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餘暇) 선용
모두가 30대 중반, 또는 40대 초반이어서 혈기왕성했다. 가장 경제적이고 운동이 되는 분야는 역시 등산(登山)이었다. 풍류를 즐기고 바둑이 1급이었던 민원실의 윤흥우(尹興祐)를 필두로 김창희(金昌熙), 오종표(吳鍾杓), 나 그리고 가끔씩 김형무(金炯武), 김영만(金英萬), 이연택(李衍澤) 제씨(諸氏)가 동행했다. 주말에는 주로 서울 근교 북한산, 도봉산, 백운대, 수락산을 등반했다. 하산(下山)하면 반드시 공중탕에서 목욕을 하고, 근처 냉면집에서 냉면 한 그릇과 시원한 맥주 한잔을 곁들인 조촐한 행사로 산행을 끝냈다.
연휴 때는 설악산 대청봉, 치악산, 오대산, 지리산 등 남쪽의 명산을 모두 섭렵했고, 우리 고향 뒷산인 백운산까지 탑승했다. 백운산은 광양, 하동, 구례 사이에 끼어 있는 명산이다. 일제 때 동경제대(東京帝大) 연습림(練習林)으로 희귀한 수목들이 우거져 있고, 여순사건(麗順事件)과 6.25때는 빨치산의 은거지로서 더 유명한 곳이다. 지금도 골짜기마다 그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운산에서 하산한 날 밤, 나의 6촌 형님 댁에 부탁해 마련한 「애저(兒猪)」파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돼지새끼 1~2개월 된 것을 푹 삶아 양념에 찍어먹는 토속적인 음식인데, 새끼 돼지가 통째로 나온다. 서울 사람들은 처음 보는지라 “여보, 주인장! 저것 좀 내다가 재단해서 가져오시오.” “무서워서 어디 먹겠소!” 한다.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다음날 30리(里)를 걸어 우리 고을 면(面)소재지에 내려오니, 소식을 듣고 면장이 지방 유지들을 불러 모아 푸짐한 저녁상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참가했던 친구들이 지금도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추억을 즐긴다. 지금은 그런 정감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며 서운하게 느낀다.
산을 너무 좋아하다 큰일 날 뻔 했던 적도 있다. 예(例)의 기분 좋은 주말 아침, 구파발에서 4~5명이 집결해서 북한산성을 통과, 내산(內山)으로 들어갔다.
한참 가는데 갑자기 군인들 몇이 집총을 하고 나타나더니 “손들어!” 한다. 이게 뭔가,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5~6명의 군인이 총부리를 겨누더니 “앉아, 앉아” 한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분대장인 듯한 군인이 신분증을 요구한다. “선생님들, 오늘 등산 못합니다. 오던 길로 빨리 되돌아가세요.” 한다. 영문을 물으니, “공직에 계시니까 말씀드리는데, 간첩이 출몰해서 작전 중입니다.” 허겁지겁 내려왔다.
전날 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우리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청와대 뒷산, 자하문 마루턱까지 내려와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세검정으로 가던 버스에 수류탄을 투척해 민간인 5명을 살상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몰랐던 종로경찰서의 최규식(崔圭植) 서장이 짚차로 출동하다가 이들에게 집중사격을 받아 순직하는 사건, 즉 「1.21 청와대 기습사건」이 터진 것이다.
등산 외에 또 하나 좋아했던 운동은 골프였다. 아버님은 학창시절부터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일찌감치 골프를 즐기셨다 한다. 그동안 쭉 놓았다가, 국회에 진출하신 때부터 다시 시작하셔서 연습 한 달여 만에 「보기 플레이」가 가능하셨다. 추운 겨울에는 보온병에 커피를 잔뜩 타서 넣고 열심히 아버지를 뒤쫓아 다니면서 눈동냥을 하며 익혀갔다.
