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교 생활과 설날 (161회)
  제20장 나의 성장기1

전교생 약 350명, 6학급의 조그마한 면 소재지 소학교였다. 부지는 약 만 평으로 넓어서 100m 달리기 백선(白線)을 긋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일 년에 한번 면내의 가장 큰 행사인 운동대회 때는 전 면민을 수용하기에 충분한 면적을 자랑했다. 

2학년 1학기에 편입한 나는 같은 반에 사촌형도 있고 해서 편하게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담임선생은 永見二郞이라는 일본 시마네(島根縣) 출신의 교장선생님이었고 2, 3학년 두 해를 그분 밑에서 공부했다. 교장선생님은 인격을 갖춘 훌륭한 교육자였다. 주민들에게도 존경받는 선생님이었다. 자주 수어천에 나와서 붕어낚시를 하며 소일했다. 잡은 고기는 절대 가져가는 법이 없고 다시 놓아 주거나 동네사람들이 달라고 하면 ‘다래끼’ 채 내주는 분이었다.

1학기까지 조선어(朝鮮語)라고 해서 일학년 담임인 박중신(朴重信) 선생이 우리를 가르쳤으나 2학기부터는 이 과목이 아예 없어지고 ‘국어사용(國語使用)’이라고 해서 일본어만의 수업이 이어졌다. 점차 문화적으로도 조여오고 있었다.

1939년 11월 10일 총독부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제정, 공표함으로써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는 일이 시작되었다. 각 행정기관, 경찰 주재소 그리고 각급 학교가 앞장서서 창씨개명을 압박하고 나섰다. 자녀의 진학, 소시민의 취직 그리고 각종 인허가 행정서류까지 영향을 받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좀 저항을 했으나 점차 저항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바꾸기 시작했고, 개명은 1940년 말까지 80% 이상에 달했다 한다.

우리 집안도 개명 때문에 씨족회의를 거듭한 끝에 개명을 하되, 핵가족 단위로 하기로 합의를 봤다. 다시 말해 김녕 김 취구파(金寧 金 就九派) 전체로 하지 않고, 상(商) 자(字) 항렬, 즉 우리 할아버지 직계 중심으로 개명하기로 한 것이다. 할아버지 직계회의에서 김환(金丸-가나마루)으로 정했다. 형제 아홉(九) 분에다 점 하나를 찍어 할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면 둥근 환(丸) 자가 된다. 아주 탁견이었다.

모두들 자기 본(本), 즉 심(沈)씨는 청송(靑松), 신(申)씨는 평산(平山) 등으로 바꾸고 이(李)씨는 이가(李家-리노이에), 김(金)은 金田, 金村 등으로 많이 바꾸어 시대적 압박을 피해가는 묘수를 부렸다.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책은 이 창씨 개명으로 큰 타격을 입고 만다.

일제는 합방 이후 딱 30년 만에 조선반도가 문화적으로 상당히 동화된 것으로 착각하고 개명을 강행했다. 그러나 조선의 성씨(姓氏)는 일본과 달리 수천 년 내려오는 고유성이 확고한 문화로서 ‘내 성을 바꾸겠다.’ 고 하는 말은 최고로 자신 있는 말을 할 때 쓰는 문자가 아닌가, 성(姓)을 바꾸는 것은 크나큰 욕이 되는 것을 일제는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친일의 거두인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중추원 고문 한상룡, 대의원 박춘금, 귀족원 윤덕용 가문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해방을 맞이했다. 따라서 창씨를 안했다고 반일로 볼 수 없듯이 창씨를 했다고 친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잣대다.

우리 반(班)의 최병철(崔炳徹) 군, 태인도(泰仁島)에서 진상교(津上校)로 유학 온 친구는 끝까지 개명하지 않고 최(崔-사이)로 남아 있다가 졸업했다. 성적도 우수해서 1, 2등을 다투었는데 공립학교인 순천중학에 원서를 넣었다가 낙방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2학년 반(班)에는 약 70명의 학생이 있었고, 그 중 20명은 여학생이었다. 모두 가난해서 입성이나 신발이 대단히 남루했다. 겨울 추운데도 내복을 입은 학생은 몇 안 되었고, 신발도 고무신, 짚신, 조리 그리고 일식 「게다」가 대부분이었다. 

나의 외사촌 형 기운(起雲), 부면장 딸인 이복덕(李福德)이와 나만이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니는 정도로 생활수준이 열악했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통했던 1941년 말, 다시 말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은 모두 도시락을 지참했고, 밤, 감, 떡 등 군음식을 가져와 나눠 먹는 미덕도 존재했다.
 
