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논담(親日 論談)_1 (172회)
  제21장 나의 성장기2

④ 친일 논담(親日 論談)

일본의 근대교육의 창시자요 게이오대(慶應大)를 설립했으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정신적 멘토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조선국은 나라이면서 나라도 아니고, 정부이면서 정부도 아니다.’ 라는 극악한 평가를 내렸던 일이 있다. 세계 정세도 읽지 못하고, 무능(無能)에 치졸(稚拙)하기까지 했던 조선 조정은 친일행위자를 양산했고, 급기야 몰락이라는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1919년 독립선언문을 읽었던 33인 중 한 사람은 재판장의 질문 “완전히 독립을 주면 해낼 수 있겠느냐”에 대해 대답하기를, “갑자기 독립을 주면 혼자 일어설 수 없다. 단계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참정권을 다오.” 했다. 당시의 민족지도자의 의식이란 그런 정도였으니 일제의 조선강점은 길어져만 갔다.

여기에 박지향 서울대 교수의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왜 조선이 망하고, 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우리 책임을 밝히는데 너무 게을리 했다. 그저 사악한 일제만 비난하면 되었다.”

이조 오백년 동안 다리 하나가 가설되지 못한 한강에 기차가 지나가고, 전국 방방곡곡 군(郡)과 군(郡)을 연결하는 신작로가 생기는가 하면 면(面) 단위로 초등학교가 개교를 했다. 주요도시에는 입맛대로 중학교, 사범학교, 공업학교, 농업학교, 고등학교, 수산학교까지 생기더니 의과전문학교가 들어서는 것을 본 우리 할아버지들은 입만 딱 벌리고 아무 말을 못했다.

3 .1 운동 후 중국 침공까지 장장 25년 동안 우리 민중은 거의 조직적인 저항이 없었고, 소위 「순일(順日)」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밥은 먹어야 하고 자식 키우고 학교 보내 출세시킬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이것뿐이 아니었다. 전국의 치안이 개선되고 농지측량, 지적(地籍)의 작성, 못줄 하나로 네모반듯하게 심은 벼는 추수의 혁명을 가져왔다. 물론 일제는 식민지 수탈의 일환으로 개혁을 추진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우리들에게 「메리트」로 작용했음이 사실이다.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된 서구제국주의가 인도, 파키스탄, 버마(미얀마), 인도차이나, 이집트, 모로코, 남아공에 남긴 식민유산들을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잘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36년 중 일제(日帝)가 우리들에게 가장 가혹했던 시기는 역시 태평양전쟁의 서막인 중국침공으로부터 1945년 무조건 항복 때까지의 8년 동안이라 하겠다. 매몰찬 공출, 징용, 징병, 징발, 정신대, 가혹한 근로동원, 그리고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은 창씨개명까지 못된 짓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수행해 나가는데 하수인 역할은 역시 우리들이었지 않았는가! 슬프게도 군청, 면사무소에 근무했던 우리 아버지, 삼촌, 형님들이 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들의 생활의 일부였고, 유별나게 아첨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시의(時宜)에 따라갈 뿐이었다. 과하게 친일적으로 놀아난 부류는 해방이 되자 고향을 등지고, 어디론가 떠남으로써 자신의 응징으로 끝이 난 경우도 많았다. 친일에 관한 한 그 응징과 치유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지난 2009년 12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성대경)가 일제 강점기 반민족행위자를 선정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우리 사회의 내재적 갈등이 보다 심화되도록 의도된 공작의 결과물로 보여 진다. 깊은 사려와 고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하나의 괴물을 만들어 냈다.

‘역사의 복잡성을 재단하지 말고 역사는 역사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박지향 교수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60여 년 전의 일이다. 1949년 건국 직후 어느 봄날 서울 북아현동 1번지 우리 집에는 백부님을 비롯해 아버님, 제헌의원 숙부, 계주(桂周, 넷째숙부 당시 경찰전문학교 교무과장직을 막 사임함) 숙부 그리고 고려대학교 재학 중인 일곱째 범주(泛周) 삼촌이 모였다. 자연스럽게 그때의 핫이슈였던 반민특위(反民特委)의 문제가 그날의 화제였다. 
 
