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시대의 에필로그 (10회)
  제1장 인공치하의 3개월

네 살짜리 동생 진문(秦汶)이는 가족이 다시 합해진 것이 그렇게도 좋은가 보다. ‘씨익-씨익, 쿵쾅’, ‘씨-익-씨익, 쿵쾅’ 하는 소리를 내면서 이방 저방을 돌아다니며 뛰어 노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물어보니, UN군이 서울 탈환 때 인천에서 쏘아대는 함포 사격의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라고 했다. 지금의 을지로3, 4가, 오장동 중부시장 근처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필동 일대는 남산이 방패 역할을 해서 무사했다. UN군의 서울 진격 3일 동안 온 식구가 지하에 숨어 지내며, 밤중에 나와 밀떡을 쪄서 먹으며 겨우 연명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포탄이 떨어지는 와중에서도, 남산 벙커에서 철수하던 인민군 병사가 우리 응접실에서 빌려간 안락의자 등 집기를 다 반납하고 철수하더라는 것이다. 인민군 병사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고 민간에 가급적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언제나 위협적이고 무서운 것은 당원, 「빨치산」 등이었다.
 
제헌의원(制憲議員) 이었던 옥주(沃周) 숙부님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오신 후 전쟁 초기에는 거의 볼 수 없었으며, 삼천동 국회의원 관사에서 구속(拘束) 동지(同志) 회원(會員)과 샐활하다가, 9월 중순부터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필동 우리 집에 오셔서 가끔 주무시곤 했다 한다. 국군·UN군의 입성 약 3일 전에 어머님께 작별인사를 위해 들렸다.

“천상, 북쪽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형수님!” 하자 어머님이 여기 어디 좀 숨었다가 자수하면 형님들이 돌아와서 해결해 주실 건데 하면서 가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박사가 우리를 다시 잡으면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무사할 수가 없겠지요” 하시면서 떠나기로 결심하신 모양이었다고 한다.
 
벌써 날씨가 아침저녁으로 쌀쌀했다. 어머님은 아버님의 내의 한 벌과 담요를 하나 보자기에 싸서 드렸다.
 
‘눈물을 짓고 떠나는 아주버님의 뒷모습이 한량없이 외롭고 처참해 보였다’고 그때의 광경을 말씀해 주셨다.
 
숙부님은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처음 연행됐을 때 필동에 있는 헌병사령부에 와서 군, 경, 검의 합동 조사대에 의해 심문을 받았다. 처음에는 협박 좀 하다가 회기가 시작되면 풀어주겠지 했단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기초하고, 토지개혁 문제도 정부 뜻에 따라 열심히 도왔던 터였으니, 차마 민선의 국회의원을 국회 내에서 진보적인 바른말 좀 했다고 해서 징역이야 보내겠느냐 했단다.
 
▲ 와세다대학 시절의 옥주 숙부님과 장손인 진석 형
 
그러나 이튿날부터 모진 물고문과 심지어 전기고문까지 강행하는 것을 보고 ‘아! 이것이 끝이구나.’ 라고 생각하셨단다. “아마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앞으로 아이도 못 가질 겁니다.” 라고 한탄하시더란다.
 
서울 수복 후의 일이다. UN군 연락장교단에 근무할 때인데, 집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님이 숙부님 사건 때문에 기관에 연행이 됐다는 것이다. 종로2가 국일관(國一館)에 계셨다. 군복을 입고 들어가니 영문을 무사통과 했다. 접수에 나의 신분과 어머님에 관해 이야기하니 조금 후에 어머님이 접견실에 나오셨다. 옥주 숙부 때문에 조사를 받고 계시다고 했다.
 
군복 입은 문관 한 분이 나와서 별 문제 없고 곧 집으로 가시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다. 접견실 방을 열심히 비질하던 중년 신사 한 분, 초췌한 모습 그대로다. 얼굴이 많이 익었다. 어머님께서 충남 출신 서용길 제헌의원이라 하신다. 옥주(沃周) 숙부님과 함께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었고, 6 .25 때 출옥했다가 월북을 거부하고 숨어 있다 수복 후에 방첩대(防諜隊)에 자수한 것이다. 살기 위해 저렇게 궂은일 까지 하면서 자세를 낮춰야 하는지 매우 측은하게 느껴졌다.
 
