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코니엘 선생(先生) (94회)
  제11장 중년기의 가정생활

어느 날 후줄그레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코니엘 선생이 중앙청 나의 사무실에 홀연히 나타났다. 외관으로 봐도 문제가 있는 모습이었다. 중앙청 다방으로 안내하고 이야기를 들었더니 부인과 이혼을 했으며, 서울로 직장을 옮겼으면 좋겠다고 한다.

직장을 구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방문의 목적이었다. 자식은 없었지만 15성상의 결혼생활에 정이 들어 잘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더니 이것이 웬일인가! 취직문제는 2차적인 것이고 우선 부인과의 관계가 확실히 정리가 되어야 내가 움직일 수 있다고 했더니 이미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고 상당한 기간 별거 중이라고 했다.

우선 부인 쪽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여 부인을 서울로 불러올리고 같이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고 간곡히 타일렀다. 2, 3일 후에 부인과 함께 광화문 어느 다방에서 기다린다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선생님 내외와 부인의 남동생(세관에 근무하고 있었음)이 와 있었다. 이혼은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고, 부인 말이 ‘생(生)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술만 마셔대니’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다. 이제 자기도 팔자를 고쳐야지 더 이상 동정으로도 같이 살 수 없다고 딱 잡아뗀다.

부인은 시골여자 치고는 이해도 빠르고 용모도 단정한 여자로서 거의 흠잡을 데가 없는 여인이었다. 젊은 혈기가 왕성할 때에는 모르고 지냈는데 점차 나이가 들면서 여러 가지 문화적 차이의 골이 매우 깊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고 같이 사는 것이 엄청난 고통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영영 남남의 길로 갈라섰다.

코니엘 선생은 돈도 떨어졌고 종로 뒷골목 여인숙을 전전하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 참 딱한 일이었다. 퇴근길에 만나 집으로 데리고 가는데 조그마한 보스톤백 하나 달랑 들고 따라온다.

마침 홍제동 2차 새집이 완성되고 이층이 비어 있어 그 방으로 안내를 했다. 그리고 약속을 했다. 당분간 이층 숙소를 무료로 제공하고 아침식사는 같이 하는데 점심과 저녁은 선생이 해결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아내와 가족에게 미안했다. 어려운 군식구가 하나 더 붙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 신경을 쓰게 된다.

다음날부터 취직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친구들에게 백방으로 연락을 하는데 답이 시원치 않았다. 당시에는 기업, 관공서 그리고 사교육이 세계화 되지 않아서 영어(英語)의 수요(需要)가 거의 없는 시대였다. 미(美) 8군(軍) 계통에서 일해 보라고 했더니, 선생은 미국 기관(機關)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마침 Korea Herald지(紙)에서 논설위원으로 있는 나의 친구 김각(金珏) 씨에게 연락을 했더니 영문기사(英文記事) 교정하는 분야에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선뜻 선생을 받아주겠다고 한다. 매우 고마웠다.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어가는 듯 했다. 그리고 2~3개월은 전혀 말이 없고 저녁에 들어와서는 소주 몇 잔하고 조용히 자고, 다음날 출근하고, 별 말썽이 없었다. 그런데 점점 술이 과해지는 것 같더니 자세가 약간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김각(金珏)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저히 일을 시킬 수가 없다 한다. 판단이 흐리고 종합적인 두뇌활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15년간의 결혼생활이 파탄이 나니 외롭고, 자신의 가치상실증에 걸렸다. 그리고 그렇게 믿었던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도 「인민공사(人民公社)」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 전(全) 국토가 「도살장」으로 변했다면서 비통해 했다.
 
▲ 1966년 9월12일 중국 '무산계급문화대혁명'때 홍위병의 반우파(자산계급 타도) 운동 모습. 1968년에는 중국 전역에서 '계급분류'라는 대규모 운동이 극성을 부리고 국가가 후원하는 살육이 극에 달했다. 이 운동의 목적은 인민들 속에 섞여 있는 '계급의 적들'에 대한 현황 파악과 함께 처형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처벌하는 것이었다. / 표면적으로는 문화혁명이었지만 정권 중추에서 잠시 물러난 마오쩌둥이 자신의 재부상을 획책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민중과 학생 폭력 운동을 동원해 시장 회생파를 공격하고 죽이려고 몰아간 마오쩌둥파와 덩샤오핑파 간의 권력 투쟁을 겸하였다.

그때 외신(外信)들은 계속해서 문화혁명의 참상을 보도하고, 결박된 수백의 시체가 황포강(璜浦江)을 따라 구룡반도로 흘러내려 오고 있다 하는 등, 암울한 기사들이 많이 나온 때였다.

선생은 술만 취하면 자신의 이념적인 과오를 솔직하게 털어 놓으면서 경련을 일으키며, 때로는 통곡을 하곤 했다. 거의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있었다. 국제사회주의(國際社會主義)는 Paper의 이론에 불과하지 실체는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 세계(世界)가 그 이념(理念)을 위해 흘린 피가 얼마냐고 한탄했다. 소련의 붕괴도 시간문제라고 예언했다.

이제 모든 것을 청산하고 미국 어머니 곁으로 돌아갈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으나 허사였다. 무엇이 두려운지 한사코 귀국을 거부하고 소심증(小心症)에 젖어 있었다. 「코니엘」선생은 이렇게 젊은 시절에 이념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그 이념의 노예로 외골수가 되는 바램에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화석(化石)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 후 수개월(數個月) 동안 나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금성, Lucky 가문(家門)의 가정교사 일을 맡아 소일(消日)하다가 다소 안정을 찾고, Lucky 계열의 무역회사에서 일을 얻어 우리 집을 떠나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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