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과 VISA가 해결되면서 이제는 미국에 도착하기 위한 최소한의 여비 마련이 시급했다(당시 미국 서부의 관문 Seattle 까지 항공료 약 650달러). 서(徐) 장군이 HID 대장 이철희(李哲熙) 장군에게 가 보라고 하신다. 달러로 200$을 지원받았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국가재건 최고회의 최고위원 박태준(朴泰俊) 대령, 유원식(柳元植) 대령, 박원빈(朴圓彬) 중령, 그리고 최고회의 사무처장 박희동(朴熙東) 대령이 여비를 보태 주셨다. 방첩대장(防諜隊長)으로 새로 부임한 김재춘(金在春) 대령과 그 외 김종호(金宗鎬) 중령, 윤석민(尹錫敏) 중령은 개인적으로 전별금을 마련해 주셔서. 이렇게 항공료와 여비는 대충 마련된 것이다. 이분들의 도움에 지금도 감복하고 있으며 어려운 때였으므로 깊이 새겨 놓고 있다.
아이 둘을 맡긴 채, 생활대책도 변변히 세우지 않고 막연히 “살 집은 있겠다, 선거로 거덜이 난 큰댁이지만 서울에 있고 부산에 처가댁이 있으니”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떠나가게 된 것이다. 매우 무책임하고 무모한 짓이었다. 아내는 여기 생활이 힘들겠지만 공부도 시기가 있고, 미국에서의 면학(勉學) 조건이 되어 있으니 걱정 말고 빨리 떠나라는 격려의 말을 했지만 못내 미안하고 허전했다.
두루 대소가(大小家)에 인사하고 떠나는 날 아내에게 공항에 나오지 말도록 일렀다. 본인도 의외로 감성적인 데가 있어 공항에서의 이별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떠나는 서방님을 멀찍이서 지켜보다 방에 들어와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1961년 12월 중순 김포공항에 막 땅거미가 질 무렵, Northwest B-707 사발제트기는 힘차게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Boeing 707 취항은 처음이었고, 유학생 男女 36명이 탑승했다. 150여 명의 좌석에 승객은 반 정도 차 있었다.
지난 2년은 정말로 戰場 못지않게 숨 가쁘게 돌아갔다. 내 몸 하나 내던져 나라를 구하겠다는 순수한 생각,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많은 갈등, 뒤따른 잠 못 이룬 그 많은 밤들 그리고 5.16의 소용돌이, 떠나기 직전까지 그 바쁜 출국수속 등등 이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떠나는 순간 착잡하고 고독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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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미 일주일 전의 가족사진 / 효성 2년 3개월, 성한 7개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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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씬한 백인 「스튜어디스」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푸짐하게 나온 기내식도 먹을 생각이 없다. 한참 앉아 있으니 기내가 상상 외로 온도가 높아 덥다. 그도 그럴 것이 외풍이 심한 연탄 방에서만 생활했던 우리는 미국 온도에 맞지 않았다. 거기에다 먼 여행이라고 잔뜩 내의를 끼어 입었으니 땀이 날 정도였다. 슬금슬금 걸어 새장 같은 화장실에 들어가니 웬 소독 냄새와 향수 냄새가 이렇게도 독한지 팬티와 런닝셔츠만 두고 껴입은 모(毛) 내의는 모두 벗어 들고 나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와이셔츠 주머니 쪽에 잉크가 왕창 묻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버님이 주신 「파카」만년필(그 당시 한국에서 고급 소지품에 속했음)이 기내 기압의 차이로 잉크가 새어 나온 것이다. 이제부터 실수 연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문화적 쇼크도 그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두 시간 남짓 비행 후에 Tokyo, Haneda 상공에 이르렀다. 종전(終戰) 후 15년이 지난 동경(東京)은 휘황찬란한 전기불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별천지다. 비행기는 불빛 속으로 서서히 내려앉는다. 당시 한국에서는 전력 용량이 수력, 화력 다 합해서 80여 만kw에 송전(送電)은 시간제, 그리고 수돗물도 시간제에 2~3시간 나오다 끊어진다. 변두리 고지대는 큰길가 공동수도에 시간 맞춰 내려와야 양동이로 하나 둘 얻어서 돌아갔던 시절이다.
약 두 시간 후에 알래스카 앵커리지로 떠난다고 한다. 우선 C.I.Q 내 면세점을 들러 보았다. 밝고 찬란한 조명, 차분한 인테리어 그리고 그 많은 상품들, 오고가는 사람들의 단정한 옷맵시 그 당시 미군들이 즐겨 보는 「라이프」 잡지의 그것과 똑같다.
