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비극의 서막 (1회)
  제1장 인공치하의 3개월

귀청을 찢는 듯한 천둥소리에 잠이 깼다. 포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대포소리 사이사이에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식구 모두 혼비백산 벌벌 떨면서 어머니가 쓰시는 큰방으로 모였다. 순간 지하에 숨는 것이 이때는 제일 안전하겠다고 생각해, 재빨리 부엌으로 쫓아가 마루 바닥을 쳐들고 온 가족을 불러들였다. 위에서 떨어지는 만삭의 우리 어머니(그해 8월이 출산 예정)를 껴안고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동생들에게 “엎드려, 엎드려”를 외치면서 대포소리를 이겨보려는 나의 애타는 몸부림이 이어졌다.
 
민족의 참극(慘劇), 나의 6 .25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3시경으로 기억한다. 소위 북한 인민군 전초부대(前哨部隊)가 T34 전차(戰車)를 앞세우고 미아리, 무악재를 넘어 서울시내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우리 가족은 중구 필동 3가에 있는 체신부 관사에 살고 있었으며, 인민군의 포격은 아마도 지금의 충무로 역 위쪽에 있는 「한국의 집(Korea House : 현재 전통혼례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는 종합전통문화 체험 공간)」 근처에 있었던, 헌병 사령부가 있는 군(軍) 시설물을 목표로 종로 3가쯤에서 남산을 향해 전차포(戰車砲)를 쏘아댔던 것이다.
 
약 두어 시간쯤 후에, 포 소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간혹 소총, 기관포 소리만이 들리면서 조금 조용해 졌다. 먼동이 트면서 가족을 모두 지하에서 밖으로 나오게 하고, 부엌 귀퉁이에서 쪼그리고 앉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님이 돈암동 큰댁(미아리 종점 근처)의 안부가 궁금하셨던지 전화를 걸어보라 하신다. 완전히 불통이다. 갑자기 외딴 섬에 버려진 것처럼 고립감이 엄습한다.
 
새벽 6시쯤 호기심이 발동,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봤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저만치 큰길 쪽에서 간간이 지축을 흔드는 굉음, 그리고 자동차 소리가 들려온다. 골목길을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낮은 자세로 나아가, 어느덧 큰길(현재 충무로역)에 도달했다. 그러자 굉음을 낸 거무튀튀하고 거대한 무쇠덩어리 탱크가 눈에 보였던 것이다.
 
앞쪽 낮은 곳에서 조종하는 병사가 반쯤 머리를 내밀고 있고, 포탑에는 이상한 가죽투구 비슷한 것을 쓴 병사가 타고 빠른 속도로 커브를 돌며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어서 산발적으로 인민군의 짚차, 그리고 빨간 완장에 레닌 모자를 쓴(우리는 후에 그런 사람을 빨치산이라 불렀음) 사람들이 삼삼오오 트럭에 올라타고 적기가(赤旗歌)를 소리높이 외치며 지나가는 모습이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인공시대(人共時代)가 시작된 것이다.
 
▲ 19650년 6월 28일, 개전 3일만에 T34 전차를 앞세우고 미아리를 돌파헤 서울로 입성하는 인민군
 
집에 돌아왔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식구는 어머니, 나, 그리고 4남 4녀 중 장녀 영자, 차녀 경자, 삼녀 미자, 유치원생 삼남 진문 그리고 숙자(가사도우미 아가씨)등 일곱 대식구가 서울 집에 남아 있었고, 형님은 막 대학을 졸업하고 시골 우리 큰댁과 외갓집에서 공동 출자해서 건립한 진상농업학교(고교)의 영어교사로 내려갔고, 아버님은 체신부의 저금, 보험국장으로 계시다 극적으로 마지막 순간 서울역으로 나가셔서 정부 후퇴의 최종열차에 올라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후일담이지만, 기차에 타신 아버님은 많은 국회의원, 정부 관료, 종교사회단체 인사들을 만났고, 서로들 “어떻게 된 거요?”, “왜 이렇게 된 거요?” 라는 질문만 무성할 뿐, 한 사람도 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후에 그 한심한 순간을 우리에게 들려주신 적이 있다.
 
