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3일 : 그리고 일인(日人)들의 철수 (171회)
  제21장 나의 성장기2

종전 후 미국이 「히로히토」의 전범(戰犯) 사실을 몰랐을 리 만무하다. 다만 일본진주군 사령관 맥아더의 정책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모든 일본인은 천황을 신뢰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역이용해야 한다... 전범으로 기소하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판단했다. ‘천황을 망가트리면 100만 군대가 상주해야 하는 어려움이 발생할 수도 있다’ 라고 「와싱턴」에 보고했다. 

천황이 없어진 일본은 상상할 수 없고, 격해진 일본의 민심을 잡기란 단시일 내에는 불가능했으리라는 관측이다. 그리고 여기에 뿌리깊은 일본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의 책동과 바로 이웃하고 있는 소련의 집요한 선동공작은 일본 국내를 혼란스럽게 하여 미국의 태평양전략을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면에서 「히로히토」를 보존한 미국은 오늘의 일본을 태평양지역에서 가장 확실한 우군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면에서 성공한 전략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의(正義)라는 면에서 ‘일본 제국주의 팽창을 주도했으며, 2,000만 명에 가까운 아시아인, 310만 명이 넘는 일본인 그리고 6만 명이 넘는 연합국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을 주도한 전범자(戰犯者)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정당한 응징이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은 앞으로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일왕(日王)을 살려주는 좀 더 강한 명분 쌓기가 필요했는지, 1946년 1월 1일 연합군사령부의 요청으로 일왕(日王)의 ‘인간(人間)선언’을 하게 된다. 

‘나와 우리 국민간의 유대는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단순히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에 의한 것은 아니다. 천황은 신(現御神)이고, 일본 국민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며 그래서 세계를 지배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가공의 관념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 된다..’
 
③ 해방 3일 : 그리고 일인(日人)들의 철수

이것으로 신화(神話)는 끝이 났다.

중대한 변화가 있으려면 하늘의 징후가 먼저 있다는 옛말이 있다. 해방 약 1주일 전에 100년 만에 처음이라고 하는 대홍수를 만났다. 2주야에 걸쳐 비가 내리더니 수어천은 물론이고, 우리 집 앞 개울도 그 많은 비를 담아내지 못하고 넘쳐서 물이 집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물난리가 일찍 없었다. 삽시간에 마루 밑까지 물이 차는 바람에 동생 둘을 형과 내가 나누어 업고, 계모님과 함께 언덕 위의 주재소로 기어 올라갔다. 참말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이 많은 호인(好人) 박(朴) 순사가 램프불을 켜 놓고 밖을 걱정스럽게 내다보고 있었다. 혼자뿐이었다. 우리를 보더니 옆에 있는 일반 순사가 거처하는 별채로 안내하면서 여기서 쉬라고 했다. 안내받은 다다미방에서 자는 듯 마는 듯 하고 있다가 날이 훤히 새서 밖으로 쫓아나가 봤더니 우편국 앞 우리 논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수어촌까지 물로 완전히 잠겨 있었다.

아, 아! 이런 무작한 자연의 반란이 있을 수 있는가,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곧 해방의 소식이 당도했다. 따라서 나는 나이는 어렸지마는 그때의 모든 상황이 너무 격동적이기 때문에, 지금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해방 3일째, 우리 면민(面民)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일장기를 개조해 태극기를 만들어 시내를 활보하고, 학교 교정에 집합하여 소(小)군중대회를 갖더니, 학교 봉안전(奉安殿)을 때려 부수고 곧이어 신시(新市) 뒷동산에 있는 신사(神社)로 달려갔다. 
 
신전(神殿) 문을 열어젖히더니 마른 솔가지 한 단을 문안에 구겨 넣고 불을 질렀다. 바싹 마른 나무 신전은 금새 화염에 휩싸이더니 활활 타 폭삭 무너져갔다. 이때까지의 모든 행동을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분이 나의 넷째숙부 옥주(沃周)였다. 수조에 갇혀있던 물고기가 강물을 만난 듯 했다.
 
모였던 군중들은 시가행진에 들어갔고, 만세 소리가 요란했다. 나의 6학년 때 담임선생이었던 도요다(豊田) 선생은 원체 얌전한 분이라 건드리지 않았고, 좀 친일적으로 처신했던 나쓰가와(夏川) 선생은 청년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했다. 일본 선생들은 모두 입대했거나 피해버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 해방 후 감옥에서 나온 독립지사들의 만세

아주 흉한 광경도 전개됐다. 개인적 원한이 멱살잡이로 시작되더니, 결국 피를 흘리는 끔찍한 사건으로 발전했다. 고(高)약국과 진(陳)약국이 사업상의 원한으로 집안 간 싸움이 대로에서 백주에 벌어진 것이다. 2, 3일 만에 무법천지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이때 순천형무소에서 고생하다 석방된 안덕윤 목사님이 아니었으면 아마 살인극으로 변했을 것이다.

