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KOPEC는 그 후 두 번의 먹구름과 태풍을 겪어야 했던 시련기가 있었다. 그러나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세」 처럼 이 시련기를 잘 넘겼다.
첫째는 1988년 경 민간 기업들인 대림(大林), 현대엔지니어링 등이 기술용역협회와 연합해 A/E의 민영화를 강력히 추진했으나 이를 막아냈고, 그 10년 후인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전력산업 구조개편 문제가 대두되면서 A/E, 특히 KOPEC의 민영화가 2차로 도마에 오르게 되었다.
요로(要路)에 KOPEC의 성장과정, 정체성 등을 조직적으로 호소하고 설득함으로서 급기야 「새로운 연구와 기술개발 그리고 자주성의 확보 등의 불가결한 요소가 내재해 있는 만큼 KOPEC의 민영화는 차세대 원전개발이 완료되기까지 보류하는 것」으로 정부 방침이 재확인됨으로써 이제 좀 잠잠해지는 것 같다.
핵에너지는 일반 에너지와 달리 국가의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분야로서 고도의 안전성과 대형투자가 수반되어야 하는 특성 때문에 통일될 때까지 집중 육성하는 것이 현명한 방향으로 본다. 원전관계는 지금까지 공공성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대통령이 앞장서서 Sale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성공리에 중동(中東) 등에서 수주를 할 수 있었다고 본다.
원전 국산화 성공시점에서 또 하나 쾌재로 생각되는 것은 KNE 초창기 Bechtel에서 구두선(口頭禪)처럼 뇌까리던 「과학자(Scientist)가 어떻게 A/E를 수행한단 말인가?」 하는 조롱을 우리는 보기 좋게 역류해 갔다. 그리고 성공했다. 초창기 A/E의 중흥 그리고 발전원자로(發電原子爐) 설계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정근모(鄭根模) 박사, 신재인 박사 그리고 한기인(韓基仁) 박사 등은 모두 Scienists로서 국산화를 달성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과학과 기술의 보기 좋은 융합을 이룩했을 뿐 아니라 산업화 그리고 상용화도 달성했다.
인도는 우리보다 원자력과학은 앞섰으나 기술과 융합없이 과학에 머무르다 보니 원자력발전의 산업화는 초기단계에 있다. 당시 기술과 과학의 융합은 1980년대 신군부 정권의 핵심정책의 하나였으며 순수과학과 산업기술의 Gap을 조기에 메우려고 하는 노력이 돋보이는 시기였다.
나는 박(朴) 대통령 서거 후 소위 「서울의 봄」이 다가왔을 때 정계에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당시의 전후 사정은 다음 장(章)에서 기술하고자 한다). 1979년 나는 48세의 좋은 나이였다. 과기처 장관, 한국전력 사장, 연구소 소장 그리고 신(辛) 수석 등 요로에 나의 뜻을 전하고 사의(辭意)를 표했다. 그러나 곧이어 닥친 12.12 사태, 그리고 광주 5 .18까지의 과정에서 정계로의 진출은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주변에서는 이제 정치계 진출이 어려우니 다시 같이 일하자는 권유도 있었지만 명색이 공기업의 간부가 정치하겠다고 의사표시를 분명히 했는데 사정변경으로 다시 주저 앉는다는 것이 못내 내키지 않았다. 특히 위수령(衛戍令)이다, 계엄령이다, 살벌한 시기에 모든 것을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퇴진을 굳혔다. 이제 당분간 은둔생활이다.
마침 나의 내자(內子)의 사업과 관련해 경기도 용인군 양지면에 농원을 하나 개발하는 생산적인 일거리가 있어 거기에 매달리기로 했다. 한참 군(郡)에 다니며 농장 개설 허가니, 장비의 투입, 식목 등 바쁜 일정을 보내며 소일하고 있었다.
농장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가던 1982년 말경, 일본의 안영식 사장이 코네티컷 주립대(Central Connecticut State University) 교수인 고광림(高光林) 박사를 소개하면서 하계 기업인 세미나(Summer Business Seminar)에 관해 이야기를 전해 왔다.
