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재 씨와의 만남 (26회)
  제3장 전선에서의 미군통역 근무

늦가을이었다. 아침으로는 대암산 정상 쪽으로 흰 서리가 보인다. 쌀쌀한 해거름 판, 전방 어느 부대에서 근무하다 후방으로 가는 도중에 하룻밤을 신세지겠다는 분이 한국인 종업원 막사에 와 있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가봤다. 전방에서 철수하는 사람치고 깨끗하고 용모도 단정했다. 인텔리의 풍모를 느꼈다.

자기는 원래 평양 출신으로 먹고 살만한 집안이었는데, 박해가 심해서 6ㆍ25 전에 월남했다고 한다. 미술에 취미가 있어 서울대 미대에 적(籍)을 두고 있다가, 고학도 힘들고 할 때 마침 친지의 소개로 안동 어느 중학교의 미술선생으로 취직을 했다고 한다.

사변이 터지자 미군부대의 「페인터(화가)」로 자리를 얻어 전진, 전진해서 오다 보니 「펀치볼」까지 오게 됐다고 한다. 영어도 서툴고 미군부대 생활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아 귀가하는 중이라고 한다.

대화가 재미있고, 독서도 많이 해서인지 유식한 분이었다. 내 막사로 오게 해서 야전침대 하나를 더 펴도록 하고 밤새 이야기했다. 성격이 매우 고진이고, 대화도 조곤조곤하게 이끌어가는 분이었다. 살벌한 전방에서 이런 분하고 같이 근무하면 배울 것도 많고 퍽 위안이 될 것 같다. 후방으로 간다면 어디 정해 놓은 데가 있는지를 물었다. 특별히 생각한 곳은 없으나, 학교가 된다면 다시 교직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특별히 정한 데가 없으면, 곧 추운 겨울도 닥쳐오는데 같이 있으면 어떻겠느냐 물었더니, 그렇게 해도 되겠느냐고 했다.

다음 날 스티븐스 교수에게 상의했더니 「페인터」로서 쓸 만한지 한 번 테스트를 해 보란다. 곧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는 시기인지라, 카드 하나 디자인하라고 두툼한 판지 종이하고 검은 잉크, 펜을 주었다. 약 한 시간 만에 Black and white로 눈이 온 시골마을에 뾰족한 교회가 있는 풍경 그림을 「카드」식으로 만들어 내 놨다. 수작이었다.

모두 다 만족하고, 복사기에 돌려 약 500장을 만들었다. 물론 116이라는 logo도 들어가고, 각 부서에 돌렸더니 대단히 반응이 좋았다. 내 옆에 책상 하나를 놓고 근무하게 했다. 각종 도로 표시, 부대가 필요로 하는 간판 등을 그리면서 그런대로 생산적인 시간을 보냈다.
 
▲ 송 화백과 함께 (오른쪽) / 왼쪽은 KSC 중대장 황 소령(제대 후 ca 법관이 됨)

그런데 너무 과묵한데다 별반 미소도 없는 수도승 같은 분인지라, 같이 근무하던 미군들이 좀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루는 선임하사 「커쳐」John Cutcher 상사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Mr. 송은 이북 평양 출신이라고 하는데, 혹시 간첩이 아닌지?” 진담 반 농담 반인데, 나에게 매우 충격이었다. 많은 대화를 통해 공산주의, 특히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것을 확인한 바 있고 해서 나는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있었다.

여기서 나는 문화적인 차이를 느꼈다. 동양에서는 남자는 말이 없고 과묵해야 대접을 받는다. 「Silence is gold」라는 말은 있으나, 필요한 때 ‘적절한 참여’와 ‘적극적인 표현’은 친교의 기본이다. 따라서 너무 침묵하거나 시선을 피하면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다. 송 씨는 성격상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또한 영어가 부족하니까 실수할까봐 대화에 너무 조심했던 것이다.

이럭저럭 정도 붙이고, 일에도 익숙해 질 무렵 어느 날, 갑자기 후방에 가기를 고집했다. 할 수 없이 보급관에게 가서 새 옷을 얻어주고, 한국 종업원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전별금도 마련해 주며 섭섭한 작별을 했다. 떠난 지 약 보름 후쯤 기별이 있었다. 원주에 내려왔다가 친구의 권유로 신림 근처에 있는 전쟁고아원에서 선생으로 있노라는 전갈이 왔다. 원주에 출장갈 일이 있어, 술 몇 병을 사들고 고아원에 찾아갔다.

이것이 웬일인가. 부임한지 약 20여 일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어느 추운 날 아침, 고아들이 개울에서 물을 길어 오는데, 보기에 안타까우니까 당신이 직접 물통을 메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실족해서 떨어져, 다음날 아침 운명했다는 비보였다. 참말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인자하고 착한 마음의 소지자의 종말이 이런 것인가 한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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