서 의원은 그 후 사면 받고 정계에 다시 투신했으나 재당선은 되지 못했다. 서 의원의 예를 보더라도 국회 프락치 사건은 정적을 무력화시키는 한 수단이었지, 북한의 지령에 의한 국가 변란을 도모했다고 보기에는 여러 정황 증거가 부족한 사건이었다.
 
특히 연루된 몇몇 분의 사회 성분이나 종교로 보아 그렇게 생각된다.
 
「에필로그」 편에서 나를 무척 귀여워 해 주시던 다섯째 삼촌 계주(桂周) 숙부님을 뺄 수가 없다. 미군정 시절 경찰전문학교 총무과장으로 계급은 감찰감(監察監 : 지금의 총경에 해당) 이었다. 대쪽 같은 성격에 유머도 대단했다. 약간 국수주의적인 면도 있어 군정에서 배급 나오는 미제 담배는 일체 입에 대지 않고, 가장 싸구려 담배 백두산만 피우다 보니 학교 내에서 별명이 「백두산」 이었다.
 
호신용 권총도, 철제 개머리판을 제끼면 소총이 되는, 독일제 「모젤」 을 휴대하고 다니셨다. 미군정이 끝나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 계열과의 마찰로 경찰을 그만두시고 집에서 소일하고 계셨다. 조병옥(趙炳玉) 선생과 대단히 친숙했던 모양이다.
 
당시 군정 때 경찰 계보의 양대 산맥이 있었는데, 하나는 조병옥(趙炳玉) 박사(경찰부장)이었고, 또 하나는 장택상(수도경찰국장) 씨 중심의 유학파였다. 조박사도 유학하신 분이지만 일찍 귀국해서 민족진영, 즉 한민당(韓民黨) 핵심으로서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과 가까웠다.
 
우리 집안은 보성전문(普成專門 : 후일의 高麗大學校)의 재건 때인 1932년부터 백부님과 인촌 선생님의 친교가 돈독했기 때문에 형제분 모두가 민족진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 독특한 성격의 계주 숙부님은 집에서 소일하고 계시다 6 .25를 만난 것이다. 그 당시 숙부께서는 우리 아버님과 몇 차례 통화를 했으나 사태를 매우 낙관했던 모양이다. 형님인 우리 아버님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잔류하기로 작정하시고 피난 대열에 끼지 아니했다.

필동에서 가까운 오장동에 사셨는데, 시골 고향에서 올라와, 대학 등 학교에 다니는 유학생들이 자주 숙부 댁에 찾아왔다. 밥도 얻어먹고, 담소도 하고, 바둑을 좋아해 매일 대국을 하는 사랑방을 제공했다. 그런데 6 .25가 터지고 8월말 쯤 자주 놀러오던 고향후배 김영배에 의해 연행되고 중부서(中部署)에 일시 구치되었다 한다.
 
김영배는 광주사범을 나와 일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해방후 서울法專(서울法大의 전신)에 진학하고 좌익쪽에서 열렬 활동했다. 우리와는 사돈관계도 되고 해서 친숙하게 지냈고, 계주숙부댁(桂周叔父宅)에 자주방문 밥도 얻어먹고, 숙부(叔父)와 사상토론도 가끔 듣는 처지였다. 신세도 지고 친교가 있던 사람들도 사상 앞에서는 인정사정이 없어지는 모양이었다.
 
김영배는 6.25사변 전 남노당 일망타진 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형을 살다가 6.25 때 석방되어 활동했다. 인민군(人民軍)후퇴 때 월북했는데, 월북 중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었다고 한다. 
 
계주숙부(桂周叔父)는 9.28 후퇴 때 북으로 끌려갔는데, 그 후 소식을 모른다. 연행 도중에 어디에서 사망했는지, 행방불명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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