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호출이 왔다. 훈련소를 떠난 후 만 3개월 여 방랑 끝에 보병학교 통역반(通譯班)에 입교가 정식으로 된 것이다. 3기 후배들과의 교우가 시작되었다. 3기생 중에는 다행히 고교, 대학동창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안영언(安榮彦), 곽장섭(郭長燮), 오현수(吳鉉洙) 군을 비롯해 민수홍(閔壽鴻), 노춘희(盧春喜), 김찬중(金贊中) 군 등 쟁쟁한 친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서로 의지가 되고 살벌한 순간순간 「유머」로 잘도 넘어갔다.
학생연대 산하에 중대(中隊), 구대(區隊)로 편성된다. 통역반 1, 2, 3기(期)는 통합해서 중대(中隊)요 각 기(期)는 구대(區隊)라고 칭했다. 우리 구대장은 김복동(金復東) 중위, 중대장은 노태우(盧泰愚) 중위였다. 모두 정규 육사(正規 陸士) 4년 즉 1기생, 통합 육사 11기생이다. 임관 후 전방부대에서 소대장을 마치고 보병학교 장교 양성의 임무를 띄고 왔다. 금방이라도 파열 될 듯한 군인정신에다 원리 원칙주의까지 곁들였으니 훈련은 알만하지 않은가. 육사 1년생 훈련을 농축한 것과 같은 정도이다.
그리고 구대장(區隊長) 훈화(訓話) 때 솔직하게 자주 이야기하다시피 “귀관들은 사병훈련까지 합쳐서 5개월이면 ‘대한민국 육군중위’가 된다. 우리 육사 출신들은 만 4개년(個年)을 죽도록 고생하고 겨우 소위로 임관한다. 그 후 또 전방 2년 삭풍과 허기에 시달려야 중위가 된다. 그러다가 이제 후방 구경을 나온 것이다. 따라서 제군(諸君)들은 장교 훈련을 하는 이 3개월 동안 농축해서 군인정신과 규율(規律)이 함양되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 등등.
보병학교 교장은 중국황포군관학교(中國黃埔軍官學校) 출신 유해준(兪海俊) 장군으로 광복군(光復軍)에서 활동하였고 남다른 애국심과 학구적인 자세로 육사출신들과 배짱이 잘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혹독한 훈련이지만 욕설이나 비하하는 언사는 일체 없었다.
보병학교 3개월의 생활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인생에서 어떤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면 이를 돌파하는 정신력이 생겼다고 본다. 최단시간 내에 일처리를 끝내고 시간약속을 꼭 지키는 일 그리고 제식훈련(制式訓練)을 통해 꼿꼿한 몸가짐, 바른 보행법 등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3주(週)째부터 주말외출이 허락되었다. 입대한지 만 5개월 만에 자유롭게 세상구경을 한 것이다. 다행히 우리집(광주체신청장 관사)이 광주 도심 대흥동에 있어 주말이면 친구들 일개 분대(分隊)를 이끌고 집으로 간다. 도중에 반드시 들르는 곳이 공중목욕탕과 충장로(忠莊路)의 술집이다.
광주의 술집문화는 특이했다. 먹을거리, 즉 안주는 거저고, 들어온 술로다가 계산하는 방법이다. 안주는 접시가 비면 계속 공급이 된다. 허기진 후보생에게는 안성맞춤 일 수밖에 없다. 실컷 먹고, 마시고 통행금지 시간쯤 스크럼을 짜고 교가에 응원가를 곁들여 소리소리 지르며 충장로, 도청대로를 지나 우리 집에 당도하면 동네가 뻑적지근했다. 젊은 우리 어머니가 개고기들을 수발하시느라고 고생도 많았다. 화장실에 엎어져 있는 놈들을 끌어내고 아침에 해장국 해서 먹이셨다.
드디어 1기생이 졸업을 했다. 윤형섭(尹亨燮) 「후보생 회장」이 고별사를 하고 식전은 엄숙했다. 그러나 이것이 웬일인가. 분명히 중위(中尉)로 임관하도록 모집 공고에 나와 있었는데 소위(少尉)를 주는 것이 아닌가! 선후배 모두 실망이 대단했다. 완전한 기만이었다.
알고 보니 정규 육사출신들이 요로(要路)에 불만을 했던 모양이다. 훈련기간을 고려할 때 중위로 임관하는 것은 좀 과하다고 한 것 같았다. 여하튼 1기생들은 소위를 달고 육군본부에 직행 집단항의 끝에 중위로 다시 계급장을 갈아 다는 넌센스가 벌어졌다. 이때의 예(例)에 따라 2, 3기와 그 후기 모두 중위로 임관했다.
우리 3기도 ‘마(魔)의 고비’ 라고 하는 단독군장으로 이리역(裡里驛)까지 구보(驅步)로 갔다 오기를 무사히 끝내고 졸업하게 됐다. 한 많은 훈련생을 면하는 것이다. 졸업 하루 전날 당시에 연대부관(聯隊副官)이던 노태우(盧泰愚) 중위가 3기 후보생 회장인 나를 연대본부로 호출한다.
가보니 노란 큰 봉투에 지폐를 잔뜩 넣어 건네주면서 귀향비(歸鄕費)라 하신다. 영문을 몰라 귀향비가 무엇입니까 했더니 “후보생들에게 임관하고 집에 돌아갔다가 후기 부관학교(副官學校) 입교 때까지의 여비조로 나오는 것이다.” 한다.
원래 귀향비는 모든 장교가 귀향과 부대배치 때 여비로 예산상 책정이 되어 있었는데 그동안 기간요원(基幹要員), 연대장(聯隊長)을 포함한 윗분들이 모두 나누어 쓴 모양이다. 이것을 육사 출신들이 발견하고 시정한 것이다. 육사 출신들이 이와 같이 군내의 많은 비리를 척결하였고 부정이 가장 심했던 식품 등 군납(軍納)비리도 육사 출신들이 검수(檢受)에 동원되어 많이 시정되었다.
고된 훈련을 마친 후보생들의 고생은 이제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