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새해를 맞이했다. 우리의 계획도 착착 진행이 되고 핵심 저격수까지 정하는 단계에 왔다. 군(軍)의 신년하례(新年賀禮)도 예년보다 좀 활발해 보였다. 자유당 당 재정부(黨 財政部)의 사전(事前) 선거자금이 군(軍) 지휘계통을 통해 좀 풀린 모양이다.
나는 1월 25일 대학 동기(同期)보다는 일 년 늦게 드디어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참말로 어려운 졸업이었다. 어느 면으로 보면 우리 아내와 공동노작(共同勞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내에게도 우리의 거사 내용을 일체 밝히지 않았다. 밤이 새도록 2층에서 구수회담을 하고 있는데 평이한 학생운동의 준비과정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갓난 애기까지 끼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새우잠을 자려니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철도 한참 덜 든 작자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한가한 부서인 군사발전국(軍事發展局)에 가면 선거 이야기가 화제였고, 특히 동아일보는 매일같이 부정선거의 사례 한두 건씩을 폭로하고, 대리투표, 환치기, 투표함 바꾸기 등등의 자유당의 계획이 매일매일 폭로되고 민심은 날이 갈수록 흉흉해져 갔다. 우리 군사발전국 차장이었던 유원식(柳元植) 대령과는 많은 대화를 했고 얼핏 군이 정치, 사회 정화를 위하여 치고 나가야 한다고 가끔 말씀하셨는데 그 때 박정희(朴正熙)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軍) 정치세력들이 음으로 양으로 모의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2월 초 어느 날 조간을 보니 임박한 선거로 인해 예정되었던 3 .1절 국군행진이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초점을 3월 1일에 맞추고 있었는데 실망이었다. 곧 신문사에 연락했더니 보도가 사실이었다. 핵심동지들에게 전달을 했더니 모두들 알고 있었다. 박대완 선생, 유세림 선생과 회동했다. 다음 기회를 잡는 방법 밖에 없지 않느냐는 의견이었고 ‘이박사도 참 명도 길다’고 모두 탄복했다. 시원섭섭한 면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니 이런 방법 밖에는 없는가? 젊은 혈기에 좀 무모하지 않은가 또한 이용당할 수 있는 소지도 충분히 있었다. 물론 얼떨결에 무기도 있겠다 닥치면 해치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 명치유신도 몇몇 20대의 젊은 지사들의 우국(憂國) 결의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가족이 있는 몸이고 아이까지 딸린 처지에 이런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옳은가 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단 날짜가 틀어지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마당에 거사란 생명을 걸고 하는 짓이지만 세부사항으로 행동계획을 옮겨보면 정말 어려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수백 번 느끼게 된다. 이렇게 거사가 중단되다보니 홀가분한 생각마저 들었고 잠도 푹 잘 수 있었다.
이제 마음을 비우니 그동안 미루어 왔던 미국유학을 본격 추진할 생각이 들었다. Dr. Stevens는 학위를 끝내자 펜실베니아 라파예트 College 지질학(地質學) 교수로 자리를 잡고 나를 초청한 것이다. 미국 문화원에서 실시하는 유학시험을 준비할 생각을 했다.
3.15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는 혹독한 전국적인 부정으로 치러졌다. 부정선거 수단으로 거론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집행기관으로 내무부가 주동이 되었고 경찰, 법무부가 외곽적인 울타리 역할을 하였으며, 군(軍)도 상층부는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주요 3대(三大) 신문인 동아, 조선, 한국은 우의(牛意), 마의(馬意)까지 동원한 조직적인 부정이라고 내리갈겼다. 피할 수 없는 민중의 항거에 직면할 조짐이 보인 것이다.
4월 20일 미(美) 문화원 시험이 잡혀있어 1주 휴가를 얻어 궁정동 집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4월 18일, 고대 법과(高大 法科)에 다니는 문춘식(文春植), 나의 처남이 헐레벌떡 귀가하더니 “자형! 고대학생들 광화문 국회 앞에서 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하고 있어요.” 한다. 금방 흥미가 동해 군복을 입고 광화문으로 내려갔다. 전차(電車)도 끊겼다. 새까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국회 앞에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었고, 군데군데 경찰이 배치되어 일반인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나는 장교 복장을 하고 접근하니 제지하지 않았다.
슬금슬금 학생 무리에 다가가 가장 뒷쪽 옛 외무부 청사 앞에서 항거 데모를 지켜봤다. 최근 복교(復校)한 입학동기 하은철(河銀喆) 군을 만났고 1년 후배들이 주동을 하고 있었다. 극히 평화로운 시위였다.
조금 있다 총장(總長)이신 유진오(兪鎭午) 선생님이 국회 정문 높은 돌 램프에 올라서시더니 “우리 고대(高大) 학생 여러분!” 하면서 말씀을 시작했다. 부정선거에 관해 자유당과 정부를 싸잡아 한참 비판하시더니 “학생 여러분! 여러분의 뜻을 요로(要路)에 강력히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두워지면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개별 해산해도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앞장설 터이니 우리 모두 학교로 돌아가서 해산합시다. 나는 나의 신명을 걸고 우리 학생들의 뜻을 반영 하겠습니다!” 라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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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들에게 시위를 풀고 학교로 돌아가자고 설득하는 유진오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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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학생들은 모두 착했다. 총장이 한 마디 하면 따르는 아름다운 사제지간의 정리가 있고 그러한 고대의 전통도 강하게 살아 있었을 때였다. 선두가 대열을 짓고 교기(校旗)를 앞세우자 서서히 종로 쪽으로 학생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대열이 사라질 때까지 광화문 네거리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효자동으로 해서 궁정동 집으로 돌아왔다.
사건은 그 후 종로4가를 지나 동대문시장에서 터지고 말았다. 대열을 짓고 평화스러운 행군을 하던 고대생(高大生) 선두를 이정재(李定宰) 산하 폭력조직이 기습해서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말았다. 위협만 가하고 튀어 도망갔는데 이것이 발단이었다.
다음날 4월 19일, 고대생은 물론 타 대학생 특히 동국대, 성균관대, 중앙대생이 대거 출두하고 서울대, 연희대학까지 광화문 쪽으로 집결하면서 학생혁명은 시작되었다. 인근의 중.고교생들까지 합류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학생들의 집결체가 용틀임을 한 것이다.
‘경무대로 가자! 대통령을 만나자!’ 대통령 관저로 가는 큰길은 삽시간에 새까만 학생 무리로 가득 찼다. 앞장 선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효자동 종점 쪽으로 행진하자 종점 네거리를 지키고 있던 경찰과, 계급장 없이 군복만 착용한 군인들이 공포를 쐈다. 그리고 일시 멈칫했다가 대열이 계속 다가오자 공사용으로 갖다 놓은 하수도용 토관과, 상수도용 주철관을 굴려 내려 보내고 이런 와중에 학생들을 향한 발포가 시작되었다.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