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약 2주가 지나고 전황도 별 진전이 없었다. 일곱 식구의 양식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 큰댁 형님들과 의논 끝에 서울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으니 두 부상자와 조무래기 아이들을 앞세우고 고향으로 낙향하기로 했다. 용산 철도관사에 사는 셋째 숙부님 댁 전 식구, 작은어머님을 비롯해 갓난 애기까지 6명, 큰댁에서 진성 형님과, 극적으로 의용군 훈련소에서 탈출해 큰댁에 숨어있던 일곱째 삼촌 泛周(당시 高麗大 졸업반이었음), 그리고 우리 집에서는 나와 여동생 英子(中2). 모두 합해 10여 명의 가족 피난 제대(梯隊)가 형성된 것이다.
통행의 안전을 위해 범주 삼촌이 제헌의원 김옥주(沃周) 숙부님을 만나 서울시 인민위원회가 발행한 거주증명 겸 통행증을 발급받아 왔다. 모두 9월 초 어느 날 새벽에 용산 집에 집결했다. 기차역에서 소화물용으로 사용하는 일본식 손수레를 숙모님이 준비해 놓으셨다. 침구와 옷가지 그리고 식량과 바꿔 먹을 물품들을 가득 싣고 오전 아홉시 경에 출발했다.
앞에서 끌고 가는 주무(主務) 마부는 삼촌. 진석이 형은 손의 부상 때문에 나와 함께 뒤에서 밀거나, 앞에다 로프를 매고 어깨에 걸머지고 끌어당기는 일을 했다. 수레의 성능이 좋아 우리 일행의 도보행군은 아주 빨랐다.
다행히 폭파된 한강인도교는 교각에다가 밧줄을 매고 나룻배가 빨리 갈 수 있도록 설비가 되어 있었다.
노량진, 시흥, 안양, 수원, 그리고 어둑어둑할 즈음에 오산읍 입구 근처에 헛간을 하나 마련하고 하룻밤을 보냈다. 날씨가 덥기도 하거니와 대낮에 도시를 지나는 일은 가급적 피했다. 언제나 어둑어둑한 새벽에 출발했고, 오전에 그날의 3분의 2의 거리를 주파하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경부국도나 주(主) 보급로는 피하고 군도(郡道), 지방도(地方道)를 택해 내려갔다.
오산을 새벽에 출발, 안개 자욱한 길을 걸어걸어 서정리를 거쳐 온양, 도고온천에 이르렀다. 하루 평균 50~60km의 강행군을 했다. 도고에서 자고 다음날 예산 대흥을 거쳐 박헌영의 고향인 청양에 도착, 늦은 점심을 했다. 이어 부여 금강다리 근처까지 강행군, 밤중에 도착했다.
부여 시골마을의 좌익들은 만만치 않았다. 밤중에 총을 메고 나타나서는 꼬치꼬치 묻고 사상검토를 한다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다행히, 옥주 숙부가 마련해 준 증명서가 효력을 발휘해 다음날 무사히 풀려나 남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드디어 오후 느지막하게 전라도 땅, 삼례 근처의 만경천에 이르렀다. 모두 훌렁 벗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숙모님도 옷을 입은 채 젖먹이 애기를 안고 풍덩 물에 들어가신다.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믿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옥주 숙부님과 같이 형무소에서 풀려난 제헌의원 이구수, 그리고 노일환 씨가 모두 인근 출신이어서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풀려날 길이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또한 이제 이틀 쯤 후면 고향땅에 당도한다는 안도감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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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끌고 밀며 피난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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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의 외곽으로 돌아 임실, 오수 쪽으로 향했다. 가끔 미군 정찰기가 공중을 맴돌며 우리를 관찰하는 경우도 있었다. 절대 숨지 않고 당당히 수레를 끌고 달렸다. 아마도 공중에서 봐도 가족의 피난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철도 터널마다 기관차, 화차들이 숨겨져 있었고 입구 쪽에서는 가끔 연기가 뭉게뭉게 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전투기에는 관찰되지 아니하였다.
낮에는 교량 등이 폭파되지만 해만 지면 미리 비축해 놓았던 침목 등을 이용해 재빨리 다리를 복구하여 밤 12시쯤이면 군용열차가 운행이 되었다. 그 기동성은 정말 탄복할 만 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북한에는 몇몇 대학에 철도기계공학과라는 철도 전문학과가 있었다고 한다.
임실 근처에서 하루 자고 남원 옆을 지나 주생이라는 소읍을 지나니 섬진강 상류의 제법 큰 강을 지나게 되었다. 모두 아랫바지를 벗고 손수레가 거의 잠길 정도의 물길을 지났다. 물에 들어간 나의 동생 영자가 발이 따갑다고 울면서 따라 건너고 있었다. 건너편 제방에 도달해 동생의 발을 처음 들여다보았더니 5일 동안의 강행군으로 두 발이 온통 검푸르게 멍이 들어 있고 물집이 여기저기 터져 요란스러웠다. 아뿔싸! 동생이 혼자 낙오될까봐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이빨을 악물고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역시 어린 나이인지라 다음날 아침에 보니 꺼들꺼들 말라 있었다. 붕대로 대충 감고 꿰진 신발을 억지로 신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꼬맹이 아이들은 내리막길이나 평탄한 도로에서는 손수레에 태워 줬기 때문에 발의 상처가 별로 심하지는 않았다.
곡성에서 일박, 다음날 구례군에 도착했는데 하동으로 가면 고향집이 훨씬 가깝다. 그러나 야간에 진주 함안, 마산 전선으로 이동하는 의용군 대열 때문에 그쪽으로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친절한 구례군 주민의 조언이 있어, 큰 재를 넘어 순천 쪽으로 빠지기로 했다. 아마 지금까지 6일간의 일정 중에서 가장 험한 산길을 넘는 일인 것 같다.
모두 달려들어 수레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세 시간의 고투 끝에 큰 재를 넘었다. 드디어 승주군인 것이다. 하룻밤 노숙을 하고 드디어 광양읍을 지나 진상면 지원리 우리 큰댁에 도착했다. 큰댁은 많은 의용군 젊은이들이 집을 차지하고 주간에 휴식, 야간에 이동하는 중간 정거장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태어난 큰집에 들리지 않고, 할아버님이 사시는 별채 또랑 가의 집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던 여덟째 삼촌 규주(圭周)는 부산으로 후퇴했고, 막내삼촌인 행주(行周)가 할아버님을 모시고 있었다. 평소 별 표정이 없고, 희노애락을 표시하시지 않는 완고한 할아버님이 거지꼴의 우리를 반기면서 “잘왔다. 고생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잘 왔다.” 하시면서 우리를 반기시는 것이다. 모든 역경의 피로가 일시에 풀리는 듯 했다. 우리 가족 일행 10명, 아이들 6명은 낙오하지 않고 천리길을 잘도 따라왔고,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배탈, 고뿔 걸린 사람 하나 없이 무사히 7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