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97회)
  제12장 KIST 시절

KIST의 설립은 1960년 중반, 3공화국과 미국 존슨정부 사이의 각별한 우의의 결과였다. 그 이면에는 확대되는 월남전에 참전을 결정한 한국에게 주어진 첫 번째의 큰 선물이기도 했다. 「과학기술행정 20년사」에 설립과정이 잘 정리되어 있는데 이를 여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 1965년 5월 존슨 미국대통령과 방미 중이던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5월 18일 발표한 한·미 국가원수의 공동성명 제12항은..... 박대통령은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를 설치하는 가능성을 한국의 공업, 과학 및 교육계 지도자들과 더불어 검토하기 위하여 그의 과학고문을 파견하겠다는 존슨 대통령의 제의를 환영하였다. 동 연구소 및 실험소 등은 한국 생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술서비스와 연구조사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며, 미국에서 훈련받은 고급기술자들이 그들의 연구조사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될 것이라는 것은 존슨 대통령의 생각이다 라고 밝혔다. ...」 이에 따라 미국은 66년 8월 5일, 대통령 과학고문 Donald F. Honig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조사단이 제출한 「호닉보고서」에 따라 AID(해외경제원조처)에 대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을 할 것과 10년간 1천만 달러의 자금지원을 지시했으며, 한·미 양국 정부는 연구소 설립의 Feasibility study 용역을 맡은 미(美) BATTEL 연구소의 조사단이 만든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및 조직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수락하고 1966년 2월 4일 한·미 공동지원사업계획 협정서를 정식으로 발표했다. 한편 한국정부는 KIST 운영재단의 이사진과 초대(初代) 소장(최형섭)을 임명했으며,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66년 2월 10일 법원에 등기됨으로써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이런 KIST의 출범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첫째, 이 연구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산업기술 종합연구기관이었다는 점에서 그 뒤 발족한 여러 연구소의 Model이 되어 그 운영방법이나 발전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고 둘째, 이 연구소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계약연구제도(Research Contract)가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셋째, 이 연구소는 해외의 한국출신 과학기술자의 유치에 핵심 구실을 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도 없던 「산업기술 종합연구기관」의 출범이었다. 최대한의 자율성을 인정한 면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매우 부러워했던 것이다.

연구의 자율성, 연구소의 재정적 보장, 합리적인 분위기의 조성을 기본이념으로 내건 KIST는 이것을 법으로 보장받기 위해 많은 투쟁을 해야 했다.

매년 작성하는 「KIST 사업계획서」를 주무장관의 승인을 받게 한 첫 번째 법안을 최형섭 초대 소장과 연구소 측 브레인들의 집요한 노력과, 미국 측의 결정적 역할을 통하여 이 조항을 없애버린 최대의 자율을 보장받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육성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66년 12월 27일 개정 법률로 공포되었다.

KIST 육성법은 그 뒤 한국과학원(KAIST의 전신), 한국개발연구원(KDI), 국방과학연구소(ADD) 그리고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 설립을 위한 기초 육성법을 입안하는데 주요한 사례가 되었으며, 드디어 1973년에 특정연구기관육성법으로 발전되면서 국내의 모든 출연기관(出捐機關)을 아우르는 종합법령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연구소의 「자율권」은 미덕이었고, 하나의 「Norm」에 가까운 운영철학이기도 했다. 최형섭 박사의 다년간의 뼈저린 경험에서 얻어낸 전리품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의 예산회계법 그리고 각종 법령은 규제 일변도였고, “할 수 없다”는 것만 나열한 하나의 율법이라고 본 것이다. 감사원의 정기 감사와 주무부처의 수시 감독, 감사를 연구소에 적용하면 연구소는 연구, 개발이 아니라 일개 시험분석소로 전락하고 만다는 논리였다.
 
▲ KIST의 설립의 미국 측 주역 Donald F. Honig,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 Brown대 총장과 함께 (1971.) 