▲ 큰댁 전경
 
세시(歲時)_<설>

새해의 첫날 음력 1월 1일, 그믐인 전날부터 잠을 설친다. 초저녁에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 하는 미신 때문에 좀처럼 잠들 수가 없다. 어릴 때는 새 옷과 새 신발을 꼭 끌어안고 밤을 지새는 때도 있었다. 먹을 것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그 활기찬 분위기가 나에게는 좋았다.

아침 일찍 부모님께 세배하고, 세뱃돈 몇 푼을 받아 물 건너 큰댁으로 뛰어간다. 절차상 할아버지에게 세배 드리는데 할아버지는 원래 인색하신지라 그다지 기대는 아니 하지만 동전 몇 푼을 받고 나면 왠지 불만이 부글부글 끓는다. 나만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삼촌, 형, 조카들 모두 할아버지 세배 끝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인원이 군단 병력이 되니 할아버지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큰댁으로 쫓아가면 바깥사랑에 자리를 하고 계시는 백부님께서는 세배 행사가 잘 준비되어 있었다. 언제나 단정하게 한복 마고자를 입고 계셨고, 세뱃돈도 지폐는 새 돈 1원, 동전도 50전, 10전짜리를 각각 준비하여 문갑 위에 놓고 계셨다. 세배가 끝나면 대충 연령순으로 일원짜리는 주로 삼촌, 큰 형들이 받았고, 우리들은 50전 정도로 끝냈다. 1939년 정도에는 1원에 눈깔사탕 두 개씩이니까 50원이면 100개를 입수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는 큰돈이었다.

이제 안채에 들어가면 큰어머니의 푸짐한 설상이 차려져 있다. 우리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강정, 다식, 유과 등이고 가끔 사과라도 나오면 쟁탈전이 벌어진다. 사과는 대구지방에서 생산되는 희귀품으로 제상(祭床)에나 오르는 것이지 보통 때는 맛볼 수 없는 과일이었다. 이제 먹거리 잔치가 끝나면 삼촌들 인솔 하에 뒷산 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당너리 할아버지’ 댁에 가서 인사하면 큰댁 행사는 끝났다.

큰댁에 돌아와 보면 갓 시집온 젊은 작은 어머니, 고모, 누나들은 머슴이 마련해 준 널을 뛰며 신나게 논다. 정말 설기분이 나는 순간이 이때다. 가끔 백부님 지시로 약 10여 명이 대열을 지어 20여리 떨어져 있는 평촌(坪村)에 들러 큰할아버지 댁에 세배를 간다. 

어릴 때 평촌에 가면 별 소득이 없었고, 먼 길에 힘만 들고 하여 가급적 빠지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평촌 바로 건너가 비촌 외가인데 거기는 또 보내주지 않으니 불만도 있었다.

설 다음날은 나의 전용시간이다. 무엇보다도 신나는 것은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던 연(鳶) 날리기 시합에 참가하는 것이다. 내가 살던 신시(新市)는 탁 트인 개활지 논이 많은 지대이고, 북서풍이 아주 좋아 연 날리기에 최적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연의 제작은 나의 장기였다. 우선 묵은 대를 잘라 가느다란 살을 깎아 만들고, 이것을 되직한 풀을 발라 창호지를 붙이는 작업이다. 여기에 물감으로 예쁜 그림을 그리면 금상첨화다.

그리고 연시합의 핵심은 역시 실에 있다. 우선 실이 튼튼해야 바람에 견디고, 상대할 때 「적기」를 무난히 패퇴시킬 수 있다. 따라서 무명실을 타래를 올려 이중삼중으로 강화하고 여기에 벌통에서 나오는 밀랍을 골고루 바르고 끝으로 살짝 유리가루를 뿌려주면 유리실이 완성된다.

공중 높이 띄우고 팽팽한 실을 잡아당기면서 바람과 싸우는 것은 「스릴」이 백점이다. 그리고 당겼다 놓았다, 연으로 하여금 재주를 부리게 하는 맛도 재미가 쏠쏠하다. 어린 나에게 주변의 모든 것은 「해라」하는 명령뿐인데 유일하게 내가 지시하는 것을 잘 순종하는 것은 연뿐이기 때문이다.
 
설은 우리 어릴 때도 신정(新正), 구정(舊正)으로 나누었다. 신정은 일본설이라 하고 그리고 구정은 우리설이라고 했다. 일제(日帝)는 경제정책 면에서 과소비 등을 막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썼으나 시골에서의 「설」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역시 문헌에도 나와 있듯이 신라시대부터 우리 명절로 지켜왔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없어질 수가 없었다.

연(鳶)은 언제, 어디서나 날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날부터 보름까지가 마감이다. 그 이후에 연놀이를 하면 부정 탄다고 해서 어른들이 절대로 못하게 한다. 이제 농사에 ‘올인’해야 한다는 관습에서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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