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의 핵주기기술(核週期技術) 도입 계약이 성사되고 정부의 사업예산도 어느 정도 확보된 마당에 연구소가 위치한 서울 공릉동 약 3만여 평으로는 부족하였다. 바로 인근에 학교와 민가가 밀집되어 있었다. 장기적 개발계획으로 보면 연구소 최소한 10여만 평의 넓은 부지가 필요했다. 사업의 특수성으로 봐서 산이나 구릉으로 차폐(遮蔽)가 되고 고립된 지역이 적합한 위치이기 때문에 제 2의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1974년 과기처 주관으로 연구단지(Science Park) 조성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충청남도 대덕군 탄동면 일대와 아산만 공업단지를 두루 살피고, 5만/1 지도를 입수하여 면밀히 검토하게 되었다. 조사 끝에 탄동면 덕진리(炭洞面 德津里)가 적지로 보였다. 우선 해발 300여m의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남쪽이 약간 트여 있어 천혜의 고립된 장소였다. 그야말로 좌청룡 우백호에 배산(背山:玄山)을 제대로 갖추어 있으며 용수(用水), 배수(排水)도 대전천과 신탄진의 금강을 두루 이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입지였다.
500년 역사의 덕진마을은 이(李) 씨 집성촌으로서 이전계획을 추진하는데 많은 애를 먹었다. 특히 거주민들에게 미안하고 국가사업이라는 용도를 납득시켜가며 장기계획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덕진리 입구의 농지 3만 평을 매입하고, 2차로 2만 평을 수용, 총 5만 평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기타 추가 용지(用地) 5만여 평은 덕진 마을과 3차에 나누어서 매수하기로 했다.
이 절묘한 시기에 한 인재가 나타났다. 나의 대학동기이자 1960년 이승만 정권 때 같이 거사를 모의했던 윤석만(尹錫萬) 군이 나타난 것이다. 윤형(尹 兄)의 이야기인즉 건설부에 근무하다보니 공무원 봉급으로는 생활이 안 되어 월급이 좀 나은 신설공기업인 수자원개발공사로 이적하였는데 소양강 공사장, 태백시 개발현장 등 지방으로만 다니다 보니 아이들 교육도 문제이고, 서울 근교에서 가족과 함께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 연구소에 적당한 자리가 있으면 해결해 달라는 요지의 부탁이었다.
마침 부지(敷地) 마련을 위한 거대사업이 코앞에 있는지라 바로 입소절차에 들어갔다. 적임자 한 사람이 힘들이지 않고 저절로 들어온 것이다. 인사위원회는 서면결재로 처리하고 기획차장 밑에 용지담당으로 임명했다. 약 2개월여의 내부 근무를 통해 인화를 조성한 다음, 현지에 보좌역 한 사람을 대동하여 파견했다.
내근 2개월은 짧은 시간이지만 윤형(尹 兄)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나 보다. 윤(尹) 형은 천부적으로 인화와 교섭의 달인이었다. 몇 차례 술자리만 같이 하면 호형호제 하면서 친해진다. 대전 유성에 내려가 하숙을 정하고 덕진 마을에 왔다 갔다 하며 그 마을과 관계가 있는 부동산 소개업자를 선정하고 군청에 출입하면서 매수협조를 요청하고 돈이 급한 사람의 토지부터 하나하나 매수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5, 6개월 만에 1차분 3만 평을 소리 없이 확보했다.
현지에서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전혀 잡음이 없었다. 그런데 연구소 내부에서 잡음이 터져 나온다. 예산회계법에 맞지 않게 전도금(前渡金:선급금)을 마구 사용한다는 것이다. 토지(土地) 대금은 명의 이전과 함께 본부에서 수표로 집행해 가니까 문제는 없으나 소소한 잡비 등의 지출은 현장에서 그때그때 용도(用度)에 따라 통장에서 인출해서 쓰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일체의 사용(私用)은 용납되지 않는다. 나중에 정직하게 자기 돈으로 메운다 하더라도 공금유용이 되어 감사에 걸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사용과 공용의 한계가 모호한 경우가 종종 있으며 중개업자나 이장과 식사를 하거나, 한 잔 사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을 때는 우선 돈을 찾아서 쓰고, 다음 월급을 받으면 충당해 놓는 일이 다반사로 생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본부 회계과장으로서는 이것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관리부서의 간부들은 공무원 출신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전도금(前渡金)에 관해서는 매우 신경이 예민하다. 과장, 차장들은 우려를 표시하고 윤(尹)형에게 해명을 요구하면, 윤(尹)형은 현장의 실정을 전혀 모르는 「쪼다」들이라고 일갈하고, 조정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전도금에는 잡비나 판공비 같은 성격의 지출이 인정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출장비 등으로 비자금을 조성해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윤(尹)형의 노력으로 일차로 충분한 용지(用地)가 마련되었고 1975년 11월 연구소의 분소형태인 대덕공학센터의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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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덕 원자력개발공단 부지 선정을 위한 현지 답사 (1975.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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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분소는 1976년 3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의 대덕연구단지 건설현장을 시찰하게 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브리핑을 청취한 박대통령은 건설에 소요되는 예산과 추진 상황으로 보아 과기처의 능력으로는 미흡할 것으로 판단,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오원철(吳元哲) 경제 제 2수석에게 재검토하도록 지시하면서 대덕단지 조성은 획기적인 탄력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대덕공학센터」는 독립기관으로서의 출범을 시동하고, 대덕에는 전문 연구기관으로 화학연구소, 통신연구소 그리고 언저리에 국방과학연구소(ADD) 대덕분소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는, 첨단과학의 cluster군(群)으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기계연구소, 선박연구소는 창원으로 분류됐다가 후에 대덕으로 합류함).
