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과 여동생 영자의 액운 (165회)
  제21장 나의 성장기2

이 염소 젖은 우리 아버님을 살리는 또 한 번의 기적을 발휘했다. 백부님의 둘째 아들 진성(秦成)형은 서울의 한 중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했다. 재수(再修)도 문제가 있고 해서 어떻게든 진학을 시킬 생각을 백부님은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가족의 일은 가족의 공동체가 해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버님의 대학 친구가 경도(京都)에 있는 량양중학교(兩洋中學校)교사로 있었다. 편지를 띄웠더니 조카를 데리고 오라며 기숙사도 마련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 무렵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미군의 잠수함이 일본 근해에 자주 나타났다. 

그리고 Midway 해전에서 우위를 차지한 미군은 Doolittle(두리틀) 중령을 편대장으로, 개전(開戰) 이래 처음으로 기습적으로 동경(東京) 폭격을 감행했다. (미국은 점령한 미드웨이를 일주일 만에 비행장으로 만들고, 용감한 해군 파일럿 중에서 자원자를 골라 첫 번째 공습을 시도해 성공했다. 물론 비행거리로 봐서 B-16 쌍발폭격기는 미드웨이로 되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태평양에 불시착을 하거나, 아니면 중국 본토 장개석 지역에 불시착하는 수 밖에 없었다. 두리틀 중령은 중국에 안전하게 착륙하여 영웅이 되었으나 많은 그의 동료가 일본 규우슈우(九州)나 중국내 일본 점령지역에 낙하함으로써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다).

이렇게 전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현해탄’을 건넌다는 것은 좀 무리였다. 그러나 아버님은 조카를 위해 기어이 도해(渡海)를 강행하셨다. 무사히 입학을 시키고 돌아오신 아버님은 일주일 후 고열이 시작되더니 인사불성이 되었다. 일 년의 농어촌 의무복무기간을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하던 평산 신(申) 의사는 왕진 끝에 그때 당시 흔했던 ‘장질부사’(=장티푸스)라고 했다. 여행 중 감염된 듯 했다.

38도의 고열에 며칠 후에는 머리카락까지 빠지는 극악의 상황에 빠졌다. 우리들은 격리되어 접근도 못하게 했다. 의사선생님도 체온계로 열을 재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찬 보리차를 계속 떠먹이게 하고, 찬물 수건으로 열을 내리게 하는 일을 반복했다. 

한참 위급할 때에는 사망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집안을 누르고, 모두 숨죽이고 있었다. 너무 답답하여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신 무당굿까지 계획했던 것이다. 약 3주가 지나자 기적적으로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고, 한 달 만에 마루에 나오셔서 따뜻한 햇볕을 쪼이는 정도까지 호전됐다. 

이때부터 의사선생님의 지시대로 아침저녁으로 양젖을 드시게 했다. 그리고 새로 캔 감자를 곱게 삶아 간식으로 곁들였다. 이래저래 약 1개월이 지나자 빠졌던 머리카락이 다시 나고, 안색이 우윳빛으로 뿌옇게 변해 가더니 살이 붙고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우유의 좋은 단백질이 본격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기적 같은 회복이었다.

산 넘고 강 건너니 또 산이더라는 말이 있듯이 아버지가 병환에서 회복되던 그해 늦가을, 나의 바로 밑에 여동생 영자(英子)에게 액운이 다가왔다. 처음 가벼운 감기 기운에 하루 이틀 앓다가,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왼쪽 대퇴부가 붉게 달아오르더니 크게 붓기 시작했다. 신(申) 의사님은 자신의 의무기간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황해도 평산으로 철수하고 없었다.

고(高) 약국이 와서 보더니 열이 발산되지 않고 허벅지에 뭉쳐 있다고 하면서 소태로 찜질을 해 보라고 했다. 머슴으로 하여금 소태를 한 짐 꺾어 오게 해서 여물 솥에 넣고 하룻밤을 삶은 다음 그 물로 계속 찜질을 했다. 

하지만 아픈 부위가 벌겋다 못해 누리탱탱 곪아가는 것이 역력하자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탄치(炭峙)에 사는 정(鄭) 선생에게 연락을 했다. 정(鄭) 선생은 순천에 선교사가 세운 ‘안록산병원’의 외과조수로서 의사 면허는 없지만 상당한 의술을 평가받고 있는 분이었다.

이 분이 와서 보더니 열이 뭉쳐 곪았으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고열로 인해 살이 상해 가는데 차가운 찜질를 해야지 더운 찜질을 하니 살을 곪게 만드는 촉진제가 되었다면서 주위의 간호인들을 힐책했다. 
 
