16 이후 예편해서 효자동 옆 통의동에 거주하면서 내가 중앙청(中央廳)에서 근무할 때 자주 만나 식사도 하고 다정하게 지냈다. 참 인정 많고 호인이었다. 워낙 술을 좋아해서 간이 탈이 나 일찍 세상을 떴는데 내가 가족과 함께 서울대 병상에서 임종을 했다.
보병학교에 입교하기 전 한참 동안 포병학교에서 할일 없이 연병장에 왔다 갔다 하면서 신병훈련 하는 것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며 소일했다. 포병훈련도 쉬운 것이 아님을 목격했다. 105mm 특히 155mm포의 다리를 들고 뺑뺑이를 도는 기합 같은 훈련은 병사를 녹초로 만든다. 조금 동작이 뜨면 여지없이 침대몽둥이로 내리친다. 쳐다보는 것만 해도 억장이 무너진다.
하루는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단 나의 친구 오명엽(吳明燁)이 인사차 찾아 왔다. 비행사가 되고 싶어서 육군 항공대(航空隊)에 지망해서 약 2주간 항공술 기초과정 훈련을 받았는데 이북출신이라는 이유로 신원조회에서 탈락, 전방부대로 재배치되어 떠난다고 했다. 이북에서 공산당이 싫어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이 지경이 됐다며 퍽 섭섭하게 생각했다(장교가 되려면 고급장교나 고위공직자가 신원보증을 해야 함).
논산훈련소에서의 모든 과정, 생활 그리고 그동안 4, 5개월 한국군(韓國軍)에서의 나의 경험은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똑같았다. 너무 닮아서 놀랐다. 모든 것이 「솥뚜껑 가지고 자리 잡는 식」이고 「흑백(黑白)」이고 「All or Nothing!」이다. 개인의 억울함을 해소할 방법이 꽉 막혀있는 암흑세계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