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신동 나무다리 옆 골목길에서 첫 대화를 한 이후 서로의 만남이 어언 5년에 접어 들었다. 매 주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야간 군용열차로 내려갔다가 일요일 아침 서울역에 도착하면 남산 합참(合參)으로 직행했다. 군(軍)에서 언제나 아침식사는 준비해 주니 나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부산에 내려가 있는 11시간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했다. 차츰 눈치가 보인다. 집에서도 이웃 총각 믿다가 혹시라도 하는 걱정을 하는 모양이다. 과년한 처녀를 너무 오래 붙들어 둔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육군중위 봉급 가지고는 도대체 생활 계책이 서질 않는다. 큰댁에 얹히거나 처가 신세를 진다고 해도 한계가 있고, 덜컥 아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나 지레 겁이 난다. 그러나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이럴 때는 숙이의 강한 의지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가난뱅이 신혼살림을 이겨낼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협박조로 몰아붙이니 눈물이 핑 돈다. 무언의 동의를 얻어냈다.
바쁜 세상에 5년이나 교제를 했으니 중신애비는 필요 없었다. 각자 가정에 돌아가 의사를 전하고 언제쯤이 좋은지 물어, 다시 만나 이야기하기로 했다. 금년(1958년) 12월경이 좋겠다는 결정을 보고 나의 사주단자(四柱單字)를 보냈더니 궁합은 쓸 만하고 혼례 날은 12월 14일이 좋고 장소는 신부가 사는 부산으로 결정하고, 예식장 준비 일체를 신부 댁에 일임하기로 최종 결론이 났다. 일사천리였다.
번잡한 함잡이 행사는 그만 두고 최대한 간소화 했다. 12월 13일 밤 김문수(金文洙) 군을 단일마(單一馬)로 해서 함을 보냈다. 함을 둘러멘 김 군이 경험이 없으니 바로 처갓집 안방으로 메고 들어갔다. 함은 외제(外製) 트렁크였는데 김 군은 열쇠가 트렁크 안에 있는 줄 모르고 함을 내려놓고 곧장 마당으로 나간다. 키를 내놓으라고 재촉을 하니 “내, 키 모릅니더!” 하더란다. 조르는 술책으로 알고 신부 댁에서 계속 봉투를 주면서 열쇠를 내놓으라고 재촉을 하니 “모릅니더! 봉투 필요 없습니더.” 하더란다. 마침 그때 내가 나타나 수습했다.
12월 14일 부산 대청동 백화당(百花堂)에는 시골 광양, 하동에서 대소가(大小家) 일가친척들이 오고 서울에서는 고교, 대학 동창과 함께 군(軍)의 친구들이 대거 참석해 주었다.
장인의 연고가 마산, 부산이고 우리 아버님도 다년간 두 번에 걸쳐 부산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많은 하객이 와 주셨다. 축사가 이어졌으나 지금 기억나는 말씀은 윤형섭 중위의 우인대표(友人代表) 축사였다. 이런 인연으로 尹 장관은 우리 아이들의 주례를 도맡아 해 주셨고 앞으로 우리 회혼(回婚) 때도 우인대표(友人代表) 축사를 부탁하려고 한다.
예식(禮式)이 끝난 다음, 그 자리에서 피로연을 베풀었다. 당시 관습으로는 혼주(婚主)가 떡이나 과자류로 답례를 했으나 우리는 술을 곁들인 다과회 피로연이었으므로, 불원천리(不遠千里) 하고 먼데서 오신 분들에게 다소의 대접이 되었다.
그날 청초한 신부의 모습도 너무 좋았다. 신랑, 신부 사이에 모두 근심 걱정거리가 없는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한 결합이었고, 많은 하객들의 축복을 받았다. 다만 신랑의 어머니 역은 오정자(吳貞子) 이모가 했는데 젖먹이 동생 광희(光姬)를 데리고 있던 어머니는 식에 참석을 못했다.
1주일 휴가를 얻은 군인의 몸이고 시골의 대소가(大小家) 인사 다니기와 산소 성묘도 해야 할 입장이라 먼데로 떠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신혼여행은 해운대 철도(鐵道)호텔로 정했다.
결혼식 끝내고 오후 일곱 시쯤 도착해 좀 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난다. 아니나 다를까 악당 친구들이 기습을 온 것이다. 7, 8명 되는데 내가 문을 열어젖히자 미안한지 뒤에 따라오던 4, 5명은 복도 쪽으로 도망가고 윤석만(尹錫萬) 군과 하재윤(河在潤) 군이 내 앞에 서 있다.