▲ 아버님과 새어머님

물자가 귀한 때라 좋은 약도 없고, 있다고 해봐야 ‘요도징끼’, ‘마큐롬’ 그리고 고름을 뺀다고 하는 연고 정도가 전부였고, 수술 때 가장 필요한 마취제는 구할 수가 없다고 했다. 따라서 마취 없이 맨살을 도려내야 하는 대수술이 불가피했다. 수술 날 풍로에 물을 끓여 각종 수술도구를 삶고, 붕대와 심(부드러운 가제천으로 전날 삶아 말려둔 것)을 준비했다.

형과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혹시 수술 도중 동생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압박에 숨죽이고 있었을 때 ‘아야~ 아~’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조용해졌다. 우리는 이제 동생이 죽었구나 생각하고, 깔아둔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한참 있다가 ‘애~’하는 동생의 울음을 듣고서야 ‘하느님!’ 소리가 절로 났다.

일주일 동안 그 먼데서 정(鄭) 선생은 매일 와서 붕대와 심을 갈아 주었고, 병세가 호전되어 가는 것이 역력했다. 그러나 3일 만에 한 번씩 갈아주는 ‘심 교환’ 작업은 옆에서 지켜보기가 안타깝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처음 약 50cm 정도 심을 수술부위에 밀어 넣는 작업인데 돋아나는 속살을 건드리는 일이니 얼마나 따갑고 아프겠는가.

어느 정도 아물어 가기 시작하자 정(鄭) 선생이 아버지에게 처치하는 방법을 전수했다. 완전히 아버님 단독으로 치료를 해 가시는데 형과 나는 교대로 조수 역할을 했고, 새어머니도 가끔 거들었다. 

심을 박는 때가 오면 아이가 완전히 단말마적 아찔한 괴성을 지르는데 다리를 꼭 붙들고 있는 나는 같이 엉엉 울곤 했다. 아버지는 “참아라, 다 됐다.” 하시면서 잘도 해내셨다. 영자(英子)는 아마도 아버님의 그 극진한 치료가 아니었으면 아마 그때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새끼란 역시 어미의 폭신한 품에서 커야 건강하고, 엄마 품에서 나오는 ‘이온 작용’에 의해 아이가 제대로 성장한다. 풍성한 사랑과 보살핌이 있는 곳에 심신이 강건한 자식이 나올 수 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어린아이를 두고 저세상으로 가는 어머니는 큰 죄를 짓는 일이라고. 어머니들은 건강해야 한다고.

동생 영자(英子)와 경자(京子)는 참말로 많은 역경과 외로운 시절을 보냈으나 다행히 건강하게 자라서 좋은 고등학교, 최고의 대학을 거쳐 훌륭한 가정주부 그리고 사회활동가로서 잘 살고 있다. 고마울 따름이다. 

1943년도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물자동원과 인적(人的)동원이 본격화 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기 무섭게 공출이 세게 매겨졌고, 모두들 양식을 감추느라 야단이었다. 우리 학교 운동장도 더 이상의 운동 또는 집회장소가 아니라 갈아엎어 농토로 변했다. 옥수수, 콩, 조가 심어졌고, 농사는 모두다 우리 어린 학생의 몫이었다.

학교에서 누에를 쳤는데 ‘잠산반(蠶産班)’ 이라고 했다. 우리 고학년 5~6학년은 봄, 가을로 밤을 새우며 하루씩 누에를 키우는데 봉사하게 했다. 4, 5명의 급우와 한 조(組)가 되어서 작업을 수행하는데 누에의 성장과정에 맞춰 작업이 다 다르다. 대충 말하면 학교 잠원(蠶園)에 가서 뽕잎을 큰 바구니에 따 담아 와서 하루 종일 누에판 위에 가득 덮어주는 일이다. 이것은 밤중에도 중단할 수가 없다. 밥도 학교에서 지어먹고 작업을 한다.

가을에 당번을 하면 재미도 많다. 왜 호박 서리를 해 오고, 밤도 털고, 고구마도 가져와 솥에 쪄먹는 재미가 기가 맥힌다. 쌀은 학교에서 공급해 주었는데 어느덧 이 배급이 중지되고 각자가 쌀을 가져와 지어먹도록 해 날이 갈수록 세상은 각박해 졌다. 명주는 비행사 낙하산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물자라고 하면서 생산을 독려했다. 우리들도 이 잠업을 통해 생물의 성장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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