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별세(別世) (159회)
  제20장 나의 성장기1

신시(新市) 장날이면 나는 신이 났다. 어머니를 따라 장 구경을 가고, 거지에게 어머니가 돈 한 푼씩을 주는 것도 좋아 보였다. 과자, 붕어빵의 잔치를 즐기는 날이기도 했다. 

특히 사람을 좋아했던 나는 웃골 외갓집 식구들이 대거 내려오는 것을 좋아했고, 그들은 우리 집에 들를 때면 무엇이든지 들고 왔다. 떡, 약식, 단술 등 먹거리도 지참하지만 산나물, 밤, 대추 등을 가져오는 친척이 있어 즐거웠고, 외갓집 식구들이 오면 우리 어머니가 특히 반기고 싱글벙글 좋아했다.

나는 학교도 재미있었고, 집에 돌아와 책보를 놓기 바쁘게 뛰어나와 친구와 어울려 산으로 들로 그리고 특히 수어천 강가를 한없이 달리고 달리며 놀았다. 강아지는 항상 내 곁에 있었다. 강아지 데리고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니는 기분이란 도시인은 감히 상상도 못하리라.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따뜻한 어머니 품이 있었다. 그리고 흡족하게 즐길 수 있는 먹을거리도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어릴 때 피부가 꽤 예민했다. 여름에 옻나무에 접촉하면 한 철에 두 번 정도 옻으로 고생했고, 가끔 얼굴, 목 등에 흰 버짐이 끼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갱엿을 가지고 와 나를 무릎에 눕히시더니 엿을 버짐에다 대고 꼭꼭 찍어서는 냉큼 어머니 입에다 넣으시는 것이다. 내가 놀래서 “엄마, 더러워.” 하니까 “괜찮아, 우리 시끼 괴롭히는 버짐, 내가 다 씹어 먹어야지.” 라며 꿀꺽 삼켰다. 

그것이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그런데 뒤이어 이상한 한 마디를 하시는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이놈, 재작(장난)이 심한데 어느 계모가 좋다 할꼬.” 하는 것이다. “왜, 엄마 죽어?” 하고 반문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예감이 있었는지 죽음에 대한 말을 하시기에 좀 이상했다.

여하튼 모든 것은 안정됐고,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아버지의 은근한 시집살이도 어머니에게 옛 이야기가 되어 갔다. 외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가끔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이 불거져 나오기는 했지만 악의가 묻어 있는 것 같지는 아니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점점 쇠약해가는 것을 우리는 느꼈다. 외가에서 한약 약재가 운반되고 약 끓이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리고 급기야 순천 도립병원에 장기입원을 하고, 복부수술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우리들은 갑자기 우수에 젖어 들었다.

수술 후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많이 쇠약해 보였다. 그러나 우리들을 위한 사랑의 미소는 항상 거기에 있었다. 외가에서 보약을 지어오고 회복에는 개고기 이상이 없다는 외할머니의 지시로 어머니는 비위에 맞지 않았으나 그것을 상복(常服)하셨다. 이러한 노력이 주효했던지 어머니의 건강이 점차 회복되어 갔고, 어느 날 뒷골 채원(菜園)에 다녀왔다며 아버지에게 자랑까지 하시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서 먹은 것 특히 개고기에 체했다고 하면서 눕기 시작했고, 또다시 핏기가 없어지면서 거동이 어려워졌다. 다시 순천도립병원으로 가셨다. X-선이니 무어니 찍고, 약도 타 왔다고 하면서 집에 돌아와 요양을 계속했다.

2차 치료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들은 격리되었고, 다른 방에서 거처하게 되었다. 회복기가 장기화 되면서 나는 문득 문득 이러다가 어머니가 죽는 것 아니야? 하는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셋째 부인 ‘목개촌’ 할머니가 집에 오셔서 간호를 주로 하셨다. 

어머니는 안방에 누워 계시다가 따뜻한 햇빛이 그리웠는지 마루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그때 내가 그 옆을 휙 지나치니 좀 섭섭하신지 나를 불러 세우고 “왜 나를 피하느냐?”고 힐책을 하시는 것을 듣고 움찔했다. 사실 나는 어머니의 그 앙상한 모습이 그렇게도 싫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불쌍하다는 생각보다는 왜 저리도 회복이 안 되고 온 집안을 애를 먹이느냐 하는 반감도 솔직하게 나에게는 있었다.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둘째 여동생 영희(英姬)가 죽은 다음부터였다. 한참 재롱을 떨고 우리들의 「아이돌」이었던 동생이 소화불량에서부터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갔다. 무의촌 의사로 갓 부임한 「세브란스 의전」출신 미남 평산 신(申)씨가 아침저녁으로 왕진을 와서 최선을 다했으나 영희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어머니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으리라. 그때부터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것 같다.
 
