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숙부의 효도 (152회)
  제19장 나의 집안과 외가

효도(孝道)

서운(棲雲)의 생의 덕목 제일은 무어니 해도 「孝」다. 효의 가치는 그의 일생을 지배했다. 북간도 망명지에서 조부님의 임종을 지켜보던 서운(棲雲)은 지체 없이 당신의 약지를 깨뜨려 마지막 숨을 되돌리려는 시도를 서슴없이 했다. 문드러진 그 손가락의 상처는, 우리들에게는 만년의 훈장처럼 보여졌다. 

하나 남은 오른손의 약지는 아버님 몫으로 잘 보존하고 있었는데 서운(棲雲)이 고향에 내려와 있는 사이에 아버님이 운명하시는 바람에 드리지를 못해 항상 안타까워 하셨다. 그러나 어머님께 마지막으로 드리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는데, 어머님이 언니의 병구완을 위해 외지에 가셨다가 거기서 돌아가셔서 그만 영구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마차로 운구해 돌아온 어머니의 시신을 부여잡고 당신의 「효도」를 이루지 못한 한을 피눈물로 토해내는 장면을 나는 어릴 적 목격한 바 있다.

북간도에서부터 삼천리 먼 길을 조부, 친부의 유골과 시신을 운구해 와서는 명당이 물색되기 전까지 가매장해 놓고 생식을 하며 만 2년을 꼬박 시묘(侍墓)를 강행한 일 그리고 전국의 유명하다는 지관, 풍수, 도사들을 불러 명당을 골라 90여 차례에 걸쳐 조상의 묘지를 이장했던 일은 좀 무모하리 만큼 그 효심에 집착했다.

조부는 망명 중 1924년 8월 21일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고, 친부는 2년 후인 1926년 2월 20일 44세의 아까운 나이에 돌아가셨다. 기별을 받은 서운(棲雲)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동하여 3일 만에 북간도 집에 당도했다. 이모 점효(点孝)의 증언에 의하면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던지 서운(棲雲)은 체력이 소진된 상태로 코피를 펑펑 쏟으며 기절 상태에 도달해서 또 하나의 초상이 날뻔 했다고 말했다.

가족회의 끝에 부친의 시신과 조부의 유골을 고향으로 운구하고 모든 가족이 함께 동행하도록 결정을 봤다. 우선 아연철판으로 관을 두 개 제작하여 아래는 아버지 시신을, 위에는 조부님의 유골을 올려서 한 묶음으로 만들어 운구하기 편하게 단속을 했다. 이런 모든 절차의 진행은 현지 친지들과 특히 가깝게 지내게 된 인근 만주 부호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우선 마차, 화물차 등을 이용하여 며칠을 걸려 청진까지 나올 수 있었다. 경원선을 타기 위해서는 원산까지 해로(海路)를 따라 배로 가야 하는데, 시신을 배에는 실어주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부두 앞에 여관을 정하고, 원산 가는 기선을 찾는 중인데 대단히 구하기가 힘들었다. 조선인 선장들은 손사래를 치면서 원칙을 어기면 목이 달아난다고 한사코 거절했다. 이해는 충분히 갔다. 왜냐하면 항해 중 사망자가 생기면 수장(水葬)을 하는 것이 선상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원산으로 가는 기선의 일본인 선장이 그 여관에 묵고 있었는데 딱한 사정을 잘 이해한 여관주인이 선장과 교섭을 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뒤에 서 있던 서운(棲雲) 선생, 급한 나머지 “살려 구다사이” 하니, 간절한 효심어린 애소에 마음이 동했던지 일본인 선장이 무슨 방법을 강구해 보자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바짝 매달렸다.