이 최종열차에 그나마 오르실 수 있었던 것은 한 은인의 덕이었다. 당시 중앙부처의 국장과 과장급은 공동으로 짚차를 이용하고, 장 .차관은 전용차가 배당되었다. 아버님을 모시는 운전수 김 씨는 고향의 후배인데, 오후 우리 집에 들러서 서울역으로 모시도록 하겠다고 하자, “이 어린아이들을 두고 내가 어찌 집을 비우겠는가!” 하시며 거절하시는 것이다. 한참 기다리다 아버님이 가실 의향이 없으신 것을 확인한 김 씨는 차를 몰고 돌아섰다.
 
그 후 약 한 시간쯤 뒤에 김 씨가 다시 나타나 무슨 국장, 무슨 과장 할 것 없이 모두 역으로 데려다 줬다면서 아버님도 가실 것을 간곡히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옆에 있던 어머니도 위급한걸 아시고 우선 몸을 피하시도록 말씀드리고 해서 드디어 후퇴를 결심하셨다. 그때 또한 북한 전투기 YAK 기(機)가 남산 상공을 날아다니며 기총소사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졸지에 가장 대행 역할을 해야 했으며, 남은 가족의 생계와 안전을 책임지는 신세가 되었다(여담이지만 20여년 후 운전수 김 씨의 딸을 나의 비서로 취직시켜 데리고 있었다).
 
아침을 간단히 치우고, 어머님 재촉에 돈암동 큰댁에 가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전날 미아리고개 인근에서 쌍방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는 소문 때문에 돈암동 일대도 수라장이 됐으리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아침 공기는 매캐한 기름타는 냄새로 매우 탁했다.
 
을지로4가 전차 종점에 이르렀을 때, 공중에 가설된 전선이 길에 떨어져 구겨져 있는가 하면, 일부는 공중에 매달린 채 너덜거리고 있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인민군의 일방적 시가전이지만 그 양상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조금 아래 4가 네거리 국도극장 쪽으로 인민군 T34 전차 한 대가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고 오고 통행이 많아졌으며, 인민군의 장비들은 계속 속력을 내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종로4가에서 원서동 파출소, 창경원 앞길은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원서동 파출소는 불길에 타고 있었고, 바로 앞 교차로 쪽에는 불에 탄 인민군 대형 트럭 한 대(찌스차라 불렀음)가 놓여 있는데 뒤쪽 적재함에 타다 남은, 군복 입은 인민군 시체가 즐비했다. 아마도 탄약과 군인을 실은 차가 입성 중에 파괴된 모양이다.
 
이제 사변 중 가장 기막힌 광경이 곧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창경원 건너편 서울 이과대학 수림공터(지금의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는 철책으로 막혀 있지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 산더미 같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민간복, 국군복 등 가지가지의 복장을 한 시체들이 포개져 쌓여있는 것이 아닌가.
 
그중 가장 나의 시선을 끈 시체는 희끗희끗한 어느 할머니의 시신인데, 무명베 치마를 허리에 걷어 올려 질끈 동여매고 군인들처럼 나뭇가지를 꺾어 등 뒤 곳곳에 꽂아 군대식 위장을 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서울 북방 어느 시골에 살다가 국군과 함께 후퇴하면서 부상을 당해 서울대학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다가, 사망하니까 내다 버린 모양이다. 병원의 환자들을 남김없이 비우고 자기 부상자부터 치료하는 것은 점령군의 특권이리라. 특히 이데올로기 또는 종교전쟁일 때 더욱 그렇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나찌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 강토 도처에서도 일어났다. 죄 없고 무고한 할머니가 그저 살아보겠다고 그 알량한 위장까지 하면서도 최후를 맞이한 이 비극은 누구의 책임인가.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연재를 시작하며
  서울시내에 즐비한 시체를 목도하며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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