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포들과 유학생회(留學生會) (62회)
  제7장 미국유학1

재미교포 정 박사와의 불가피했던 정치사상적 갈등
 
Easton 신문에 나의 도착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왔다. 이웃 뉴저지 주의 「필립스버그」시 종합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시는 Dr. Chung이 주말에 시간이 있으면 자기 집에 오라고 했다. 병원에 찾아 갔더니 반가이 맞아 주었다. Dr. Chung 차에 올랐더니 「김치냄새」가 확 나는 것이 아닌가, 약 두 달 정도 김치맛을 못 본 나에게는 반가우면서도, 역시 냄새만은 좀 역겨웠다.

김치의 냄새는 매우 독해서 사람 몸에서도 나는 모양이다. 요새는 김치가 국제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를 않아 매우 조심스러웠다. 김치를 먹고 나면 칫솔질을 하고 껌을 씹어도 그 독한 마늘냄새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정 박사(鄭 博士)는 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평양 근처에서 근무하다 8.15 후 인민군에 입대 야전병원 원장으로 참전했다가 귀순한 분인데, 용케도 가족을 데리고 미국에 일찍 이민을 오셨다. 아이들은 모두 장성해서 대학에 진학했고 큰아들은 유도 특기가 있어 그 「타운」에 이름 있는 사범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잘 정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 교우를 못했던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한국의 군사혁명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오히려 북한체제를 옹호하는데 까지 가는 데에는 날카로운 사상적인 격돌이 불가피했다. 그 후 본인도 나를 찾지 않았고 나도 방문을 꺼려했다. 자유주의적 지성인으로서 당시의 「쿠테타」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이해가 간다.

Jim이라고 하는 미국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 부인이 한국인인데 주말에 초대를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Jim이 주말에 픽업을 하러 왔다. 서민들이 사는 지역의 연립주택에 깔끔하게 차려 놓고 살고 있었다. 남편은 Dixie cup의 사진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고, 거구에 사팔뜨기 같은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호인이고 부인과의 사이에 연년생 아들 둘을 낳고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부인이 4살 연상이고 부인 말이라면 절대 복종하는 순진한 남편이었다.

Mrs. Lee는 자그마한 키에 다부지고 공부는 없지만 인생에 달관한 화끈한 아줌마였다. 자기의 과거를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문산 용주골 출신이고,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했다고 한다. Jim이 근처 미군부대 우체국 사병으로 근무할 때 만나 결혼하고 약속대로 미국에 데려 왔다고 한다. 자기가 아니면 미국에서 장가도 가기 힘들었을 것이고 시부모도 이런 사정을 이해하고 자기에게 매우 너그럽고 대접을 해주고 있단다. 그리고 한국식 며느리 역할을 잘 해서 시부모 보비위를 매우 잘 하는 모양이었다.

가족 생일잔치에 초대 받았는데 시부모의 며느리 칭찬이 대단했다. 아들이 셋인데, Jim이 막내고 딴 며느리보다 훨씬 잘 해 준다면서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넘버 원, 넘버 원” 했다.

초대받은 그날 Mrs. Lee는 김치 등 푸짐한 한식 메뉴로 상을 차렸다. 미역국에 김까지, 재료는 1개월에 한번씩 New York의 일본인 「그로서리」에 가서 사온다고 했다. Jim은 한식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식사 준비를 끼니때마다 두 번 한다고 한다. 아이들은 용케도 어머니 식성을 닮아 김에 밥을 싸서 잘도 받아 먹는다.

김치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매주 금요일에 Jim이 공장에 가면서 우리 집에 들러 김치병을 전달해 주고 갔다.

Stevens 가족 중에 Mae Ann과 아이들은 김치를 먹지 않았지만, Dr. Stevens는 김치를 좋아해서 나와 함께 항상 즐겨 먹었고, Lehigh 대학으로 전학가기까지 거의 1년을 Mrs. Lee에게 신세졌다.

어느 날 주말, Mrs. Lee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는 이가 미국 군인과 결혼해서 이웃마을에 살고 있는데 형편이 말이 아니란다. 주말이면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데 같이 가서 좀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한다. 통역이 필요하겠지 생각하고 같이 찾아 갔더니, 남편은 공군 상사였고 지금도 「피츠버그」 근처 기지에서 근무하고 주말이면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여자는 예쁘고 교양도 있어 보였다. 아이를 가져서 만삭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는 집은 시부모가 사는 집이고 외국인 며느리에 대해서 별 관심도 없다.

시부모는 행상 비슷한 일을 하는데 새벽에 내외가 차를 몰고 나가면 밤이 되어야 돌아오고 밥도 집에서 지어먹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냉장고에 음식도 채우지 않고 그저 방치된 고아가 되어 있었다. 밥도 수없이 굶는다고 했다.