타당성이 있는 관찰이었고 이런 실험을 많이 경험한 미국 측 이사였던 「호닉」 박사도 적극적으로 동조해서 정부를 설득하고, 국회를 이해시켜 성사된 것이었다. 일부 관료들은 KIST가 치외법권이라고까지 불만을 터뜨렸다. 이런 자율권을 인정받은 많은 연구기관이 지금껏 부도가 난 적이 없고, 부분적인 부정 외에는 큰 비리 없이 그 역할을 잘 유지하고 연구 성과를 거양하고 있다.

최 장관의 지론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연구 활동에 자율이 보장되어야 하고, 행정관리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 봉사하는 것이다. 최 박사의 성격이 얼마나 강하고 원칙에 충실했는지 이런 일화가 있다. 최 박사가 1959년경 원자력원 산하 원자력연구소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연구소 일부 원로 연구원들이 「독재자」가 부임해서는 안 된다고 소장 책상을 밖으로 들어내 버린 사건이 있었다. 사무직원들도 같이 저항했다고 한다.

자율을 위한 최 박사의 또 하나의 작품은 「출연금(出捐金)」이라는 제도였다. 미국의 연구기관 또는 자선기관에서 흔히 쓰는 제도였다. 보조금 또는 기여금이라고 하면 정부의 예산회계법 또는 보조금 관리규정에 따라 감사를 받거나 여러 가지 통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출연(出捐)」하면 「주고나면 묻지 마라」라는 말과 같이 사용에 관해 완전 자율에 맡기는 것이다. 연도를 이월해서 쓸 수도 있고 목관유용(目款流用)도 연구목적에 합당하면 용인되었다. 가히 연구소 운영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KIST 시설의 건설 자체도 정부기관이나 민간기업에 맡기면 잡음이 생기고, 추진력에 문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박 대통령의 특명으로 군 공병단을 투입하여 철관작업으로 2년 만에 부지조성과 주요 연구동 건설을 깔끔하게 완성하였다. 김수근 씨의 설계 디자인으로 날개를 단 최첨단의 구조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많은 구경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해외 과학자의 유치를 위해 아파트를 신축, 제공했는데, 그 아파트도 당시로선 최고 선진된 주거시설로 설계되어 많은 호평을 받고,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후생복지 시설을 갖추었다. 정구장에 야간 Light 시설을 설치하고 소형 운동장과 실내 도장(道場) 그리고 24시간 야식까지 제공하는 전천후 식당을 마련했다. 그리고 외국인 초대, 숙박을 위해 국내 연구소 처음으로 멋쟁이 「영빈관」까지 마련했다.

연구원들의 보수도 외국의 그것과 항상 비교했고, 연구 활동비를 본봉에 추가하고, 소위 Stipend 까지 합치면 대학의 교수들과 비교해서 약 3배 정도 높은 수준으로서 주변의 많은 저항을 샀다. 그러나 KIST 보수가 효시가 되어 각 대학 그리고 연구소가 그 후 5년 동안 획기적으로 대우가 개선되기도 했고, 연구의 인적교류도 점차 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System 연구로 접근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설정되면서 필요한 분야에는 산학협동이 처음 도입되고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모든 연구가 산업연구에 결부되고, 연구를 위한 연구는 소멸 되었다. 실물이 나오고 연구가 되어야 생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어갔다.

연구 프로젝트도 연구심의위원회가 있어 일일이 타당성을 검토 받고, 프로젝트 예산과 연구 인력의 투입까지도 자체 통제를 받는다. 자기가 용역을 따왔다고 해서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아니고 공동의 검증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인사위원회가 있어 인원은 반드시 공개경쟁이 원칙이고 정실(情實)을 최대한 배제함으로써 처음부터 우수한 인력이 집합했다. 특히 행정요원들은 간부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개로 채용되어 학교, 지역 등의 구분이 초창기에는 거의 없었다.

객관적이고 타당한 제도는 모두 활용하는 당시로서는 이상형의 기관을 조립하려고 최선을 다한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KIST는 타자수 하나도 청탁으로 되는 곳이 아니라는 전통이 초창기에 이미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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