▲ 어머님(黃金孝 1908.-1941.)

긴장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안방 소식은 병세가 나쁘게 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 초저녁, 이웃집에서 미음을 쒀 온다, 고(高) 약국이 다녀간다, 하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좀 있다가 고(高) 약국의 젊은 약사가 다녀가고 얼마 안 있어, 안방에서 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와, 외가에서 간호차 와 있던 민들에미 할멈의 울음소리 같았다.

아, 돌아가신 모양이구나, 했고 당장은 별반 충격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 후 안방으로 불려 들어갔다. 흰 강보에 덮여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우리들에게 살짝 보여주면서, “느이 어머니 저세상으로 갔다, 불쌍하게.” 하면서 목개촌 할머니가 슬피 우셨다. 

다음날 다시 안방으로 불려 들어갔는데 입관(入棺) 직전인 것 같았다. 어제의 시신과는 달리 예쁜 한복이 입혀져 있었고, 화장까지 한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예쁘고 성스럽게 보였다. 짚으로 만들어진 베개하며, 한지로 곱게 토시를 만들어 끼워진 것, 깜찍한 삼베버선 등 모든 것이 단정하고 정갈했다. 

서른네 살의 우리 어머니의 마지막 고운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머리는 북두칠성을 향해 두고 있었다. 북쪽으로 가신다고 했다. 삼일이 지났다.

드디어 「땃쭈리」가 높히 치켜든 붉은 만장(輓章)을 앞세우고 꽃상여는 집을 떠났다. 

어노 어노~ 북망산 길 멀기도 한데 이제 가면 언제 오노,
어노 어노 어노 어노~
어린 새끼 뒤에 두고 눈일랑 감기등가, 어노 어노~
마을 아낙 눈물범벅 목 놓아 슬피 우네,
어노 어노 어노 어노~

구성진 상여머리의 선도 노래는 들판을 지나, 냇물을 건너 이어진다. ‘방골’ 선산(先山)으로 행렬은 가는 모양이다. 큰 댁 동네 어귀에서 노제를 지냈다. 지랑의 아주머니들이 모두 나와 또 한바탕 눈물바다가 됐다. 나를 붙들고 우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가만히 보니 상여는 크고 꽃 장식은 화려했다. 하동에서 전문가가 두 사람 와서 3일을 만든 작품이다. 상여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벅수거리’ 작은 아버지 댁 쪽에 서 있는 큰 밤나무는 그날 밤털이를 하고 있었다. 꼬마 삼촌과 사촌 동생들 몇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저렇게 재미있게 다들 노는 판에 왜 나는 이 뻣뻣한 삼베 상복에 이 고생인가, 혼자 불만이 생겼다. 

상포 수건에 대나무 도랑태까지 엮어 머리에 쓰고 왜 이 고생인고, 나의 연한 목둘레는 이미 거친 삼베로 인해 찰과상이 생겨 벌겋게 성이 났다. 두건으로 짓눌린 나의 머리는 욱신욱신 괴롭기 그지없다.

드디어 산비탈에 이르렀다. 꽃상여는 장정 몇 사람이 달랑 들어 옆으로 옮겼다. 어머니의 관이 드러났다. 저 널 속에 우리 어머니가 누워 계시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믿기를 거부했다는 말이 옳을지 모르겠다. 

조금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 관이 들어갈 구덩이를 들여다 보았다. 하얀 회칠을 해 놓아서 조금은 정성이 엿보여 우리 어머니가 정중하게 모셔지는구나, 하고 위안을 받았다. 북쪽 억불봉(億佛峰)이 저 멀리 보이고, 앞에 시야가 확 트인 기분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하관(下棺)의 시간이다. 어린 아이들은 관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명이 짧아진다나, 형과 나는 아래로 내려가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사이에 한 일꾼이 아래쪽에 두고 온 고운 상여에 불을 댕기고 있었다. 음력 8월 초, 그 맑은 산바람에 상여는 무척이나 잘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은 흐린 유리 같아서 이쪽과 저쪽을 잘 구분해 주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서 있는 이쪽은 이승이요, 불길 넘어 저쪽은 내가 갈 수 없는 저승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와 나를 완전히 갈라놓는 것 같은, 이제 저승으로 들어가신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장벽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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