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처(MOST) (95회)
  제12장 KIST 시절

1970년 10월 초, 광화문 조선일보사 뒷쪽 청화빌딩에 소재한 과학기술처 연구조정관실로 부임했다.

과학기술처는 신생부처였다. 경제기획원의 기술관리국을 확대 개편하는 방향으로 1967년 3월 30일 정부조직법 1847호로 공표되고 그해 4월에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처(處)는 과학기술진흥을 위한 통합적인 기본정책의 수립, 시험, 조사, 연구업무집행에 관한 종합조정 그리고 과학기술진흥을 위한 국제적 협력을 추진하고, 원자력의 연구개발과 활용방안을 수립, 집행하는 것이 임무로 되어 있었다.

처(處)에는 연구조정실과 기획관리실의 2실(室)과 진흥국, 국제협력국의 2국(局)으로 되어 있고, 원자력실은 원자력청(廳)으로 개편되어 외청(外廳)으로 존재하면서 ①원자력연구소 ②방사선의학연구소 ③방사농학연구소를 거느리게 되었고 또 2개 외청으로 국립지질조사소와 중앙관상대가 있었다.

제 1대 장관 김기형(金基衡) 박사(’76.4~’71.6)는 PENN. STATE UNIV.에서 화공계열 세라믹 분야에서 학위를 했다. 활발한 연구 활동과 수개의 특허를 갖고 있어 초창기 공학 계열 미국유학파 가운데에서 많이 알려진 분이었다. 국내실정과 행정에 경험이 없어 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응선(李應善), 김형기(金鎣基), 권원기(權原基) 같은 유능한 과학기술행정가의 적극적인 보좌로 많은 관련법령 제정과 부처(部處)의 기초 확립을 위한 작업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62~’66)에서는 첫째 에너지원의 확보, 기간산업·사회간접자본의 확충, 수출, 고용증대, 기술진흥을 주요 정책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1차 5개년계획기간 중 연평균 GNP의 성장률을 7.0%로 하고 1966년의 수출고를 1억 3,750만 달러로 설정했다. 이것은 경제성장률 2.8%, 1인당 GDP 80달러, 수출고 4천만 달러 그리고 섬유공업이 산업의 대종을 이루고 있던 1962년의 우리 실정으로서는 대단히 의욕적이며 대담한 계획목표였다.

1차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경제기획원 중심으로 인력개발계획이 마련되었고, 과기처(科技處)로 독립된 후 우리나라 처음으로 과학기술개발 장기종합계획(’67~’86)이 수립되어 「근대화(近代化)」라는 말이 처음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60년대의 연구개발 활동은 매우 미미해서 형식적인 존치과목을 면치 못했다. 223개의 연구기관(국·공영 연구기관 67개, 대학부설 51개, 비영리법인 7개, 기업연구소 98개)에 연구종사자는 6,698명으로 연구기관 당 평균 30명, 연구투자액은 총 53억(정부투자 80%, 민관투자 20%)이었는데, 이것은 GDP의 0.43%에 불과했다.

이 중에도 연구개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국내의 연구기관은 국·공영 67개, 민영 7개에 불과했고 국·공영 연구기관 중 농학부문이 40개로서 국가연구비의 절반은 농학에 투입하고 있었다. 따라서 2,3차 산업의 연구개발은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였다.

이런 환경에서 19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탄생은 우리나라 과학기술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리고 한미(韓美) 양국의 공동사업으로 1971년에 설립된, 한국과학원(KID-KAIST의 전신)이 과학기술 영재를 양성하기 위한 특수 이공계 대학원으로 출범하게 된다. 이렇듯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 과학기술처 개청식 (1967. 4.21.) [출처 ; 국가기록원]

인문사회분야 담당 조정관으로서 나의 첫째 임무는 매년 초에 개최되는 국가과학기술진흥확대회의의 자료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임석하는 회의였으므로 과기처로서는 매우 신경을 쓰는 회의였고 나로서는 부임 후 첫 번째 맡은 임무였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친정인 총리실의 적극적인 협조로 중앙청 중앙홀을 빌려 쓰도록 했고, 총무처에 의뢰해 몇 개의 훈장과 대통령 표창을 얻어 내기도 해서 확대진흥회의는 알맹이가 있는 잘 준비된 회의로 칭찬을 받았다.

