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_1 (141회)
  제18장 나의 집안과 친가

할아버님은 결혼 후 가정생활 70여 년 동안 세분의 할머니, 앞의 두 부인에게서 10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탄생시키고 키웠다. 일곱째 아들 기주(淇周)는 돌을 넘기지 못하고 당시 초봄에 유행했던 홍역으로 잃었다. 나머지 아들 9명과 딸 3명은 모두 장성했다.

첫 부인 차지방(車芝方, 1871년 4월 13일생)에게서 아들 3, 딸 2, 계 5명, 둘째 부인 박본안(朴本安, 1891년 12월 3일생) 할머니에게서 아들 6명, 딸 2명이 태어났고, 조부님이 환갑을 넘겨서 들어오신 셋째 할머니 황복술(黃卜述, 1903년 8월 7일생)님은 자식이 없어 여덟째 규주(圭周) 삼촌이 모시다 돌아가셨다.

재산이 축적되고 사회적 인지도가 높아질수록 할아버지는 세력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신 것 같다. 많은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것이 가세를 확장하는 방법이라고 인식하신 것이다. 특히 나이도 젊고 미모도 갖추었던 둘째 할머니 박씨(애칭으로 돔태기: 진월면 섬진강 강가 마을: 할머니라고 불렀음)와는 금슬이 좋아 결혼생활 20여 년 동안에 10명의 자녀를 거의 연년생으로 낳아 키우셨고, 모두 체격이 좋고 미남, 미녀들이다.
 
장녀 : 정순(貞巡, 180년생, 하동 악양 김인태에 출가-농업)
장남 : 현주(鉉周, 1900년生~1950년卒, 자 원예(園藝), 중동학원수학(中東學院修學), 문묘직원(文廟直員)
차녀 : 우순(又巡, 1904년生, 광양 진월면 진목(眞木), 안성선(교육장 역임)에 출가)
차남 : 선주(善周, 1909년生~1975년卒, 자 청제(淸齊), 일본중앙대학 법학부, 체신청장, 국회의원, 체성회장)

3남 : 희주(禧周, 1912년生~1983년卒, 일본중앙대학 법학부, 철도국장(순천, 부산, 서울 철도국))
4남 : 옥주(沃周, 1915년生~1988년卒,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 제헌국회의원)
5남 : 계주(桂周, 1916년生~1950년卒 추정-납북, 일본중앙대학 법학부, 미군정 시절 경찰전문학교 교무과장 겸 교수, 감찰관)
3녀 : 금순(錦巡, 1918년生~1943년卒, 순천 윤순호(총독부 관리)에 출가: 딸 하나(윤희래)를 둠.

4녀 : 영순(永巡, 1920년生~2011년卒, 하동 화개 용강 강만원(철도역장)에 출가)
6남 : 정주(廷周, 1922년生~2004년卒, 일본중앙대학 법과, 충남경찰국장, 한국전화부공사 사장)
7남 : 범주(泛周 : 1928년生~2011년卒,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자영업)
8남 : 규주(圭周 : 1930년生, 양정고졸, 과수농업 경영)
9남 : 행주(行周 : 1933년生,~1995년卒, 양정고졸, 농업)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식들을 하나같이 관직 위주로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결과는 뿌리 깊은 ‘관(官)의 괄시와 박해’에서 연유되었다고 본다. 무질서와 치안의 공백이 절정에 이르렀던 구한말에 사셨던 당신은 권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재물도 당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보호막이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 변변치 않아 한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둘째 아들 선주(善周-우리 아버님)가 동경의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을 하게 되셨다. 대학 때 특별히 사랑을 받았던 민법 교수(중앙대학의 유명한 법학 계열 교수들은 대부분 동경제국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정년이 되면 사립대인 중앙대에 와서 강의를 했고, 그 중 고등문관시험 출제위원출신들이 많아 중대 법학과 출신들이 사법시험에서 동경제대 다음으로 많이 합격했음)의 추천서를 얻어 경성의 식산은행(지금의 산업은행)에 제출했다. 민법 교수의 동경제대 동기였던 은행의 총재는 아버님을 면접하고 즉시 채용을 허락했다.