지금까지 일본교포를 중심으로 기업인으로 인원을 구성해 여름방학 동안 대학에 가서 기업관련 세미나에 참석하고, 코네티컷 주(州)와 보스턴 근처의 기업체, 교육기관(Harvard, Yale 등) 명문학교를 방문해 강의를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세미나가 끝나면 C.C.S.U.가 소재한 New Britain 시(市)에서 명예 시민권을 수여하는 절차까지 포함되어 있어 퍽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해부터 한국에서 기업인 3,40명을 조직하여 매년 C.C.S.U. Summer Seminar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때 현대그룹에서 많이 참가해 주었고, 중소기업인 부부동반으로 동행해준 분도 많이 있었다. 이런 나의 노력으로 그 주립대학의 경영학 객원교수로 임명을 받았고 그 후부터 수년간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또한 New Britain 시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청도대(靑島大), 러시아 St. Petersburg 대학(당시는 Soviet 시절) 그리고 폴랜드의 바르샤바 대(大)를 순회하면서 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고광림 박사의 건강 문제로 뒤를 이어 C.C.S.U. 경제학과의 김기훈(金祺勳) 박사가 열심히 이끌어 주었다.
이런 관계가 대학과 유지되는 가운데 1985년경, 나에게 연락이 왔다. 같은 주(州)의 Windsor시(市)에 위치한 원자력발전시설 제조회사인 Combustion Engineering(C-E) 사(社)가 한국에 진출하는데 자문역으로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C-E는 Westinghouse 다음으로 큰 PWR 공급회사로서 역사가 길고, 주식시장에 상장(上場)된 회사로 알고 있었다. Westinghouse나 General Electric(GE) 등은 국제적 거대회사들로서 우리가 상대하기 좀 버거운 면도 있었다.
또 하나의 발전회사로 Babcox Wilcox가 있었으나 실적도 낮고 너무 작은 회사로 기술전수도 좀 불안한 반면, C-E는 실적과 규모 면에서 한국이 상대하기 딱 알맞은 상대로 생각되어 나는 쾌재를 불렀다. 지금까지는 원전(原電)설계 A-E 중심의 사업이었지만 이제는 원자로(증기발생 장치, NSSS System)를 국산화하는 원자력 전(全) 과정을 망라하게 된다는 면에서 나는 내심 기쁘기도 했다.
얼마 후 C-E 본부에서 파견된 해외기술총책인 Herbert Cahn 박사, 그리고 한국지사 사장이 될 Peter Mihan이 내한(來韓)해서 나와 만났다. C-E가 한국에 처음 진출하는데 원자력계와의 협력을 위해 자문역(Private Cosultant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고, 한국대리점은 물색 중이라고 했다.
나는 수락을 했고, 다만 「근무지는 C-E 사무실이 아닌 나의 광화문 개인사무실을 이용하고 자유스럽게 Freelancer로 일해야 겠다」는 조건을 세웠다. 그리고 권유사항으로는 「C-E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가급적 개방된 국산화 계획을 제시해야 유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가격조건도 중요하겠지만 국산화와 관련된 기술전수(Technology Transfer)가 체계적이고 실무적(Viable)이어야만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 Tech. Transfer 계획은 그 유능한 유태인 기술자 Cahn 박사 손에서 원본이 작성되었다.
나의 이력서를 정식으로 제출해 달라는 요청으로 모든 것이 합의, 양해되었다. 2,3일 후 연락이 왔는데 본사의 CEO인 Charles Hugel 회장이 나의 이력서를 보더니 내가 자기 후배라면서 대단히 반겼다고 한다. Mihan의 말에 의하면 “Grab him!(그 사람 꼭 붙들어!)”라고 회장이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말인즉 내가 60년대 유학시절 처음 다녔던 펜실베니아의 Lafayette College의 동창회와 후원회장을 맡고 있던 찰스 휴겔 회장은 자기 후배가 한국에서 자기 회사 고문역을 맡는다는 사실에 매우 마음 든든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얼마 후 부인과 동반해 한국에 온 Hugel 회장과 성북동 대원각에서 회식을 했을 때, 학교 응원가를 같이 합창을 해서 좌중의 박수를 받은 일이 있다. 이렇게 나는 인생의 고비마다 은혜가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