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가, 김녕(金寧) 김(金)의 내력 (138회)
  제18장 나의 집안과 친가

내가 태어날 때 아버님은 일본 동경(東京) 유학시절이었다. 넉넉한 학비 덕택으로 겨울방학에는 설국(雪國)으로 「스키」를 타러 가시고, 여름방학에는 가나가와현(神奈縣)의 「에노시마」에 「캠핑」을 가시느라 집에는 봄방학 때 잠깐 들르시는 정도였다고 한다. 

어머님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만주 북간도 망명에서 귀환해 아직도 가계가 복구되지 않아 친정에 가서 해산할 수도 없었던 처지였다. 서방님 없는 대가(大家)의 시집살이가 얼마나 고달팠을까. 해산의 그 고통도 혼자서 이겨내야만 하셨을 것이다.

아버님의 늦은 귀국으로 나의 호적상의 생년월일은 이듬해인 1933년 3월 30일로 되었다. 당시 유아 사망률이 높아 100일 지난 후에 출생신고를 하는 예가 많았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봄방학에 아버님이 어머님 곁으로 겨우 돌아오는 때를 맞춰 호적에 등재한 것으로 보인다.

백모님 생존 시에 가끔 우리에게 “너의 아버지는 참 자상하고 인정이 많았다.” 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인즉 백모님이 임신하고 계실 때 밤에 살며시 문을 열고 귤(밀감) 몇 개를 방에다 밀어 넣고 살짝 사라지는데 “보면 너의 아버지였어.” 하시면서 항상 고마운 마음을 우리에게 표시하시곤 했다. 이렇게 자상하신 우리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가혹하리 만큼 무심하고 쌀쌀하시기까지 하셨던 모양이다. 당시 가장(家長)의 모습이 그러했으리라 생각한다. 

김녕 김(金寧 金)

김 씨는 우리나라 성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대(大)성이다. 문헌상으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623본(本),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는 120본(本)으로 나와 있으나 시조가 뚜렷이 밝혀진 것은 100여본(本)이다. 

김 씨는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 계통과 신라(新羅)의 알지(閼智) 계통으로 대별되며, 현존하는 거의 모든 김 씨가 이 두 계통 중 어느 한쪽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단 임진왜란 때 왜병의 좌선봉장이었던 「사야카」가 귀화하여 우록(友鹿) 김 씨의 일가를 이룸).

신라 김 씨의 원조(遠祖) 김알지는 AD 65년(탈해왕 9년) 3월 금성(경주) 서쪽 시림(始林) 숲속 나뭇가지에 달려있던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 탈해왕은 「하늘이 내려준 아들」이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 씨로 사성(賜姓)하였다. 또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 이름으로 삼았고 이를 삼국유사 권 제1 신라본기(新羅本紀)에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김녕 김씨는 신라 김(金)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은열(殷說 : 大安君)의 8세손이며 동정공 봉기(同正公 鳳麒)의 아들이다.

고려 인조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여 일천 호(戶)의 식읍을 하사 받고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다.

금주(金州)에 김녕대도호부(金寧大都護府)가 설치되므로 자손들이 본관(本貫)을 김녕(金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고려 말 지명을 김해로 바꾸면서 관향(貫鄕)을 김해(金海)로 하였다. 그러나 수로계(首露계)가 김해 김씨와 혼돈되어 선김(先金 : 김해 김씨), 후김(後金 : 김녕 김씨)으로 칭하다가 조선 고종 2년에 왕명으로 본관을 김녕으로 다시 환원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고려말기에서 이조초기에 긍하여 무관(武官)이 많았고, 세조 때 시해된, 북방 6진을 개척한 김종서(金宗瑞) 장군을 끝으로 무골(無骨)이 끊어지나 했더니, 임진왜란에 와서 장졸(將卒) 간에 많은 무사를 배출한 것을 볼 수 있다.

   
▲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 영정 [출처 ; 행정자치부 지정 정보화 마을]    
문관(文官)으로서 대표 격인 분은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 할아버지시다. 1399년(정종 1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지금도 김녕들이 근방에 많이 살고 있음)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관(觀)의 아들로 태어나 강직하고 효행이 뛰어났으며, 세종 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많은 관직에 있었으며, 태종실록을 편찬했다. 

공조,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그러나 세조 때 내외종(內外從)간이었던 박팽년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아들인 영월 현감 현석(玄錫)과 함께 순절했다.

백촌(白村) 할아버지에 대하여 사육신과 관련, 학계의 논란과, 본관이 다른 김씨 측에서의 법정소송은 1820년(순조20년)에 시작되어 약 200년 동안 계속 되어 오면서 김녕 우리 후손들의 끈기 있는 노력으로 1985년 11월 12일 대법원의 최종 판결로 일단락 지었다.

