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과도내각의 출범
노회(老獪)한 애국자 이 박사(李博士)는 친한 서울 시민들의 측은한 송별 속에서 이화장(梨花莊)으로 향했다. 더러는 박수도 나왔고 부녀자들은 흰 소복을 입고 울기까지 했다.
허정(許政)선생의 과도정부(過渡政府)가 들어섰고 다음 정부가 정식으로 들어설 때까지 care taker를 맡았다. 허 수반(許 首班)은 원래 정치적인 야심이 없는 분으로 알려져 주위의 존경을 샀고 과도정부를 무리 없이 이끌어 갔다. 다만 이 박사(李博士)를 망명 보냈다고 해서 일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노 애국자이며 초대(初代)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 비참한 지경에 빠지는 것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학생, 시민의 많은 죽음 앞에서 어떠한 상황이 전개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야반도주 하다시피 부랴부랴 서둘러 특송작전(特送作戰)을 벌여 하와이로 띄워 보냈다. 당시 기자들 대부분은 잘한 일이라고 공감을 했다.
이기붕(李起鵬) 가족의 참혹한 최후와 부정선거의 원흉들은 지리멸렬 간부들은 모두 숨기에 바빴다. 학생들은 대단히 착했다. 만일 광주시민봉기(光州市民蜂起)와 같은 강도(强度)였다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광화문에 있는 반공기념관에서 일시 방화 비슷한 일이 일어났으나 학생 수습대에 의해 바로 진화되었고, 걱정했던 반미(反美)구호도 별로 없었다. 기념관 앞의 「맥아더」 동상에는 꽃다발이 놓이고 화환이 둘러졌다.
이(李) 대통령의 하야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퇴진이었다. 살아서는 다시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외로운 객사로 끝이 났다. 그의 건국 대통령으로서의 공(功)도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사학자들도 그의 사료(史料) 자체를 다시 열어보는 것을 꺼려하는 입장인 것 같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으로서 건국의 초석을 놓고, 6.25라는 민족상잔의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국권(國權)을 유지하고 실지(失地)를 회복한 공은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우선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 지금 세계에서 보편타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市場經濟)」를 채택했고 그 반석 위에 우리 헌법을 제정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의 뼈대 위에 교육(敎育)이라는 살을 입혔다. 각 군(郡)에 하나씩의 중등학교를 설립했다. 김법린(金法麟) 같은 자유 교육가를 문교장관으로 앉혀 학교를 양산케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결재 서류가 무엇인 줄 아나! 학교 인허가 서류일세!”라 하며 “다방(茶房)에서도 허가서에 서명을 해 주셨다”는 일화가 있다.
이 박사는 취임 전부터 토지개혁을 단행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일부 지주들과 부호들은 성급한 개혁이라고 반발했지만 그 특유의 「카리스마」로 제헌국회(制憲國會)에서 해치웠다. 지가증권(地價證券)이라는 것을 발행해 보상을 했으나 곧 6.25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에 파묻히고 말았다. 토지자본이 금융자본화 하는 형상이었다. 산업화 자본으로 활용은 못했으나 자식들 교육비로 잘 써먹었다.
그리고 농지개혁이었으므로 산지임야(山地林野)와 깔밭 같은 잡종지(雜種地)는 그대로 소유를 인정했으므로 지주들은 다소 숨통이 열렸다. 당시에도 쌍방이 「윈, 윈」할 수 있도록 배려는 했던 것이다.
그리고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즈음에 이박사의 반발은 하늘을 찔렀다. 미국 군인들은 이 박사의 별호를 「북진(北進)」으로 붙이기도 했다. 그 저항의 결과로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을 얻어내 그나마 반세기 넘게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 박사의 공(功)은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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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야해서 도미하는 이승만을 공항에서 배웅하는 허정 (1960. 5.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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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 변화와 하극상
부정선거 후유증은 군(軍) 내부에서도 심각했다. 자성론(自省論)이 일고 곳곳에서 젊은 장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타겟」은 송요찬(宋堯讚)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당시 전(全) 육군의 조직적 부정선거의 책임은 뭐니뭐니 해도 총장에게 있었고 우리 초급장교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선거기간 동안 부대방문이 많았다.
곧이어 총장의 교체가 과도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최영희(崔榮喜) 장군이 지명되고 취임까지 했다. 그러나 육사 8기를 중심으로 한 영관장교들은 최(崔) 장군도 3성(三星) 장군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장성으로서 과도하게 선거에 관여한 모든 인사는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차제에 군수품, 군(軍) 재정과 군(軍) 인사에 관련된 비리와 부정은 밝혀지고 척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곧 「군(軍) 하극상(下剋上)」의 줄거리였다. 건군(建軍) 12년 역사 중에서 이러한 소용돌이는 일찍이 없었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철저한 기강을 먹고 사는 군(軍) 조직에 하극상은 용납될 수 없었다. 몇몇에게 퇴역 조치가 내려졌다. 이것이 1년 후의 5 .16 군사혁명(軍事革命)과 직접 관계가 된다.
아버님의 출마와 낙선
과도정부는 곧 새로운 합법정부 출범을 위한 수순을 밟았다. 새로운 헌법 하에서의 양원제(兩院制) 의원선출을 위한 6.10 선거가 시작되었다. 민주당의 압승이 예상되는 가운데 신파(新派), 구파(舊派)의 갈등은 꼴불견이었다.