내가 사회를 맡아 진행했고, 모든 것은 완벽하게 끝났다. 다만 민간대표로 참석했던 당대의 대기자(大記者) 홍종인(洪鍾仁) 선생이 마지막 자리를 떠나면서 큰 소리로 “이따위 각본에 의한 회의는 집어치워!” 하는 바람에 장내는 일시 긴장되었으나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둘째 임무는 전년도 연구용역 사업을 수납하고, 신년도(1971년도) 사업을 계약하는 일이었다. 전년도 사업은 「한국의 대외진출에 관한 연구」라는Subject로서 서울대 한국국제관계연구소의 최종기(崔鍾起) 교수의 연구 작품이었다. 주로 월남(베트남)과의 교역관계 전망을 다룬 연구였고, 책자로 완성된 것을 관계기관에 배포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리고 ’71년도 새 연구용역으로서 「한국의 저개발국에 대한 효과적인 기술협력에 관한 연구」로서 또다시 월남 지향적인 연구였고, 이미 연구용역 사업심의위원회에서 제목과 사업자가 선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연구 사업에 관한 모니터 역할에 불과했다.

서울대의 최종기 교수가 전년도에 이어 똑같이 해 나가는 사업으로 변화가 전혀 없고 좀 허탈한 감마저 들었다. 신년도 용역과제를 수행하기 직전인 1970년 12월, 우리 정부는 처음으로 약 10여개 부처가 입주할 수 있는 종합청사가 완성되었다. 초대 총무처 장관 이석재(李錫濟) 씨의 빈틈없는 감독과 그 특이한 추진력으로 세종로에 20층의 대형 종합청사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드디어 우리 과학기술처도 셋방살이를 면하고 종합청사 정상 20층에 자리를 잡았다. 연구조정관실은 청사 북쪽 끝에 자리 잡아 그 수려한 북악산, 청와대를 내려다보고, 우측으로는 중앙청이 바로 옆에 보이는 가장 조망이 좋은 위치에 배정 받았다.

조정기간 동안 자주 고장 나서 중간에 서버리는 Otis 엘리베이터 덕분에 출근 시에 수시로 청사 꼭대기까지 도보행진을 하기도 했는데, 한두 번의 쉼 끝에 꼭대기 층에 도달하곤 했다. 그러나 방에 들어가면서 확 트이는 절경에 매료되어 고난의 행군은 언제나 흐뭇함으로 끝났다.

연구조정관들은 모두 타 부처, 국공립연구소 그리고 대학에서 유치해온 분들로 원숙한 인재들이었다. 나보다 5~10여세 위의 선배들이었고 나의 고교 선배도 몇 있었다. 문제는 Hardware Engineer 출신이 드물고 많은 분들이 농학이나 기초과학 이론 분야에 치우쳐 있었던 것이 큰 흠이었다. 과학기술양노원이라는 평까지 나올 정도였다. 특히 과학기술분야 정부기관이 이합집산하면서 우리 조정관 중에는 군수, 시장 출신도 끼어 있는 실정이었다.

별 할 일이 없고, 각종 회의에 참석하거나 Project가 계약이 끝나고 집행되면 그때그때 TF에 참가하는 정도였다. 당시 한글타자 자판 통일에 관한 작업이 가장 알맹이 있는 연구과제로 생각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조사연구, 계획수립 등의 Software가 전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산업시대로 진입하는데 꼭 필요한 연구과제였음에는 틀림이 없는 것들이었다.

 
  John 코니엘 선생(先生) (9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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