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실(政務室)로 명칭이 변경되기 전에는 경제시정실(經濟市政室)이라고 했다. 따라서 경제관계 사항은 정무실(政務室)에서 계속 다루고 있었다. 나는 시정(市政)을 담당하다 경제부처관계 업무를 다루게 되었다.
경제기획원에서 매 주(週) 화, 목요일에 개최되는 경제각의(經濟閣議)에 총리실 「Observer」로 참석했다. 또 한분의 「Observer」는 나의 고교 선배인 청와대 한준석(韓俊碩) 수석(首席)이었다.
각의(閣議)의 주재(主宰)는 부총리가 했는데 내가 처음 참석할 때에는 김유택(金裕澤) 장관이었다. 김(金) 장관은 성격이 온화하고 신중한 분이 되어 당신의 의견을 표출하지 않고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토의하고 합의를 도출하려고 노력하는 분이었다. 모시고 일하는데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고 어느 면으로 보면 답답하기까지 했다.
얼마 후 장기영(張基榮) 한국일보 사장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부임했다. 그분의 성격에 따라 경제각의(經濟閣議)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대단히 의욕적이어서 화, 목요일 오후 1시에 하던 회의를, 일상업무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면서, 오후 3시부터 시작했다. 따라서 저녁식사를 거르면서 8, 9시까지 회의가 진행되곤 했다.
기획원 직원들은 장관이 퇴근을 못하니 그대로 남아 일했고, 2차 5개년계획도 기획원의 주도로 역동적으로 진행되었다. 모두 사명감과 국가관이 투철한 공직자의 위상이 잘 나타나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배는 고프지만 성취감에 모두 마취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이때 이러한 의욕의 Conductor(지휘자)는 역시 장기영(張基榮) 장관이었다. 모든 스타일이 전혀 권위나 관료적인 면을 엿볼 수 없고 기업의 CEO같은 풍모였다. 아집도 강하고 추진력도 대단했다. 실무에 밝고 금융관계에도 해박해 좌중을 완전히 lead하는 장관이었다.
좌담에 능하고 잡다한 경험이 많아 그 지식을 적절히 이용했다. 안건은 주로 공공, 민간 차관(借款) 승인 그리고 금융(金融)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정부 세입예산(歲入豫算)의 50%를 미국 원조에 의존했던 시절이었으므로 잉여농산물 처리 등이 주요 논의사항이었다.
차관(借款) 승인 건은 많은 이권(利權)이 관계되어 있어 관련부처에서 관심이 많았고 예민한 측면이 불거지곤 했다. 이런 난제(難題)를 왕초는 잘도 가닥을 잡아 풀어 나갔다.
목재문제가 나오면 당신이 그전에 조선은행 청진(淸津)지점에 근무할 당시, 서울에 조선은행 건물을 신축하는데 필요한 목재(木材)를 전부 함경도에서 사입하여 서울로 추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목재의 강도, 종류(種類)에 대한 특강(特講)을 할 정도로 목재에 대하여 해박했다.
양곡(糧穀) 문제가 나오면 또 신이 난다. 선린상업학교 시절, 일찍 과수가 된 어머님을 모시고 양곡도매업을 서빙고 강가에서 했다고 한다. 충주(忠州), 여주(麗州) 등지에서 내려오는 뱃길 물량을 중심으로 거간 역할을 다년간 한 경험으로, 쌀의 품질부터 대두(大豆), 팥 등 잡곡(雜穀)에 이르기까지 농림장관을 압도할 정도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분에게는 관료의 계급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무(實務) 기안자(起案者)가 가장 내용을 잘 안다고 하는 취지에서 국, 과장을 젖히고 실무 계장, 심지어 주사(主事)하고 직접 통화하고 설명을 요청하는 일도 종종 있어 한때 기획원에는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실무진은 사기가 오르고 무능한 중간 간부는 황당한 일을 자주 당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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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과 브라운 주한미국대사의 한.미잉여농산물협정 조인식 모습 (1964) [출처 ;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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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화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인근에 있는 USOM(미국 경제원조처)에 들러 잉여농산물 처분관계, 통화문제 등을 협의했다. USOM 처장(處長)이 하도 잔소리가 많고, 한국현실을 감안해 주지 않는 점에 답답해지면 눈을 감고 듣기만 한다. 네 마음대로 지껄이라, 하는 태도다. 그러다가도 어떤 순간에 처장(處長)이 한국정부에 유리한 발언을 할라치면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What did you say?” 하면서 대들듯 태도를 돌변하는 순발력에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주로 통역을 맡았던 당시 공공차관과장(公共借款課長)인 양윤세(梁潤世) 씨가 왕초의 외교 매너를 무시한 자유분방한 태도에 마음 조마조마함을 많이 느꼈으리라 여겨진다.
경제각의(經濟閣議) 사인방(四人幇)은 장(張) 부총리, 박동규(朴東圭) 재무장관, 차균희(車均禧) 농림장관 그리고 해군군의관 출신 오원선(吳元善) 보사부장관이었다. 차(車) 장관, 오(吳) 장관은 다혈질로서 자주 충돌했고, 박동규(朴東圭) 씨는 느긋한 성격으로 유들유들하게 처신하면서 재무부 권한을 철저하게 지켜나갔다.
대통령 지시사항이라고 하면서 돈을 내라고 하면 “대통령은 나라의 수장(首長)으로서 길가의 잡초도 관심있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대통령 지시사항, 관심사항이라고 무조건 챙기다 보면 나라 살림 거덜납니다.” 하며 배짱 좋게 반격하는 모습에 나는 존경을 표했다. 잘못 들으면 대통령 권위를 해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그때 박(朴) 대통령의 조립(造立)된 위상이 대단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빨리 끝나는 날에는 사무실에 돌아와 회의록을 작성, 주요안건과 논의 진행상황을 요약해서 박(朴) 수석에게 보고하고 퇴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종 밤늦게까지 회의가 진행되어 9~10시경에 끝나면 집으로 일거리를 가지고 가서 새벽 1~2시까지 주요사항을 요약해 총리가 출근하시기 전까지 박(朴) 수석에게 보고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항상 박(박) 수석의 전용차를 대기시켜 주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주요 경제상황은 부총리와 청와대 사이에서 대부분 처리되므로, 나의 요약 보고가 아니면 총리(總理)는 경제관계 돌아가는 판국에서 다소 소외될 수도 있었다.
기세 좋게 나가던 장(張) 부총리도 한풀 꺾이는 계기가 있었다. 야간에 도둑이 들어 장관실에 침입해서 주요서류와 캐비넷 안에 있는 금품(金品) 등을 도둑맞은 것이다. 당시 비밀 보안검열이라는 명분으로 관공서 주요 사무실에 야간에 침입해서 발칵 뒤집어 놓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그런 일로 왕초의 허점이 노출되지 않았나 생각되고 많은 「루머」가 떠돌아 다녔다.
그런 얼마 후 포항제철 기공식에 내려가 있던 장(張) 부총리가 「라디오」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몇몇 장관이 경질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왕초는 「한국일보」로 원대복귀 했다.
나는 경제각의(經濟閣議)에 다년간 출석함으로써 정책주요사항에 실무적으로 귀중한 경험을 하였다. 나의 앞으로의 여러 직책 수행에 밑거름이 되었고 또 많은 사람을 사귐으로써 인적(人的) 울타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