“신혼여행까지 따라오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노?” 했더니 대답은 간단하다. “오늘같이 좋은 날 술 한 잔 해야지!”
일층 그릴에 내려가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 같이 있던 아내는 지쳐서 방으로 올라가고 술자리는 계속됐다. 새벽 2~3시경 문여사에게 인사하고 간다고 침실로 몰려가서 또 2~3시간 농가리 대회를 벌이고 통행금지가 해제될 무렵 마지못해 철수했다. 우리 부부의 첫날밤은 이렇게 지나갔다.
한 두 시간 잠깐 눈을 붙인 다음 해돋이 구경 겸 해변 산책을 나갔다. 철썩거리는 물가 모래사장은 우리 둘만의 호젓한 시간이었고 12월의 그날은 너무 온화하고 멋진 아침이었다. 그 아름다운 자연은 길이길이 우리 기억에 남아있다.
다음 날, 사촌동생 진호(秦皓)의 안내를 받아 고향길 버스에 올랐다. 당시 부산, 광주 간을 여섯 시간에 주파하는 준(準) 고속이 있었다. 미군용 GMC트럭을 여객용으로 개조한 것인데 돌길, 자갈밭, 산길을 신들린 듯 달리는 차였다. 광주고속의 전신들이다.
마산, 진주, 하동 섬진강을 건너 나의 고향 광양 진상(津上)에 도착했다. 구순(九旬)이 다 되신 할아버님은 여덟째 규주(圭周) 삼촌이 모시고 있었다. 할아버님은 여전하시고 운동을 위해 대나무로 부채, 파리채, 바구니를 엮으시고 심지어 양산을 만들어 들기름 종이로 덮어 완벽한 방수가 되도록 작품을 생산하셨다.
할아버님의 지론은 “놀고 먹는 것은 죄악이다” 이었다. 언제나 일본 개명기의 신교육체제를 수립한 후쿠자와 유키찌(福澤諭吉)의 말, “죽을 때까지 무엇이든 할 일을 가진 자가 가장 행복한 인간이다”라는 철학을 지켜 나가셨다. 우리 내외가 첫인사를 드리자, 대뜸 “신발 네 짝 때 돈을 모아야 한다.”가 신혼 손자에게 내리시는 첫 번째 덕담이었다.
다음날 오전 내내 선산(先山)에 올라가 할머님 묘소를 비롯해 큰아버님 산소 등을 참배하고, 끝으로 우리 어머님 유택에 들렀다. 억불봉(億佛峰)을 바라보며 수어천(水魚川) 강물이 조이 흘러 묘소 앞으로 달려드는 형국의 지형인데 천하의 명당이라 한다. 서른 넷에 핏덩어리 새끼 넷을 두고 떠나신 우리 어머님께 “진휴(秦休) 장가들어 며느리 데리고 이렇게 인사 왔습니다.”고(告)하고 넙죽 엎드려 기도드렸다.
그날 오후 소달구지에 신부를 태우고 사촌 동생들과 함께 20리 북쪽에 있는 외가에 인사 갔다. 인정 많은 큰 외숙(서운 황호일(栖雲 黃鎬一 先生) : 한학자(漢學者), 도가(道家)이셨음)께서 우리를 보시더니 또 눈물지으신다. “저놈, 장성해서 드디어 짝지어 인사 왔구나.” 생각하시며 기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다. 외숙은 바로 밑 여동생인 우리 어머님을 무척 사랑하셨단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우리들을 항상 측은하게 여겨 우리를 보면 자주 눈물을 흘리셨다.
400년 고촌(古村), 창원 황씨(昌原 黃氏)의 집성(集性)마을 비촌(飛村)이다. 우리 군내에서는 제일 오래된 취락이고, 조선시대 때 크고 작은 벼슬자리도 이어졌다. 따라서 일제강점 36년간은 반일(反日)의 거점이기도 하고, 많은 분들이 북간도 지역으로 망명을 갔다.
박경리(朴景利)선생의 「토지(土地)」의 일부 소재도 비촌 황씨(飛村 黃氏)의 것으로 안다. 우리 증조할머님이 진양(晋陽 : 사천, 통영 근방)의 박씨(朴氏) 집안에서 오셨는데 여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혼자서 북간도와 고향을 왔다 갔다 하셨으며 아무도 못 말렸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