긴박한 일은 그날 밤 우리 신시(新市)에 또 닥쳐왔다.

면민(面民)들의 흥분된 군중대회가 문제가 됐던지, 그날 자정 경 군용트럭을 타고 총과 일본도(日本刀)로 무장한 7, 8명의 일본인들이 광양읍에서 우리 고을로 들이닥친 것이다. 주모자들을 손을 보겠다는 것이다. 도리 없이 일본말이 통하는 우리 아버님이 해결사로 나섰다. 우편국 사랑방에 일본인 대표를 데리고 들어가 일본인에게 피해가 전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을 약속한다면서 잘 타일러 보냈다. 

그때 구하기 힘들었던 청주(淸酒)를 곁들인 주안상을 어머니가 부랴부랴 마련해 사랑방으로 들여보냈던 것을 기억한다. 이들이 독을 피웠으면 끔찍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 일본대표는 눈물을 흘리며 광양읍으로 되돌아 갔다.

하동에서도 사고는 계속 터졌다. 엽총을 든 중년 남자가 경찰서 정문에서 총을 마구 쏘는가 하면 못된 일인(日人)들을 끌어내 두들겨 패는 일이 일어나 일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진주로 피신하는 일들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우리 주재소가 진공상태가 되자 우리 고을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자칭 치안대장이라는 자가 나타나 매일 밤, 원한 있던 사람을 데려가 매찜질을 하는 일이 계속되었고, 우리들은 고함소리와 울부짖는 소리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런 험악한 상황을 이야기 듣고, 옥주(沃周) 숙부가 몇몇 청년들을 데리고 주재소에 들어가, 자칭 치안대장을 성토해서 쫓아내버린 일까지 벌어졌다.

약 1주일이 경과되자 들떴던 민심도 어느 정도 진정되고 자율이 없으면 모두 다 고생한다는 것을 터득했는지 이성적인 구심점이 형성되어 가는 것 같았다. 우리 집안에 대해서도 원한이 있을 수 있었겠는데 오히려 자율에 나서줬으면 하는 여론이 있어 다행이었다. 

크게 실인심(失人心)하지 않았던 것과, 원체 집안규모가 큰 것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9형제에 그 아랫대까지 합하면 장정 20여 명은 족히 되었고, 외척까지 합하면 그 세력을 꺾을 집단이 우리 고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면(面)에는 정착해 사는 일본 가정은 딱 하나뿐이었다. 가다야마(片山)라고 하는 이 가족은 신시(新市)에서 좀 떨어진 신작로 가에 허름한 집에서 생활을 했고, 우리들과는 별 교류가 없었다. 그 집의 막내딸 가다야마(片山得枝)는 우리와 같은 반(班)이고, 아주 온순했다. 아침 등교해서 하교할 때까지 한마디도 아니하는 때가 허다했다. 커다란 눈만 껌벅껌벅하는 처녀였는데 5학년 2학기 때 어디로 전학 갔는지 없어졌다. 

주인 가다야마는 여름에는 은어를 낚아 훈제한 다음 일인들에게 팔고, 겨울이면 자기키보다 더 긴 12번 짜리 장총을 메고 백운산을 누비며 멧돼지, 노루, 고라니 등의 짐승을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원시 수렵주의자의 생활을 해 나갔다. 지방민과는 전혀 마찰이 없었고, 오히려 우리들이 그를 측은하게 여기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광양군 내의 일본인들은 대부분 여수 부두로 내려가 일본으로 귀환했다. 그런데 진월면 망덕리에서 수산업(장어 양식)으로 크게 성공한 야마모도(山本)가 자기 소유 대형선박이 있어, 이 배를 이용해 많은 일인들이 손쉽게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가다야마(片山) 가정은 야마모도(山本)의 은혜로 그 배에 승선할 수 있었다. 이때 우리 고을 사람들이 가다야마(片山)의 짐을 망덕리까지 운반해다 주는 인간미를 보였고, 짐 속에는 그 무거운 재봉틀까지 포함된 이삿짐이었다고 한다. 타지에서는 야밤에 몸만 피해 도망가다시피 떠나는 일인(日人)들이 많았던데 비해 광양의 일인들은 대단히 편하게 철수했다. 그런 은덕으로 가다야마(片山) 가족은 한일 간에 다시 교통이 트이자 우리 고을에 찾아와 인사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존경받던 永見 교장을 찾아 몇몇 우리 고을 제자가 시네마현(島根縣)을 방문했던 미담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가 고약했지, 인간은 증오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8.15 해방 (170회)
  친일 논담(親日 論談)_1 (17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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