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3월 600,000Kw짜리 고리 1호기가 성공적으로 100% 출력 시험에 성공하면서 크게 고무되었다. 곧이어 4월에는 고리 3,4호기 공급계약을 Westing house와, AE는 Bechtel과 체결하였고, 한국전력의 강력한 요청으로 KNE와 Bechtel은 처음으로 하도급 계약을 협상하게 되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참여를 원했으나 사실상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약 1,000M/Months 정도를 KNE에 할애해서 AE가 무엇인지 Over view 할 수 있도록 사전 협의가 된 모양이었다.
나의 상대는 Bechtel사의 해외담당부사장 Jack Dam이었다. 중동을 위시한 동북아의 현장을 두루 누빈 백전노장인 Jack은 처음부터 연구소 측에 접근도 하기 싫어했다. 연락이 되어 연구소로 안내하겠다고 했더니 본사와의 연락관계 등을 이유로 자기가 투숙하고 있는 Plaza Hotel을 고집했다. 한국전력이 갑(甲)이요, Bechtel이 을(乙)이고 우리 KNE는 병(丙)의 위치인 만큼 우리 입맛대로 할 수 없는 묘한 처지였다.
KNE 측에서 영문계약담당 권이영(權彛泳) 과장, 현대건설에서 해외사업에 많이 참여했던 정(鄭) 상무(KNE에 입소함) 그리고 나, 이렇게 3인이 1조가 되어서 Jack과 대결하였다. Jack은 노련했다. Bechtel은 「유태」계 기업답게 계약 내용을 쫀쫀하게 따져 들어갔다. 자기네한테 좀 불리하면 장광설을 늘어놓고, 아주 코너에 몰리면 본사의 법무실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오늘밤 연락해서 내일 통보하겠다, 등등 잘도 피해 갔다.
핵심은 가능한 한 참여인원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 요원이 파견되었을 때의 참여도와 기술자료 접근 등에 관한 문제였다. 2일간의 Hard nego 끝에 1,050M/M으로 정했다. KNE 참여 기술진은 O.J.T.(On the Job Traing) 개념 보다는 O.J.P.(On the Job Participation)라는 신개념으로 설계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훈련을 받는 다목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약 3개월 후, 나는 미국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미국 AE 회사 순회(巡廻)와 윤 소장이 유치해 두었던 EBASCO의 문인보(文仁潽 : KNE 기술담당 부소장으로 일시 근무함) 씨를 접촉하고, Sargent and Lundy의 한국인 기술진을 면담하기 위해 Chicago에 들렀다. 모두 고국에 돌아가 일하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가족을 설득하는 문제 그리고 과연 한국이 지속적으로 원자력을 해 나가겠느냐는 의문 등, 그들이 결단을 내리는데 많은 제한요소가 있었다.
S. and L.에 들른 김에 해외담당 부사장을 만나 한국에 진출할 의사를 타진했다. 일언지하에 「No」했고, 지금은 미(美) 국내 프로젝트만으로도 Over load 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매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No」는 영원한 것이 되지 못했다. S. and L.은 불과 4~5년 후 영광 3,4호기의 하청으로 KOPEC을 도우는 신세가 되었는데, 누가 감히 그 운명을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조금 후 Three Mile Island 사고 때문에 미국의 원전시장(原電市場)이 폭삭하는 바람에 생존을 위해 한국에 진출했던 것이다.
이번 출장의 최종 목적은 L.A.의 ANAHEIM시(市)에 있는 Bechtel 본사를 방문하는 일이었다. 지난번 정식 서명한 계약서에 최종 Initial해서 쌍방이 교환하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일요일 오후 L.A. 공항에 도착, Bus-terminal에 간 시간은 2:30 정도였는데 막차가 2시에 떠났고, 내일 아침 8:00에 첫차가 있다는 이야기다. 난감했다. 택시는 없고 리무진을 불러 ANAHEIM까지 60여 Km를 가는데 100~150$ 할 거라는 버스회사 직원의 이야기다. 근방의 호텔에서 자고 내일 아침 오라는 친절함까지 곁들인다. 모두 흑인 아저씨들이었다.
리무진 택시 차비는 당시 한국국영기업 부사장의 일당 약 40$로는 감당하기 힘든 액수였다. 좀 망설이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키 큰 호인형의 흑인 친구가 ‘자기가 퇴근길인데 그 방향으로 가니 15$ 주면 예약된 호텔인 Saddle Back까지 데려다 주겠다’ 는 제의를 한다. 세상에, 너무나 고마웠다.