다음날 방법이 나왔다. 가족은 부두에서 모두 승선하고, 시신은 전속선에 실어 부두 밖 해상에 기다리고 있다가 기선이 오면 올려 싣는 것으로 합의를 봤고, 그 방법으로 무사히 원산까지 올 수 있었다. 원산에서 그 무렵 개통된 경원선 화물칸에 싣고 하루 걸려 경성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김 대감 댁에서 제물(祭物) 등을 준비하여 경성 화물역에서 노제(路祭)까지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모모한 애국지사들이 많이 노제에 참석했다고 한다. 경부선에 실려 근래에 개통된 철도로 진주까지 당도해서 인근의 친지, 애국지사 그리고 조부님의 처가 박(朴)씨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 외숙모님(앞 중앙), 어머님(뒷줄 좌 셋째) (1940년경)

자동차로 하동 섬진강 나루에 도착하니 하동사람, 광양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더란다. 비촌에서 만들어 온 상여에 정식으로 관을 얹고 상여꾼들의 구성진 상여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운구행렬이 비촌으로 향했다. 이렇게 두 애국지사는 20여년 만에 시신으로 환국하게 되었다.

「살려 구다사이」, 서운(棲雲)의 특허 명문은 또 한번 위력을 발휘한 바 있다. 우리 아버님이 황씨 집안에 장가들어 중학교 5학년 시절 방학 때 비촌 처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마침 외숙인 서운(棲雲)과 동행하게 되었다. 

비촌을 가려면 경찰주재소 앞을 지나게 되었다. 주재소를 힐끗 쳐다보니 황씨 문중의 항일 반골인 당숙 한 분이 주재소 기둥에 묶여 있더란다. 그냥 두고 지나치기 난감해서 무슨 사연인가 좀 알아보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일본인 경관을 아버님이 만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숙이 마을 사람들에게 세금을 내지 말도록 선동을 했다는 것이다. 누가 고자질을 했는지 조사 중에 있었다. 

아버님은 유창한 일본말로 자신을 소개하고 모처럼 처가를 방문하는데 문중의 어른이 이렇게 결박을 당하고 있으니 그냥 가기 난처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당신이 보증하겠으니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간절히 말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서운선생이 「살려 구다사이」 라고 소리를 질러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때도 「살려 구다사이」 가 효력을 발휘하여 그 당숙은 방면되었고, 같이 비촌으로 돌아올 수 있어 체면을 세웠다고 한다.

서운(棲雲)의 효심은 당신의 가치(價値) 실현을 위해서는 큰 뜻이 있었지만 가족 특히 부인에게는 막대한 평생의 중압(重壓)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서 부인, 즉 나의 외숙모님에 관해 좀 이야기를 하고 외가 편을 마무리할까 한다.
 
외숙모 경주 정(鄭)씨

큰 외숙모는 현대 산업사회에 일찌감치 눈을 뜨고 농사보다는 제조, 가공 등의 분야에 희망을 두고 사업을 개척한 가문에서 장녀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성장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글을 깨치고 많은 독서를 통해 신문물을 이해하는 개화여성이었다. 박식하고 대화에 조리가 있었고, 핵심을 찌르는 Analogy(비유)를 잘 구사한 분이었다.

두둑한 인심에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끓었고, 도우미(찬모들, 애기보는 심부름 아이들)들은 한번 들어오면 결혼, 출가 때까지 외숙모와 함께 했다. 나의 외숙모는 통 말수가 적고, 성녀(聖女) 같은 풍모의 단아한 분이었고 고부간의 관계도 각별했다. 외할머님도 아들의 가부장적 독선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며느리를 은연 중 감싸고 위로했다.

외숙모는 일찌감치 친모를 잃어 외로웠던 당신의 과거를 생각해서 시모를 친어머니처럼 모셨다. 올케들에게도 잘 했다. 나의 어머니 금효(金孝)와는 나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바로 밑의 동생 정도여서 두 분은 정이 두터웠다. 우리 어머님이 북간도 생활을 접고 결혼 때문에 일찌감치 고향에 내려와 같이 생활했던 터라 두 분의 이해가 각별했다.

우리 어머님의 시집생활이 고단한 것을 알고, 나와 진규(秦圭) 형님을 2개월씩 번갈아가며 외가에 보내져 키웠는데, 조카라는 개념보다는 또 하나의 아들 개념으로 우리를 보살폈다. 특히 나의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시자, 기회만 되면 외가로 쫓아가는 버릇은 어머니 같은 포근한 외숙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숙부의 사업활동 (151회)
  외숙모 정씨와 비촌황씨 에필로그 (15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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