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농축(高濃縮)우라늄의 유혹
1977년 초가을 동경에서 거주하던 나의 친구 안영식(安泳植)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핵연료개발과 관련된 문제인데 저명한 동경공대 교수 출신으로 신망과 학식이 훌륭한 분이고 이번 방한 때 한번 만나 주었으면 했다. 부언하기를 특히 친한파로서 한국이 냉전의 최전방에서 항상 고생을 많이 하고 있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고, 반공의 보루로서 일본이 안보상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는 말까지 하는 분으로 소개를 했다.
며칠 후 청진동의 삼공산업(三共産業) 사장이라는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본 S교수가 도착했는데 다음날 자기 집에서 저녁을 준비하겠으니 만나자는 전갈이었다. 혼자 가기는 좀 뭐해서 기술계의 한 분을 대동하고 가는 것이 옳을 것 같아 핵연료, 특히 「고속증식로」 FBR의 전문가인 조만(趙滿) 박사와 상의했더니 쾌히 동행을 수락했다.
조 박사는 가족관계로 일본과 연관이 있어 일본 사람 못지않게 일본어를 구사할 뿐 아니라 다년간 일본 원자력연구소에 교환 과학자로 가 있어 일본의 원자력 동향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예산투쟁 때 써먹었던 원자력의 일반상식을 교육해 준 선생님이기도 했다. 다음날, 삼공산업에 찾아갔더니 회사 건물과 붙어 있는 자택으로 안내를 해 주었다. 자그마한 키에 다부지게 생긴 60대 후반의 노 교수는 묵직한 검은테 안경 밑의 눈빛이 예리한 사람이었다.
만나러 오는 도중 여러 가지로 생각했다. 대충 나의 결론은 아마도 우리 연구 현황을 좀 알아보려는 일이겠지 했다. 그런데 삼공산업 사장의 소개 말씀을 들어보니 본인은 원자력에 관해 전혀 문외한이지만 S교수는 믿을 만한 분이고 한국을 돕겠다고 오셨으니 무슨 이야기든지 기탄없이 해 달라는 말과 우리 4인의 회동이므로 철저한 보안을 약속하다는 취지의 인사말이 있었다.
음식이 하나둘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S교수의 말씀은 다년간 자신이 개발, 축적한 신기술을 한국이 핵능력을 갖추는데 제공하겠으며 여생을 아낌없이 그 사업에 몰입하겠다는 과감한 제의였다. 우리 것을 좀 탐지해 보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어 보였고, 자기「Sale」만 고집해 나갔다.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기술 분야 이야기는 조 박사와 S교수 사이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어느덧 조 박사와 나는 화장실에서 잠시 만나 느낌을 주고받았는데 S교수의 정체는 진짜배기라는 결론이었다. 이제는 저렇게 열정을 가지고 우리를 돕겠다고 하는 저 노(老) 교수를 어떻게 정중히 거절해 보낼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일이었다. 교수의 기술은 종래의 화학적 변환방식에서 기계적 방식인 고속원심분리기를 이용한 고농축의 Process였다.
고가의 특수 「알미늄실린더」의 다중 연결로 어마어마한 전력이 소비되는 방식이다. 상당한 국고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수개월 전 우리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미국의 압력을 생각하니 아찔하였다. 깨끗이 거절하는 방향으로 마무리 지어야 하겠다는 의견일치가 나와 조 박사 사이에 이루어졌다. 정직한 것이 최고의 전략이라는 옛말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하였다.
‘인도의 핵실험 이후 국제적인 감시가 대단히 심화되고 지금도 우리를 범죄 집단으로 보는 미국의 일부 시각이 존재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국책사업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을 불가능하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약간 실망의 눈빛이었으나 곧 이해한다고 우리 입장을 헤아려 주었다. 삼공산업 사장도 ‘애국 한번 하려고 했는데 대단히 어려운 것이군요’ 했다.
그날 계속된 주연(酒宴)은 화기애애한 가운데 끝이 났고, 기분이 좋아진 사장님은 삼공산업의 특허상품인 낚시용 고무보트 그리고 실전용 방독면 등을 우리에게 선물로 들여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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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창기 원자력 개발의 주역들 / 중앙이 원자력연구소 소장 윤용구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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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Chung 선생과의 재회
정(鄭) 선생님은 정일권(丁一權) 총리와 친분이 두터워 자주 총리실에 출입을 했고, 박승복(朴承復) 수석과도 친해서 지나는 길에 우리 시정, 정무비서관실에 자주 들르곤 했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소탈해 우리 모두 그분을 좋아했다. 상하 격이 없고 한국말 반, 영어 반을 섞어가며 유머도 아주 재미있게 구사했다. 하와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경험한 장난꾸러기 행각을 코메디처럼 풀어놓으면 그것은 압권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망명 시절의 어려움 등을 정(鄭) 선생만큼 잘 아는 사람도 아마 드물 것이다.
총리실을 떠난 한참 후, 72년 초 어느 날 명동 거리에서 이(李) 박사 경무대(景武臺) 시절 의전비서관을 지냈던 박찬일(朴贊一) 씨와 같이 걸어오는 정 선생님을 만났다. 오랫동안 봉직했던 대한상공회의소 고문직도 이제 그만 두고 합판회사 성창기업(成昌企業)에서 박(朴) 비서와 소일을 하고 계신단다.
행색이 추레하게 보이고 좀 안쓰러웠다. 보호해 주던 손길이 없어져 버리고 누구 하나 돌봐주는 이 없는 이 노신사는 참 딱해 보였다. 신림동 어느 우각에 사는데 상공회의소 시절 여비서로 있던 분을 시집보내 그 집에서 얹혀 살고 있다고 했다.