1976년 후반 과기처와 청와대 주변에서 대덕공학센터를 연구소로부터 분리 독립시키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연구소 입장에선 단연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원자력발전기술과 핵주기는 긴밀한 연관기술이고 연구인력 그리고 자원의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와대의 차원 높은 국가정책의 고려 등으로 반대는 잠재워지고 1976년 12월 1일 분소(分所) 「공학센터」는 한국핵연료개발공단으로 새 출발 하게 되었고, 원자력연구의 2원화는 양 기관이 재통합되는 1981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연구소의 양분, Hardware중심의 연구사업 추진 그리고 대덕단지가 복합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 정책적 배려 등은 급기야 청와대가 핵개발을 주도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게 되고, 미국의 견제가 본격화되는 빌미가 되었다고 본다.
여하튼 핵주기 사업은 소소한 문제는 있었으나 목표를 향한 도도한 흐름에는 전혀 장애가 없었다. 그러다가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지고 말았다.
1974년 5월 인도의 핵실험은 전 세계의 원자력의 평화적 수용이라는 기본취지를 송두리째 뒤흔든 계기가 되었다. 모든 Sensitive Technology(민감기술:敏感技術)의 국제간 이전을 제한하는 핵확산 금지 조치를 대폭 강화하게 되었다.
프랑스가 우리와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했던 1975년 초만 하더라도 별 문제가 없었고,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미·영의 외교 압박이 점차 강화되면서 외교적 독자 노선에 달관한 프랑스도 중도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판국에 1976년 초·재처리시험시설의 수출은 곤란하다는 프랑스 측의 통고가 우리에게 접수되어 망연자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차관은 살아 있어 이삭을 줍는 심정으로 재처리 대신,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 등 단편적으로 재처리에 접근하는 기초기술은 살려나가도록 프랑스와 최종 협조를 해 나갔다. 이들 기술은 원자력발전 기술에도 불가결한 부분이기도 하다. 명분은 충분히 서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일차 추진사업에서 계속 살아남은 부분이 바로 원자력 발전용 핵연료 성형가공 시험시설이다.
프랑스 CERCA사(社)와의 계약으로 추진되었던 연산(年産) 10톤 규모의 성형가공시설은 1976년 중순 설계가 완료되었고 외자(外資) 280만$, 내자(內資) 9억 원 선으로 연 건평 1,200평의 시험시설이 1978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지금 국내에서 사용하는 모든 발전용 핵연료와 해외 수출용도 일부 생산 공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기록하고 싶은 것은 차관사업에 투신했던 우리 젊은 과학기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다. 가족과 떨어져 열악한 BOQ 생활을 마다하지 않고 하루 3교대로 몸을 던져 일했다. 언어의 장벽,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기한 내에 완벽하게 준공을 시키고 그 방대한 기술 자료들을 모아 Data base를 구축했다. 다시 말해 완전한 기술 전수를 달성하여 곧이어 상업용 시설을 건설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 사업에 초창기 투신했던 기술 진영은 모두 20대, 30대 젊은 엘리트로서 내국인(內國人)이었음을 밝혀둔다. 이때 겨우 유치과학자의 필요성을 느끼고 하나둘씩 가뭄에 콩 나듯 돌아오기 시작하던 때이다. 안타까운 것은 가공시설 사업 책임자(Project Manager)는 완공 후에 얼마 안 있다가 암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지금 생각에 그 많은 스트레스에 희생된 것이 아닌가 안타깝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