▲ 반민특위재판공판 모습 [출처 ; 광복회]

발표된 반민족행위자 688명 중에는 좀 납득이 안가는 사람들이 있더라 하면서 백부님의 먼저 운을 띠웠다. 특히 반민특위 국회대표로 참가했던 옥주(沃周) 삼촌을 겨냥한 것 같았다. 

백부님의 이야기는 ‘한말(韓末)의 오적(五賊)을 비롯해 작위를 받은 귀족, 일진회 회원 같은 합병을 부추긴 인사, 중추원 참의, 총독부 고위관료, 통치기구에서 핵심역할을 했던 인물, 헌병, 밀정, 고등계 형사 등 독립운동가를 학대, 탄압, 살상한 일제의 손발들은 당연히 포함되어야 정통성이 바로 선다고 본다. 그러나 일제 말엽에 강압에 의해 부득이 협조한 척한 일부 인사 특히 경제계, 문화계, 교육계 몇몇 인사가 포함된 것은 잘못이다. 포승줄에 줄줄이 묶여가는 모습이 아주 안 좋더라.’는 것이 백부님의 논리였다.

이에 대해 옥주(沃周) 삼촌은 ‘6백여 명 선정한 것은 특위 위원들의 고심의 산물이었고, 최소화해서 새출발 하는 이 나라의 국민적 화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 하면서 특위결정의 정당성을 극구 옹호했다. 그리고 숙부님은 ‘북한에서는 친일문제를 과감하게 척결했기 때문에 남한도 균형이 맞아야 하고,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 고 주장하며 특위의 처리를 적극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이때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반이던 범주 삼촌은 당시의 학병(學兵) 문제에 대하여 소상히 설명했다. 학병 문제의 바로 중앙에서 모든 진행상황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보성전문(普成專門)이 총독부의 전시체제 강요에 의해 학교 이름도 척식경제전문학교(拓殖經濟專門學校)로 바꾸고 교직자들을 압박해 학병 지원을 요구하도록 하는 광란의 시대였다.

서울 부민회관에서 학병궐기대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교수와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형국이 벌어졌다.

김성수(金性洙) 선생은 부득이 학병강연에 참석해 단상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피마자」기름을 잔뜩 마시고 온 터라, ‘설사’를 줄줄이 함에 그 자리를 어렵게 모면하는 촌극도 있었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참 훌륭한 분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학교를 자기 생명처럼 알고, 신문사를 마지막 남은 국민계몽의 유일한 수단으로 알고 있던 우리 선각자, 민족지도자들은 국내에서 붙박이처럼 틀고 앉아 얼마나 고뇌에 찬 생활을 이어 갔을까, 생각만 해도 억장이 무너진다.

이런 사정을 일제시대를 체험한 우리들은 너무 잘 안다. 그런데 최근에 발표한 「진상규명위원회」의 명단은 688명에 300명을 추가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또다시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만인(萬人)이 ‘그놈은 친일, 민족반역자지.’ 하면 그 자는 친일패다. 그러나 서로 의견의 다툼이 있는 인물일 때에는 감히 누가 단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인물은 역사가 평가해야 한다.

‘한국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 라는 대한민국 건국 자체를 부정하는 한 마디에, 엄청나게 왜곡된 역사가 편찬되게 됐다. 대단히 무책임한 발언이요, 단세포적인 발상이다. <반민특위가 작성했던 명단은 최선이었다> 라고 건국직후 특위에 참여했던 고위직 인사가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반민특위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인사들을 살펴봐도 일제에 철저하게 피해를 본 인사들이었고, 2009년도의 「진상규명특위」보다 1949년 특위에 훨씬 많은 반골(反骨)들이 포진하고 있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학병으로 갔다 중국으로 탈출한 분, 광복군에서 고생하신 분들, 순국애국지사들의 후손들이 대거 조사관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특위는 해방 직후이기 때문에 일제, 친일에 대한 반감과 응징의 욕구가 절정에 있었던 시대이기 때문에 60여년 후인 지금보다 훨씬 실효성 있는 조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해방 3일 : 그리고 일인(日人)들의 철수 (171회)
  친일 논담(親日 論談)_2 (173회)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