한국에 두고 온 아이들 생각에 장난감 가게 앞에 섰다. 점박이 강아지가 꽹꽹 짖고, 곰돌이 재롱에 인형은 춤을 추고 옆에서 모형 기차가 씽씽 달린다. 모든 장난감이 살아 움직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일본이 그 짧은 세월에 이렇게 발전할 수 있는가! 신기했다. 점원과의 대화는 영어로 주고 받는다, 제법 잘 하는 일본말은 싹 숨기고. 보초 없는 자존심 살린다면서, 지금 생각하면 아주 촌스러운 짓이다. 언어에 무슨 죄가 있는가 편한 소통을 위해 쓰는 것이 언어인데, 편행된 민족주의란 촌스럽고 숨이 막히는 짓이다. 「달러」가 아까워 그 좋아하는 원두커피 한 잔 안 사먹고 하네다를 떴다. 일본 승객이 많이 탔다.
칠흑 같은 밤 속을 계속 날더니, 한숨 깜박한 사이에 기내 방송이 나온다. 북태평양 일부변경선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하는 장거리 고공비행이라 ‘만일 여기서 사고라도 난다면’ 하는 걱정도 해 본다. 저 천길만길 아래 차디찬 북태평양 바다에 빠진다?
여승무원이 잠자는 우리를 깨우더니 아침 식사라며 먹을 것이 나온다. 약 한 시간 후면 알라스카,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 한단다. 오전 열시라고 하는데 캄캄하기는 마찬가지. 북극에 가까워 12월에는 세 시간 정도, 뿌연 해를 볼 수 있다는 설명이 스튜어디스의 입에서 나온다.
「앵커리지」는 미국의 첫 관문이라 입국, 통관을 여기에서 마쳐야 한다. 까다로운 수속이 시작되었다. 입국 심사대에서 지참해 간 X-Ray를 일일이 비쳐보고 판정한다. 하자가 있으면 그 길로 격리되어 돌려보낸단다. 바짝 긴장하여 죄인처럼 서 있는데 OK 한다. 유학생 36명 모두 무사했다. 그런데 일본인 여행객들은 그런 번거로운 신체검사가 없었다. 좀 배알이 생긴다.
화장실에 들렀다. 소변을 보는데 바로 앞에 대변소 문이 열리더니 유학생 하나가 나오면서 “죄송해요, 이 변기 어떻게 사용하는 겁니까?” 한다. 다시 말해 벽 쪽으로 타고 앉는 것인지, 문 쪽으로 앉는 것인지를 묻는다. 난생 처음 좌변기를 사용해 보는 것이다. 문득 6.25 사변 때 생각이 났다. 연락장교단 훈련소가 명동성당 수녀원에 위치했는데 화장실을 수녀님들과 공동으로 쓰고 있었다. 매일 수녀원장님이 상기된 얼굴로 찾아와 변기 사용 요령을 강의하고 가시곤 했다. 일부 훈련생들이 앉아 볼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반 변기처럼 군화를 신은 채 그 위에 걸터앉으니 깨끗해야 될 자리가 엉망이 되는 것이다. 백배 사죄하는 촌극이 벌어진 일이 있었는데 그때가 문득 생각이 났다.
실수 연발이다. 심지어 공항 대기실에서 정수기 물을 컵에 받아서 먹는데 물이 안 나온다. 옆에 있던 미국사람이 웃으면서 다가와 작동하니 물이 콸콸 나온다.
공항 내가 무척 덥다. 바깥 공기가 그리워 2층에 마련된 「앵커리지」 시내의 야경을 볼 수 있는 테라스에 나갔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나와 구경하고 있었고, 몇몇 유학생도 보였다. 바깥 공기는 무척 차가왔고 오싹했다. 서울의 겨울 기온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영하 30도란다. 전방 생활에서 20도, 25도까지는 경험해 봤지만 30도는 처음인 것 같다.
약 다섯 시간의 Stop over 후에 다시 출발했다. 같은 B-707인데 이제는 국제선이 아니라 미국 국내선이다. 시애틀 / 타코마 공항까지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는데, 거대한 산맥이 계속되고 흰 눈으로 뒤덮인 설경이 장관이었다. 극히 이국적인 느낌이다. 「캐나다 밴쿠버」 가까이 오니 눈이 갑자기 없어지고 「시애틀」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산과 들은 푸른색으로 뒤덮여 있다. 기후의 변동이 심했다. 「멕시코」난류의 영향이란다.
타코마(워싱턴 주)에 내려 드디어 미국 본토의 땅을 밟았다. 버스로 약 반시간 달려 시애틀 중심가 「그레이 하운트」 터미널에 도착했다. 비행기로 대륙을 횡단해 뉴욕에 가면 약 여섯 시간이면 도착하지만, 지금은 「크리스마스」 휴가에 신학기 개강까지 다소 시간 여유가 있다. 대륙을 육로로 달려보는 것도 미국의 구석구석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기회이고 차 삯이 훨씬 저렴했다($160 : $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