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機) 납북사건과 형님_2 (93회)
  제11장 중년기의 가정생활

다음 날, 기술자처럼 보이는 한 사람과 북에서 제조했다는 다이얼 전화기 한대를 지참하고 나타났더란다. 전화기의 원가를 계산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정말로 형님의 전공(專攻) 중의 전공이었다. 전화기를 대충 해부한 후에 하룻밤을 꼬박 새고 부품별로 원가를 잡아, 반듯하게 원가 계산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

조금 후에 조사인이 어제 왔던 기술자와 함께 나타나더니, 다소 의외라는 듯이 수긍하면서 “좀 비싸군요. 잘 봤습니다, 김 선생! 필체가 아주 좋군요.” 하면서 칭찬까지 하더란다. 형님의 한글, 한자(한자) 필체는 유명하다. 보성(寶城) 출신으로 그 유명한 설주(雪舟) 선생에게서 천자문을 읽고, 쓰는 것을 어릴 때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별다른 압박이 없이 다른 일행과 비교적 자유스럽게 어울리도록 허락이 되었다. 무려 20여일의 집중 조사 후에 이루어진 해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방에서 쉬고 있는데 “김 선생, 면회입니다.” 부르더란다. 돌연 초췌한 모습의 숙부님 김옥주(金沃周) 삼촌이 나타난 것이다. 무려 20여 년만의 재회였다.

예고도 없었고, 매우 당황했고,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더란다. 조사요원 한 사람이 끝까지 배석을 하고 있으니 속의 말도 못하고 그저 무해한 가족 안부만 서로 교환했다고 한다.

남한에는 숙모님과 아들 셋이 살고 있는데, 그때 당시 큰아들은 고향 진상역(津上驛)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하고 있고, 둘째는 국민학교 교사, 셋째는 서울대학교 공대 건축공학과 학생이라는 것을 말씀드렸다고 한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더란다.

그동안 평양시내서 살다가, 1960년 초(初)에 지방으로 내려가 농장의 지배인으로 있으며, 부상(副相) 대우를 받으며 편하게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더란다. 아마도 1955년 박헌영(朴憲泳)이 숙청되고, 많은 남한출신이 제거되면서 지방으로 하방(下放)된 모양이다. 재혼을 해서 남자아이 둘이 있다고 말씀하시더란다.

배석했던 조사요원이 슬그머니 형님에게 공화국에 남아 일해 볼 생각이 없냐고 운을 띄우더란다. 김(金) 선생 기술도 좋고, 공화국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 특별한 대우를 해 주겠노라 면서 북한에 남기를 종용하더란다. 돌려는 보내줄 모양이구나 하는 낌새를 느끼고,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정신이 확 들더란다. 상대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거절하는데 말이 궁해 한동안 혼이 났다고 한다.

숙부님과의 만남은 남한으로 내려오기 전 한차례 더 있었다. 이번에는 북쪽 당국의 강력한 종용을 받았는지, 숙부님도 거들면서 북한에 남기를 요청하시더란다. 외롭고 하니 같이 살면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하셨단다. 이산가족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했다. 이 운명적인 만남이 마지막이었다.
 
▲ 납북기 송환을 요구하는 남북간 접촉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69. 12.22.)

그 후 옥주(沃周)삼촌은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한참이던 1988년 10월 2일 세상을 뜨셨다 한다(대남방송을 인용하여 남측 중앙일보가 보도함). 고향을 그리며, 남한 가족을 몽매(夢寐)에도 못 잊었을, 얼마나 서러운 북망산 길이었을까 생각하니 참으로 숙부님이 불쌍하다.

형님은 약 2주(週)간의 집중조사가 끝나자 일행 중 38명에 합류하여, 낮에는 산업시설, 전쟁기념관 등을 관람했다. 특히 강조하며 보여주는 것이 있었다. 6.25때 미 제국주의(美 帝國主義) 군대의 만행장소라 하면서 해주에 있는 광산 깊숙이 안내하고, 사리원의 거대한 우물 등을 보여주었다. 과장되는 점이 많은데, 예를 들어 약 100명 정도면 몰라도, 우물에 1,000명을 처넣고 죽였다는 등 체제 선전에 급급했다.

밤에는 문화의 시간이라 하면서 수령(首領)의 혁명 관련 서적과 이념에 관계된 책들을 들려주면서, 읽고 독후감을 쓰거나 반성문을 써 내라는 등 잠시도 가만히 두질 않는다.

어느 땐가 형님이 한번 혼쭐이 난 적이 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북한 선전원이 최근에 생긴 경부고속도로(그 당시 수원까지는 개통이 되었다 함)에 대하여 매우 좋지 않게 악담을 하더란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를 만드느라 그 좋은 농토를 많이 없애 농민들을 피눈물 나게 만들었고, 날씬하게 닦은 고속도로에는 자본가들이 거들먹거리며 미제 승용차를 몰고 골프, 낚시, 등산이나 다니지 않느냐는 악담이었다. 그런데 이런 악선전에 형님이 슬그머니 부아가 나서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 선생! 남한에서는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좋은 장비를 가져다가 주로 산맥을 깎고, 굴을 뚫어 고속도로를 냈기 때문에 농지에는 별 피해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골사람들도 고속버스 등으로 많이 나들이 합니다. 자본가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지요.” 했더란다.

그랬더니 그 지도원 동무 당장 반격을 하는데 “김(金) 선생! 그것은 반동의 소리올시다.”하더란다. 깜짝 놀랐는데, 많은 일행 앞에서 자존심이 상했는지 한참동안 반성문을 쓰라는 등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체제의 우월성, 수령의 절대성에는 양보가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참으로 살기 어려운 동네라는 것을 실감했으며, 그 후에는 절대 맞대고 논쟁을 하지 않고 돌아섰다고 한다.

드디어 이듬해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51명중 39명이 남쪽으로 송환되었다. 북에 남은 사람들은 기장(機長)과 부기장(副機長) 그리고 여승무원들(의거 입북(入北)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인 듯), 북한출신 기업인과 그의 가족 그리고 지방지(地方紙) 기자(이북출신이라 함) 등이었다.

서울에 돌아온 일행은 3~4일간의 또 다른 혹독한 심문에 시달려야 했다. 북쪽의 철저한 세뇌공작과 이념교육에 대한 「디브리핑」을 위해서다. 그리고 또한 남쪽에서의 산업시찰, 체제우위에 관한 재교육이 2주간 지속되고, 드디어 귀환 20여일 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가정이 정돈되자 미루어 왔던 아버님의 육순 회갑연을 형님의 무사귀환 축하와 함께 반도(半島)호텔에서 대소가와 친지를 모시고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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