사육신 가운데 맨 뒤에 국문당하고 순절하는 바람에 사육신에 제외되었으나 고증과 소(訴)를 통하여 바로잡게 된 것이다. 일부에서 대법원 판결 때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우리 일가 김재규(金載圭) 씨가 작전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근거가 없고, 학계의 고증과 대법원의 권위로 보아 압력의 산물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안다. 

돈녕공 취구파(敦寧公 就九派)

돈녕공파(敦寧公派)는 김녕 계보에서 장손(長孫)에 해당한다. 김녕군 시흥(金寧君 時興)으로부터 二世 향(珦)→三世 극세(克稅)→四世 중원(重源)→五世 貴甲(귀갑)→六世 정병(挺丙)→七世 윤달(潤達)→八世 석련(碩鍊)→九世 운(운)→十世 준(遵)→십일세 근(瑾)→十二世 원경(元慶)→十三世 구룡(九龍)→十四世 경식(敬軾)→十五世 련(練)→十六世 언중(언중)→十八世 두상(斗尙)→十九世 취구(就九)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파(派)를 형성하여 취구파(就九派)로 독립하였다. 취구파(就九派)는 우리 아버님 주(周) 항렬로부터 8대조(代祖)에 해당한다.

6대조 명곤(命坤) 할아버지는 지금의 산청(山淸)과 진양(晉陽) 경계에 있는 자실(慈室)에서 태어나 글 읽기를 좋아하셨고, 후에 「도참설」에 빠져 명당을 찾아 나서게 된다. 발복(發福)의 원천은 ‘자리’에 있다는 신념을 가지시고 삼남(三南) 일대를 뒤지다가 고성 거류면 신룡리 사탕산(固城 巨流面 新龍里 四湯山) 묘좌(卯座)를 택하여 8대조 취구(就九) 할아버지를 모시게 되었다. 곧이어 고성 산삼면 미곡기 백학동(固城 三山面 米谷里 白鶴洞)에 8대조 할머니(김해 김)를 모시게 된다.

가뜩이나 어려웠던 살림살이에서 명당 얻는데 모두 탕진하고 나니 무일푼이 되고 고향을 떠나는 비운을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묘역 근처의 진주 강(姜)씨 집성촌에서 마을의 기운을 차단했다는 이유로 들고 일어나자 몸을 피할 수밖에 없어 식솔을 데리고 명곤(命坤) 할아버지는 정처 없이 길을 나선다.

결국 광양만 골약(骨若) 성황당 근처(지금의 광양제철)의 어촌마을에 상륙하고 헛간을 빌어 한기를 피하는 신세가 된다. 우연치 않게 집 안주인의 오라버니 되는 분이 광양현의 이방(吏房)이었고, ‘경상도에서 한학자(漢學者) 한 분이 와서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 둘을 부탁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시골 서당이 개설되고 교습법이 좋았던지 몇 년 후에는 현감이 있는 읍으로 진출하면서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곤(命坤) 할아버지의 배(配) 해주 오씨(海州 吳氏)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또다시 명당으로 확신하시는 고성 거류면 신용리 선산에 모시게 되고, 이때부터 다시 강(姜) 씨들과 본격적으로 분쟁이 격화되었다.

(1952년 여름, 한발(旱魃)이 심해지자 강(姜) 씨 집성촌의 젊은이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 묘를 다시 파헤치기 시작했고, 이에 놀란 마을의 우리 선산 관리인이 급히 연락해 왔다. 당시 경남도경 사찰과장으로 계시던 정주(廷周) 숙부님이 부랴부랴 고성 서장에게 연락, 모조리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사태를 수습한 바 있다. 지금은 쌍방이 모두 이해하고 관계가 수습되었다.) 

이제 광양의 서당 주인이 된 명곤(命坤) 할아버지는 광양에 김녕의 취구파(就九派)를 창립하셨다. 아들 창화(昌華 : 나의 5대조) 한 분을 독자로 보게 되었는데 창화 할아버지는 사남(四男)을 둠으로서 일거에 가세를 확장하게 된다. 전답과 농원을 장만하여 아들 사형제를 잘 키워냈다. 그리고 네 아들 중 장남인 종혁(宗奕)은 광양뿐 아니라 이웃 대군(大郡)인 순천(주로 해룡면)으로까지 부(富)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그 재산을 결국 광서(光緖) 18년(1892년) 종2품인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이르게 하였다. 사형제가 모은 재산도 만만치 않아 고성(固城)의 선산(先山) 시제(時祭) 참배 때는 인마(人馬)가 십리(十里)에 늘어섰다는 어릴 적 구전(口傳)을 나는 들은 바 있다. 아마도 이런 세(勢)의 과시는 강씨 집성촌에 대한 시위였으리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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