이분을 어디 좀 소일할 수 있게 모실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 끝에 당시 내가 근무하던 KIST의 영문(英文)고문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 싶어 바로 KIST 소장 한상준(韓相俊) 박사에게 간청을 했다. 일주일에 사흘간 KIST가 선생의 실력을 활용하는 방안이 확정되어 연락을 했더니 눈물겹도록 고맙다고 했다.
나의 사무실에 모시고 KIST가 대외적으로 보내는 영문서한을 Review 받는데 선생님이 역할을 했다. 당시 KIST는 미국의 Battel Memorial 연구소의 복사판이었기 때문에 많은 영문 일거리가 있었고 선생님께는 적절한 보수를 드렸다.
그런 후 약 3개월 만에 내가 원자력연구소로 전근하면서 선생님의 거취 문제가 생기자 굳이 나를 따라 원자력연구소로 옮기겠다고 고집하신다. 나는 노인을 잘 모시고 또 말동무를 잘 해주는 장기가 있다. 문제는 KIST에 오신지 2~3개월 밖에 안 되어 주변에 친근한 사람이 없었다. 다만 원자력연구소는 출퇴근 거리가 멀어 노인께 고생이 될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원자력연구소의 윤(尹) 소장도 그 분을 환영해서 모시기로 했다. 일 년 육 개월 정도 그 먼 거리를 지하철과 버스로 일주일에 3일씩 오시는데 한 치의 착오가 없으셨다. 시간관념이 대단히 철저하고 약속이 정확했다.
내 사무실에 모시는 사이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 노동자 2세로서 하와이 이민 첫 아이로 태어났으며 고교, 대학 진학도 첫 번째이고 태평양전쟁 때 「힛컴」 군용비행장의 첫 번째 한인 근무자가 되었다는 등 많은 첫 번째의 가지고 계셨다. 미국의 1930년대 대공황 때는 뉴욕에 가서 가가호호 방문하며 후라이팬 장사를 했던 일들을 이야기할 때는 눈물도 글썽거렸다.
그리고 어떻게 네델란드계 백인처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아들 둘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 등. 큰 아들은 당시 화학 장교 중령으로서 화학부대 대대장으로 서독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둘째 아들은 자기를 닮아 키가 아주 작아 「발레」를 전공했고, 뉴욕에서 발레 선생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정이 깨진 것은, 자신이 이(李) 박사가 가 있는 한국에 들어와 조국에 어떠한 방법으로 봉사하고자 한 탓이라고 한다. 아버지 살아생전, 너는 해방되면 조선에 가서 건국에 이바지하는 것이 당부였고, 아버지는 한 푼의 저축도 없이 돈이 생기면 무조건 독립자금으로 이(李) 박사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신이 알기에 이(李) 박사는 평생 한 푼도 자신이 벌어서 써본 일이 없는 분이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이(李) 박사 주변을 맴돌며 살았고 「메신저」역할을 했다. 건국 직후 장면(張勉) 박사가 초대 주미대사로 왔을 때 선생은 잠시 미(美) 국회 로비스트로 활동하다, 양유찬(梁裕燦) 박사가 2대 대사로 부임하자 철수하고 하와이에 와 있었다.
귀국을 결심하고 부인을 설득하려 했으나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혼까지 하게 되고 곤경을 치르게 된다. 선생의 생각은 신생조국을 위해 봉사하려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새로 국적을 취득하는 것인데, 부인이 완강히 거부했고 귀국도 동의하지 않았다.
드디어 이혼이 성립되고 두 아들의 양육권은 부인 앞으로 결정되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울에 와서 정착하게 된다. 상공회의소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1947년부터 관여하기 시작했던 한국 「올림픽위원회」를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국고의 지원이 있을 수 없었다. 재미(在美) 사업가들의 도움으로 1948년 1월 스위스 휴양도시 「생모리츠」의 제5회 동계올림픽에 처음으로 선수 3명을 이끌고 통역 겸 총무로서 참가했다.
그리고 그해 6월 런던올림픽에도 참가해 김성집 씨의 올림픽 첫 메달을 따낸 쾌거를 이룩하는데 일조한다. 신생독립국 KOREA가 첫 선을 보인 이 두 경기에서의 감격을 이야기할 때, 이 노신사의 흥분은 절정에 달한다. 내가 군(軍)에 있을 때 느껴본 일이지만, 대부분의 고급장교나 장성들은 일군(日軍), 만군(滿軍) 그리고 중국군 또는 광복군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군, 광복군 출신들과 사적으로 대화해 보면 조국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다. 언제나 무한한 애국심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보병학교 교장 유해준(兪海俊) 장군 그리고 김준엽(金俊燁) 총장 같은 분과의 접촉을 통해 항상 느낀 바이다.
이와 같이 Walter Chung 선생께서도 어릴 적부터의 나라사랑이란 기조가 확실히 DNA화 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라 일이라면 무조건 앞장서는 분이었다. 이상백(李相伯) 씨 등을 IOC위원으로 등극시킨 일화 그리고 1948년의 런던올림픽부터 시작하여 많은 국제경기에 참여해 한국 체육의 국제적 위상을 세우는데 확실하게 기초를 닦은 분이 바로 Chung 선생님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말년에 선생에게 우리가 보여준 보답은 너무 미미했고 죄송하기까지 했다. 항상 “나는 영일(迎日) 정씨올시다.” 하시던 첫마디 인사말씀이 인상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