한참을 가는데 여기저기 불타고 부서진 건물이 즐비한 도시를 지나가게 되었다. 얼마 전 L.A. 흑인폭동의 진원지인 South Gate와 Downey라고 하는데 아직도 복구되지 않고 어수선했다. 가뜩이나 초면의 운전자도 불안한데 폭동지역을 지난다고 하니 더욱 오싹한 기분이었다. 운전자와 자꾸만 대화를 이끌어 가는데 Bus-terminal에서 수리공으로 일한지 10여 년이 지났고 가족으로 부인과 아이들 셋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직장도 확실하고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다하는 온전한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퍽 놓였다.
약 한 시간 후 ANAHEIM 교외에 있는 대표적 California Motel인 Saddle Back Inn에 도착했다. 운전수는 짐까지 Front에 들어다 주며 친절을 베푼다. 약속한 15$에 팁 5$을 더해서 건네주니 “Thank you, sir”를 연발한다. 옥외 수영장까지 갖춘 Palm Spring형 「리조트」로 가격에 비해 아주 좋은 숙박시설이었다.
다음날 아침, Bechtel에서 Pick up이 있었고 Jack Dam과 기술 분야 총책임자인 중국 2세 Steve Leong이 나와서 영접해 주었다. 회의실에서 Bechtel 법무실 변호사 2명의 입회하에 계약서 각 페이지에 「Initial」하는 절차가 끝나고 나서 Full course의 미국 정찬(正餐)에 초대되었다.
Mr. Leong은 Canada 철도건설노동자의 2세로서 수학에 각별한 재능이 있어 Bechtel에 입사 30년을 A-E 기술개발에 종사한 사람이다. 회사의 모든 Manual 그리고 Technical Paper을 보면 거의 다 Reviewed by 또는 Produced by S. Leong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Bechtel 기술 축적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훤칠한 키에 깐깐하면서도 「역지사지」를 아는 아량도 있었고, 그의 동양인에 대한 무언의 호감은 언제나 친근감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많은 공헌을 했지만 기술본부장으로 예편했는데 그 흔한 사업책임자(Project Manager), 또는 사업개발 부소장 한 자리를 하지 못했다. 「앤 휴렛」 CWLP 소장의 설파대로, 모범적인 소수인종으로 불리는 아시아인들이 자신들에 대한 편견과 문화적 고정관념 때문에 Bamboo Ceiling, 즉 죽(竹)의 천정을 뚫지 못한 좋은 사례이다.
Bechtel과 같은 세계적 거대 기업의 대외 얼굴로는 백인이라야만 생산적이라는 관례가 그때 당시에는 뿌리 깊었다. 이러한 한계를 잘 아는 영리한 Mr. Leong은 돈만 생기면 L.A. 변두리 개발지역의 땅에 무조건 투자를 해서 후에 L.A. 중국인 백만장자 반열에 진입하기도 했다. 따라서 여느 Bechtel 간부보다 부자였다. 초기 우리 KNE 기술진이 파견되었을 때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한국전력은 고리 3, 4호기 계약을 하면서 절묘한 방법을 택했다. Turn key와 국산화 주도 단계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병법에서 말하는 「적을 분산 그리고 공격하는 방식」을 취했다. 즉 원자로는 미국 Westinghouse, 터빈 및 발전 설비는 영국의 GEC사에 그리고 A/E는 미국의 Bechtel에 각각 분산 계약함으로써 가격의 저렴은 물론이고 계약의 분산 관리로 주 계약자인 한국전력이 훨씬 다루기 좋은 입지를 확보하고, 중간 Cordination 관계는 A/E 사인 Bechtel에 책임을 부과함으로써 관리가 아주 용이하게 System을 마련했다.
이러한 체계는 경영의 달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김영준 사장의 주도하에, 한국전력 경영엘리트들의 「스크럼」으로 가능했다고 본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역시 우수한 엘리트 집단이 발전하고 장수한다는 것을,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 우수한 학생들의 진로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첫째 고등고시를 통한 관료로의 진출, 생활이 보장되는 은행원, 의사 그리고 공대 전기과, 기계과를 나온 우수한 학생들은 전력계통으로 진출하는 길이 있었다. 물론 경쟁은 매우 심했고, 경쟁만큼 우수 집단의 발전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러한 우수한 분야는 지금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실력을 겸비하고 있으며 국제경쟁력에서 일류를 달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