이때 아버님이 체신부를 그만두시고 고향인 광양군(光陽郡)에서 출마하기로 결심하셨다. 자유당이 망하고 민주당 세상이 되었는데 이 새로운 태풍을 이겨낼 것이냐, 다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제헌(制憲) 때부터의 우리 기반은 그대로 유지가 되었고, 아버님, 작은 아버님들은 고향의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많은 기여를 해오셨다. 우리 외가와 공동 노작(勞作)으로 군내(郡內) 첫 중등학교를 세웠고 배출한 졸업생들이 곳곳의 「인프라」에 배치되어 있었다.
선거 전문가인 우리 고숙(姑叔 : 강만원(姜萬遠))이 예상득표를 주판 계산으로 해보면 당선 가능성이 보였다. 자금 준비는 좀 미흡했지만, 순천에 사는 가까운 일가가 개인적으로 대출해 주겠다는 약속도 있어 본격적으로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무소속 출마를 결심하셨다.
사지사 돈지돈(査之査 頓之頓),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 돈은 있는 것이 한계였다. 그때만 해도 돈의 물량선거였다. 몇 표를 가지고 있으니 얼마를 내 놓으라 하는 승부결판형이 있는가 하면 어느 동네의 몰표가 와르르 무너진다는 협박성 승부도 있고 가지각색이었다.
정치의 백전노장 백남억(白南億) 선생의 선거와 관련된 좌담을 한번 들은 바 있다. 백 선생님이 유세(遊說) 지원 차 경남 남지(南旨)에 가셨더란다. 남강 이쪽은 여당에서 「밀짚모자」를 주고 강 건너편에서는 야당에서 비슷한 같은 모자를 선물하는데 어떤 지방농부 유권자가 나룻배를 타고 왔다갔다 하면서 모자를 얻어 머리에 여남은 개를 고깔처럼 포개 쓰고 다니더라는 웃지 못 할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유당 10년에 유권자도 모두 같이 부패한 것이다.
정치하곤 거리가 먼 착한 우리 어머니께서 부녀회 안내로 이 동네 저 동네 표 구걸을 다니시는데 평소 깍듯했던 아주머니들이 선거 때엔 어찌 그리 목에 힘을 주는지 딴 사람들이 되더란다. 이 마을 저 마을 한참 돌다가 해질 무렵 어느 마을 어귀에 있는 나지막한 초가집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것을 보자 왈칵 눈물이 나더란다. 저것이 바로 행복인데 말이야!
날이 갈수록 선거전은 치열해 갔다. 중앙에서 민주당 유세단이 내려와 장터에서 한바탕 불어 대면 민심이 홱홱 돌아섬을 느낀다. 바람은 거셌다. 인근 순천, 여수, 하동에서 이제 여당이 된 민주당이 계속 기세등등했다. 무소속 아무개가 유리하다 하면, 인근의 민주당 후보들이 매일 교대 교대로 찾아와 포문을 열면서 무소속은 자유당의 패잔병이라고 떠들어대면 먹혀 들어갔다.
학벌, 경력, 집안 고정표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대적할 상대가 아닌데 후반에 들어 고전(苦戰)의 기미가 역력했다. 상대방은 민주당(民主黨), 야당으로 선거 때만 되면 고정적으로 출마하시는 우리 사돈뻘 되는 분인데 이번에는 선전해 갔다.
그리고 제헌의원(制憲議員) 김옥주(金沃周) 삼촌의 좌파(左派) 고정표는 ‘초록이 동색’이라 좌익(左翼)의 거물 최백근(崔百根 : 5.16 후 민족일보 사건에 연루되고 사변(事變) 후퇴 시에 북쪽에 갔다가 귀환 했다 해서 간첩으로 몰려 사형됨)씨 쪽으로 몰려갔다.
약 3주(週)간의 혈전 끝에 개표 결과 낙선이었다. 민주당 김석주(金錫柱) 8,000여표 진보 측 최백근(崔百根) 1,200표 아버님(金善周) 6,000여 표이었다.
전국에서 몇몇을 제외하고 민주당의 전승이었고 홍천 이재학(李在鶴)선생만은 자유당(自由黨)으로 옥중(獄中) 당선됐다. 이제 야당과 여당은 민주당 내에서 신파와 구파로 나누어지는 보수 양당으로서 「짐 프라이스」가 말하는 ‘똑같은 속이 텅 빈 두 병에 라벨만 하나는 민주, 하나는 공화’라는 표기에 어울리는 정국이 시작된 것이다.
평온했던 우리 집은 졸지에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자급자족했던 우리 가계(家計)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아버님의 실직(失職)은 말할 것도 없고 살고 있는 집(서울 궁정동 집 포함) 농토와 재산, 아버님이 유산으로 받은 고향의 임야 그리고 지금은 광양제철 부지 근처의 광대한 깔밭 섬진강가의 잡종지 등 있는 대로 팔아 제쳤다.
재산이란 참말로 허망한 것이다. 모으는데 수십 년이 걸려도 쓰려고 치면 단 며칠 만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돈이요 재산이다.
그나마 동정금(同情金)이 조금 남아 아버님은 용산 교통부 근처의 조그만 한옥(방 둘에 마루)을 하나 사서 입주하셨고, 나는 전세금을 조금 얻어 용산 쪽 한강에 가까운 허름한 집 방 한 칸을 얻어 우리 내외와 큰딸 효성이 셋이서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