드디어 중고 골프채를 하나 입수한 김에 「무교동 인도어」에서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1968년 여름에 처음으로 한양골프장에 출전해서 「캐디」의 말 못할 괄시와 질책을 받으며 무사히 입시를 치렀다. 주말 골프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3~4개월 후에는 제법 공이 컨트롤되면서 바짝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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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총회 창립총회에서 친숙했던 총리실 근무 동료들과 (1993. 2.) / 우측에서 3번째가 강창희 선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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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나 재미가 나던지, 박(朴) 수석의 짚차 운전수를 꼬여서 새벽같이 「한양」 또는 「뉴코리아」로 달려가 맨 앞 팀으로 나간다. 안개가 끼거나 너무 일러 공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면, 대충 방향을 잡고 전방을 향해 샷부터 먼저 한다. 담배 한대 붙여 물고 앉아 있으면 서서히 먼동이 트고, 약간 밝아오면 앞으로 걸어 나가 자기 공을 찾는 식이다.
부리나케 9홀을 돌고나면 8시가 된다. 전속력으로 달려 중앙청에 도착하면 시간이 9시 전으로 어른들이 출근하기 전이다. 마침 박(朴) 수석은 안국동에 사셨기 때문에 5분이면 가서 모셔오곤 했다. 따라서 들키지도 않고 시치미를 떼고 기분 좋게 하루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 이연택, 김영만 그리고 김형무 씨가 골프를 시작한 줄 알고, 박(朴) 수석은 몇 차례 우리를 한양골프장에 초대해 시범을 보여 주시곤 했다. 그때 배워둔 이 운동은 나이 든 지금도 동반자가 되어 잔디 위 걷기를 계속하고 있다.
총리실(總理室)에서의 마감
과학기술처(科學技術處)로 전출하기 전, 약 5~6개월은 민원분야(民願分野)를 담당해 이연택(李衍澤) 씨 그리고 구관회(具觀會)씨 등 3인이 한 팀이 되어 독방을 얻어 호젓한 근무를 할 수 있었다. 당시 부산항만은 부정부패의 온상이요, 난마처럼 얽힌 항만행정을 하루속히 척결할 필요가 절실했다.
한시적으로 부산항만 조정위원회가 국무총리실 산하에 창설되고, 심이섭(沈怡燮) 장군과 함께 이연택(李衍澤) 씨가 파견되었다. 이연택 씨는 2년간의 어려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 정무실에 합류했다.
민원사항이란 잡다(雜多)하다. 권리(權利)의 복구, 부정고발, 국정건의(國政建議) 등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관계부처에 이첩(移牒)한다. 시정(市政)에 관한 일 외에는 직접 조사하는 일은 거의 없고, 결과보고를 받고 민원인에게 회신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민원 외에 외무, 국방, 통일 등 몇 개의 부처를 맡아 차관회의, 국무회의의 안건을 정리 요약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안건 중에는 가끔 비밀문건도 포함된다.
어느 날 한국일보의 박실(朴實) 기자가 잠깐 우리 사무실에 들렀다. 이(李) 비서관과는 고교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가끔 들르곤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근 국토통일원이 국무회의에 보고할 「여론조사 보고서」 이야기가 나와서, 박(朴) 기자가 좀 보여줄 수 없냐고 요청했다. 3급 비밀로 분류돼 있어 「비밀함」에 보관돼 있고, 기자에게 보여줬다가는 큰일 날 수 있는 사안이라 안 된다고 했다. 그걸로 끝이었고 더 이상 치근거리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다음날 한국일보 조간(朝刊)에 특종으로 이 비밀 건이 나와 버렸고, 박(朴) 기자는 냉큼 남산(南山)에 잡혀가 혹독한 조사를 받은 모양이다. 보고(報告) 안건에는 국내 좌파들의 ‘통일에 대한 「앙케이트」’가 실려 있었는데 당국은 이것을 공개하기를 꺼려했던 사항이었다.
박(朴) 기자는 엉겁결에 출처에 관해 총리실에다 슬쩍 연결을 시켰던 모양으로, 중정(中情)에 근무하는 친구가 총리실에 달려왔다. 완벽하게 서류가 보관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가, 또 강한 조사(調査)의 압박을 가하자 드디어 출처의 진실을 토로했다.
통일부 소관 등사실의 실수로 유출이 된 것이다. 인간적인 친분으로 서류를 보여줬더라면 우리 세 사람의 공직생활은 그때 요절이 났을 터였다.
이연택 씨는 일에 빈틈이 없고 성실, 근면한 동료였다. 그는 후에 아시안게임, 88올림픽 그리고 2002 월드컵을 성공리에 치러 국가에 큰 공헌을 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마침내 민원의 모든 업무를 이(李) 비서관에게 인계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과학기술처로 자리를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