당시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가시기 전이라 취직이 대단히 어려웠고 동경제대 출신들도 채소 「리어카」를 끌며 생계를 유지한다는 말까지 돌았던 때인지라 식산은행에의 취직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의기양양한 아버님은 신고 차 고향에 내려와 할아버지께 고했던 모양이다. 듣고 계시던 조부님이 질문을 하나 하신 것이다.

“야야, 은행이라는 게 돈놀이하는 데가 아이가?”
“예, 그렇습니다.”
“그래, 내가 돈은 좀 있다. 권리(權利)를 해라!”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관리가 되라는 한 마디에 그 귀한 은행 취직이 무산되고,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여 전라남도 산업과의 판임관(判任官, 지금의 주사-主事 급 정도)으로 사회에 출발하는 촌극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 전부를 권리(權利)로 키우는 것은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 따라서 첫째 부인과의 자식 둘만 대학에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중등학교 정도 졸업시켜 하급관리, 즉 군(郡)직원 또는 소학교 교사 정도로 끝냈으면 하는 것이 조부님의 생각이었고, 이에 양보가 없었다. 그런데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둘째 할머니의 아들 4남 옥주(沃周), 5남 계주(桂周)가 양정고보를 우수한 성적으로 같은 해 졸업(연년생이었음)을 하고 일본 와세다大와 중앙大 예과에 각각 원서를 제출해 놓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할아버님이 일언지하에 Veto를 놓으시고, 절대로 학비를 대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둘이는 할아버지께 밤새 머리를 조아리고, 울고불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안채 할머니 방 골방에서 단식 농성이 시작되었다.

단식한지 3일째 되니까 옥주(沃周) 숙부는 야밤에 할머니가 들여놓은 음식을 챙겨 먹기 시작했으나 계주(桂周) 숙부는 식음을 완전히 거절하고 죽겠다고 버티니 야단이 난 것이다. 각별히 사이가 좋았던 할머니가 “영감, 애들 죽이겠소. 좀 살려 주소.” 애소를 거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남의 이야기는 잘 듣지 않고, 믿지도 않는 괴팍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당신 주변에 딱 세 사람의 이야기는 좀 듣는 편이였다. 첫째는 큰 아들 현주(鉉周), 두 번째는 학자이신 할아버지의 「멘토」 상묵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집 모든 재산의 관리를 맡은 양(梁日萬 선생-성인 같은 분이셨음) 장로님, 세 분 밖에 없었다.

이 세 분이 번갈아 가면서 말씀을 드리고 끝으로 장남인 현주(鉉周) 백부님이 가셔서 “아버님, 돈 때문이라면 제가 책임지고 벌어서 대겠습니다. 둘째 어머니 자식을 괄시하시면 후에 집안에 크게 우환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간곡하게 말씀 드린 결과로 10여 일만에 풀리고 말았다. 모두 「윈 윈」한 결과가 되었고 백부님은 정말로 열심히 무역도 하고 해서 가산을 불려 동생들이 원하는 만큼 제한 없이 공부를 시켰다.

계주(桂周) 삼촌은 정말 위기일발에서 구출되었고, 그 성격을 우리들은 잘 아는지라 그 후 6.25 사변 때 북으로 끌려가면서 그 꼬장꼬장한 성격에 아마 혀를 물고라도 자결을 했을 것으로 우리들은 짐작한다.

삼촌은 이(李) 대통령의 일방적인 친일, 유학파 편중의 인사(人事)에 반발했다. 조병옥 선생을 Boss로 모셨던 당신은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사표를 내고 사변이 터졌을 때에는 휴직으로 소일하고 있다가 납북되었던 것이다. 강직하고 패기가 있는 분이었는데 우리 집안으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대학 때 공부도 제일 많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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