이제 Mrs. Lee가 그 공군 상사를 몰아 붙이는 시간이 시작됐다. 나의 통역도 필요 없었다. 기지촌 양색시들이 흔히 쓰는 그 Broken English는 내용도 충실했고 Message도 간결하고 확실했다. 공군상사에게 들이대는 육두문자의 요지는 “질문을 하겠다. 너의 색시는 너의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느냐, 너에게 시집을 왔느냐? 말해라” 우물우물 하니까 “너에게 시집왔지?”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OK. 개도 두 끼니를 얻어 먹는데 저 여자는 허구헌 날 굶고 산다. 베이비까지 배에 들어 있는데 말이다. 네가 Animal이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당장 너의 기지 근처에 데려가서 같이 살고, 먹여라.” 당황해서 “Yes, yes”를 연발한다. 한마디도 빈말이 없으니 도리가 없다.

가지고 간 미역국을 데우고 김치, 잡채에 한 상 차려주니 그 여인 눈물로 그 밥그릇을 다 비운다. 무식한 그 용주골 아줌마가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없다. 이럴 때의 역할은 교육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문득 영국 Scotland의 Highland에 사는 농부들의 영어 실력이 생각났다. 여기 사는 농사꾼들은 일평생 동사(動詞) 300 단어를 가지고 불편 없이 생활한다. get, take, see등의 동사만 붙이면 안 되는 말이 없단다.

Mrs. Lee의 영어는 이 Highlander의 단어의 반도 되지 않지만, 15년(당시)을 죽어라 공부한 통역이 전문인 나보다도 훨씬 Impact가 있는 영어를 구사했다. 첫째, 알맹이(substance)가 있어야 하고, 수사어는 다음이며 아는 단어를 최대한 활용, 응용하면 멋있는 회화가 될 수 있다.

인천중학교에 다닐 때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신 노교사(老敎師) 「Very Good」 이상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손이 시리다」를 영어로 아는 사람 손들어봐!” 그 막강한 실력파들이 아무도 손을 든 학생이 없다. 그러자 선생님 가라사대 “「Cold」란 말 알지?” 하신다. “「Hands cold」 하면 되지, 뭐 대단한 게 영어가 아니여!” 하신다.

이렇게 인간의 기본이 확실히 서 있는 Mrs. Lee의 간곡한 부탁성 협박으로 그 공군 상사는 부인을 데리고 기지로 이사를 갔다고 들었다.
 
재미유학생회 모임

New york N.Y,U에 다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음 주일에 Central Park에서 미국 동부지역의 유학생 모임이 있고 회장 선출도 있으니 참석하라는 전갈이다. 중간시험도 끝났고 한가한 때에 New york 구경도 하고 싶고 해서 가기로 작정했다.

버스로 뉴저지 주의 Newark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는 Empire State Building은 장관이었다. 하늘을 찌르며 솟아있는 그 건물이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배로 Hudson강을 건너면서 내내 하늘만 쳐다봤다. 서울에서 10층 건물도 보기 힘든 촌뜨기에게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어찌어찌 물어물어 지하철이라는 것도 처음 타고 Central park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약 100여명의 유학생이 집합했는데 열띤 선거전이 벌어졌다. 대부분 서울 출신 유학생들이지만 개인 대결이 아니라 학교 대결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경기고교와 서울고교의 싸움인데 경기는 하나, 기타 지방고와 경기를 제외한 수도권 여러 고등학교가 연합작전을 펴고 있었다.

당시 유학생들도 국내 학생 못지않게 「엘리트」의식과 정치성이 매우 강했다. 경기 출신만이 회장을 지냈고 이제 타교 출신도 번갈아가며 회장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공기도 팽배했다. 서울, 경복 등 쟁쟁한 학교와 지방고까지 연합했으니 이번에는 변화가 있겠지 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의외였다. 경기출신 김모(金某)라고 하는 Columbia 재학생이 과반수를 여유 있게 달성해 회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그때 경기고의 저력을 확인했다. 전국 고교가 다 연합했는데 경기 하나를 이기지 못했다. 우선 외국에 일찍 눈을 떴고 많은 유학생을 배출한 학교다.

Washington D.C. 지역도 마찬가지로 장기집권하고 있었고, 박정수(朴定洙 前 외교장관) 씨가 마지막으로 경기인으로 회장을 역임하고 경남고 정인택(鄭仁澤, 교수 출신) 씨가 타교 출신으로는 처음 D.C. 지역회장이 되었다.

불원천리하고 빠듯한 용돈에 New york까지 찾아가 선거에 참여했는데, 별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겨우 영사관에서 신년하례가 있다는 엽서 하나가 1년 동안 나에게 Contact한 전부였다. 다행인 것은 수년 후 귀국하여 구미동창회(歐美同窓會)를 조직했을 때 그때의 유학 동료들을 많이 만났고 몇몇 분과는 지금도 친교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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