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韓日) 친선의 모임 양지회(陽智會)_1 (130회)
  제17장 은혜와 봉사

나는 지난 40여 년 동안 양지회(陽智會)를 통해 일본의 좋은 친구들과 교우하면서 형제애에 버금가는 정을 느끼며 살아 왔다. 단순한 국제 친선을 뛰어넘어 가족 간의 친교는 물론이고, 사사로운 문제를 가지고도 스스럼없이 상의하는 친교인 것이다. 여기에는 안영식(安泳植 :일본이름 安田 浩 : 히로시)이라는 친화력이 뛰어난 특별한 인물이 매개가 되었다.

안(安) 사장은 6.25 동란이 터지면서 전주(全州)중학 5학년(안 사장의 백부님이 전주시장으로 계실 때에 전주중에 입학했다) 어린 나이에 피난 대열에 밀리고 밀려 마산까지 오게 된다. 「마산 진동고개」의 처참한 광경도 목격했다. 철수하느냐, 사수하느냐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헌병대에 근무하던 고향 출신 친지의 도움으로 「현해탄」을 건너게 된다. 

20톤 남짓한 똑딱선은 「현해탄」의 무서운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침몰 직전에 지나는 미군(美軍) LST에 구사일생으로 구조된다. 먼 친척의 주소 하나 달랑 들고 구걸구걸하여 동경에 도착했다. 

향학열에 불타던 안 사장은 어떻게 하든지 대학에 진학하려고, 낮에는 고달픈 노동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벌어 ‘빵’을 해결하며 「주경야독」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패망하고 불과 5년도 되지 않은 시점, 미(美) 군정 하에 있던 일본도 경제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전쟁이 없으니 먹기만 하면 다음날이 기약이 되는 평화가 있었다.

안 사장과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의 친구라고 한다. 안 군의 어머니 정(鄭)여사는 나의 큰 외숙모님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다시 말해 우리 어머님 큰 올케의 동생이다. 우리는 1932년 잔나비 띠, 동갑내기로 태어났다. 잉태하고 있을 때, 어머님들은 서로의 배를 만지며 “니 새끼 잘 있나, 많이 컸제!”하며 지내셨단다. 

같은 해 출생한 「삼총사」가 있었다. 큰 외숙모의 셋째 아들 황기운(黃起雲) 형이 1번, 안 사장이 2번, 내가 한 살 위인 것으로 알고 형 행세를 해왔다. 그런데 안 사장이 오히려 나보다 4개월이 앞선 것을 확인했다. 여하튼 우리 셋은 명절 때만 되면 나의 외가에 모여 잘도 싸우고 그러면서도 형제의 우애를 계속하며 자라왔다. 항상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안부가 궁금했던 사이였다. 

일본에 상륙 후 1년여 동안 악전고투 끝에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갈 무렵 어려움이 닥쳐왔다. 동경 간다구(神田區)에 있는 일본대(日本大) 상과(商科)에 등록까지 마친 상태인데 병마가 찾아온 것이다. 고된 노동에 먹는 것은 시원치 않고, 성장기에 6척이 넘는 거구를 지탱해 주지 못했다. 지독한 폐결핵에 걸려 입원하게 된다. 

극빈자 병원비 처리과정에서 무등록 외국인이라는 것이 탄로 나고, 급기야 구주(九州)의 그 유명한 오무라(大村)수용소로 강제 이송된다. 전염병 병동에 격리 수용된 그는 강제송환의 날만을 기다리던 중인데, 그때 한 여성 은인을 만났다. 착한 마음씨의 담당 간호사가 안 사장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 듣고 적극적으로 움직여 마침내 학생신분을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방면하게 되었다. 

이제는 합법적으로 체류허가를 얻었기 때문에 생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안 사장에게 「조크」를 즐겨 했다, ‘자네는 여복이 많은 사람이야’ 라고.

▲ 安泳植 사장의 어머님(우측으로부처 셋째)과 우리 어머님(우측 둘째)은 다정한 친구사이였다. (1930년 명절 때 하동읍에 쫓아가 기념촬영)

신분이 정돈된 그는 가나가와 현(神奈川 縣)에 있는 일본 굴지의 분체기기(粉体器機) 제조회사인 (주)덕수제작소(德壽製作所) 관리직원으로 취직을 했다. 그리고 인근의 고라이산(高麗山) 근처에 있는 소도시에서 중학교 영어교사로 있던 엔도(江藤)여사와 연애를 해서 결혼에 골인한다. 
 
마련 없는 외국인 학생을 남편으로 맞이한 엔도 여사는 좋은 가정 출신으로 안 사장과는 쉽게 짝이 될 수 없는 처지였다. 철도국 고위직에 있던 부친도 많은 반대를 했다. 그런데 엔도 여사는 일본 여성 치고는 키가 크고 등치가 있어 안 사장의 당당한 신수에 잘 어울리는 자태였다. 아마도 그 체구에 반하지 않았나 혼자 생각해 본 일이 있다.

두 사람을 평생 금슬이 좋았고 성공 후에는 보란 듯이 처가에 많은 신경을 써서 다른 어느 사위보다 흡족하게 생각했다. 장인 내외분은 은퇴 후 일본 전국의 유명 사찰 400곳을 선정하여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참배를 강행한 독실한 불가(佛家)의 수신(修身)으로 일생을 보냈다.

결혼 후 동경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무역을 시작했다. 주로 미국, 캐나다 지역에서 「비타민」 종류의 약품을 수입하여 일본 전역에 공급했고, 한국과 교역이 트이면서 인삼 그리고 일본인의 기호에 맞는 해산물들을 본격적으로 수입했다.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과 부인의 특별한 장사 수완이 결합되어 단시간 내에 기반을 잡게 되었다.

드디어 한일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안 사장의 고국 출입은 더욱 잦아졌다. 올 때마다 나와 연락해서 만나고 교우를 계속해 나갔다. 본격적으로 청구권자금이 추진되고 「플랜트」 형식으로 도입되면서, 많은 일본 중소기업들이 안 사장의 도움을 얻어 한국에 진출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안 사장이 한때 몸담았던 덕수분체(德壽粉體)인데, 전분(殿粉) 공장을 청구권자금의 농어촌 개발사업으로, 남해와 제주도에 각각 새로 시범 건립하는 프로젝트에 덕수분체가 참여했다.

당시 남해안 섬과 제주도에는 감자, 고구마의 주 생산지로서 감자, 고구마는 계절작물이어서 일시에 출하되면 감당할 수 없어 썩히고 버리는 일들이 벌어졌다. 따라서 정부는 전분공장을 지어 농산물의 수급조절을 꾀하는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 전분공장에는 분체기기 뿐만 아니라 원심분리기가 필수적이었다. 여기에 사이도(齊藤)원심분리기(주)도 Consortium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덕수제작소의 메이오 사장(命尾晃利)과 사이도 원심분리기 사장(齊藤 眞)은 프로젝트를 위해 자주 한국에 출장을 나오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안 사장의 소개로 나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 두 일본 사장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가로서 각각 1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기술과 자본이 탄탄하고 매우 보수적인 회사였다. 두 분 모두 좋은 가정에 교양이 풍부한 분들이다.

특히 사이도 사장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사장이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그 큰 회사를 이어받아 이끌어가야만 했다. 아버님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회사를 끌고 나가야 했던 그는 지난 20년간 얼굴에 완전히 미소를 상실하고, 근엄하게만 살아온 외골수 인생이었다. 

이제 한국에 나와서 이것저것 접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사이도 사장의 숙부 되는 분이 일제 때 전주(全州)에 거주하면서 많은 수탈을 목격하고, 조카에게 이야기한 것들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어 언제나 그러한 일을 자신의 부채(負債)로 느끼고 있던 분이다. 
 
제주도 같은 경우인데 공장이 완성되었으나 운전자금이 없다고 하자 일본에서 돈을 가져와 무이자로 돈을 대주는 경우도 나는 목격했다. 염치없는 우리 기업인들의 처신으로 낯 뜨거운 일을 당해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이도 사장은 이러한 것을 모두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항상 자신의 업보로 생각하곤 했다. 

친한(親韓) 인사(人士)가 된 당신은 한국방문 계획이 세워지면 일본 친구들을 동참시켜 한국을 알리고 좋은 친구가 여기에도 많다는 것을 알리려고 노력을 했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뛰던 사이도 사장은 어느덧 자신의 인생에 변화가 온 것을 스스로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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