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야를 달리는데 기타 반주에 노랫소리가 들린다. 젊은 흑인 청년이 맨 뒤 좌석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San Francisco」라는 가사의 노래를 경쾌하게 부른다. 분위기에 너무 맞는 노래였다. 끝나자 모두 박수로 격려했다. 「앵콜」을 받아 몇 곡 더 했는데 Pro 가수인 것 같았다. 아주 구성지면서도 경쾌한 차내 Pop music이었다. 이런 종류의 퍼포먼스는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자유분방한 생활태도에서 나오는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이라고 본다.
4박 5일의 릴레이식 길고도 멋진 장거리 여행은 끝이 났다. 「자유와 사랑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어둑어둑한 초저녁에 도착했다. 짐은 정확하게 내가 탔던 차 밑창 화물칸에서 끄집어 내 졌다. 밤중에 짐은 많은데 어디 투숙할 곳이 막막했다. 예약해 놓은 데도 없고 무조건 택시를 잡았다. 나이 들어 보이는 노장 운전수였다. 뉴욕에서 지금 막 도착했다며 ‘싸고 안전한’ 숙박시설(The place to stay)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대뜸 “You want YMCA.” 한다. “당신은 아마도 YMCA가 맞을 것 같소”하면서 나의 yes 소리도 듣지 않고 쏜살같이 달린다.
10분도 못돼서 고색창연한 큰 벽돌건물 앞에 서더니 “Your hotel, sir.” 한다. 다행히 방의 여유가 있었다. 3일치 숙박비 6$을 지불하고, 3층 방으로 올라가니 약 두 평 남짓한 쪽방에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달랑 놓여 있다. 그러나 시트와 베개 등은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었다. 2불짜리 방으로서는 과분했다. 화장실과 샤워룸은 공용이었는데,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하나도 불편이 없었다. 우리나라 YMCA를 지어준 미국 백화점 왕 Mr. John Wannamaker에 감사할 따름이다.
San Francisco
도착한 다음날부터 S. F 관광과 지인 방문을 시작했다. 우선 3일 후 출발하는 군용선의 부두가 있는 Oakland항으로 갔다. 탑승한 버스의 운전수가 중년의 금발 미인이었다. 한국에서 승용차의 여자 운전자도 보기 드문 시절에 미모의 여자 버스운전수라니 당시에는 몹시 신기했다.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아 말을 슬슬 걸어보는데, 사근사근 답변도 친절하게 잘 해 준다. 삼남매의 어머니로서 주부라고 한다. 일찍 은퇴하고 인생을 즐기기 위해 내외가 젊을 때 같이 열심히 일한다고 했다. 듣는 소리마다 신기했다.
군용 부두에 들러 확인하니, 책 등 큰 짐은 이미 도착되어 보관하고 있었고 MSTS의 출항도 3일 후 오후 6시 정각에 떠난다고 한다. 일을 마치고 인근에 있는 Berkley 대학에서 학위를 하고 있는 고려대 동문인 한승조(韓昇助) 선생님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선배님을 외국에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Berkley의 넓은 캠퍼스와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 낭만의 교정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매우 행복해 보였다.
동부의 여느 대학과는 교정(校庭) 자체가 달랐다. 여유가 있어 보이고 상하(常夏)의 계절을 은혜 받아 수목과 잔디가 너무 좋았다. 그런데 한(韓) 선생님의 첫 질문에 너무 당황했다. “Mr. 김은 미국에 와서 무엇을 배우고 돌아가는가?” 극히 평범한 질문인데, 미국을 떠나면서 나 자신이 그동안 느낀 바 핵심적인 배움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정리를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미국의 가치(價値)는 「자유와 봉사」라고 요약했다.
한(韓) 선생님은 선진교육가(先進敎育家) 집안답게 Paris 유학을 마친 여동생을 Berkley에 불러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그 당시 여자의 Paris 유학이란 소설에서나 접해 보는 일이었다.
다음날은 City tour bus를 타고 명승지를 구경하는 코스를 택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늦여름은 그 기온을 종잡을 수가 없다. 쨍쨍 해가 나면 반팔셔츠로 충분하지만 구름이 끼거나 하면 금방 추워져 오버코트를 입어야 밤에 나들이가 가능할 때도 있었다. 거금 25불을 들여 「런던포그」같은 트렌치코트를 사 입어야만 했다.
식물원, Fisher's Warf 부두 등을 거쳐 금문교(Golden Gate Bridge)에 들렀다. 금문교는 역시 경이로운 작품이었다. 당시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국만의 토목학(土木學)과 역학(力學)의 총 집합체였다. 안내인의 설명이 걸작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55년경 일본의 첫 관광객이 금문교를 방문했을 때, 태평양 전쟁에 참가했던 한 노신사가 다리에 설치된 그 거대한 케이블을 어루만지면서 “바가야로(이 바보 천치야)!” 하더란다.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이와 같은 경이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미국, 영국에 도전한 일본의 정신 나간 군부와 정계에 대고 하는 말이었단다.
그 후 5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금문교보다 훨씬 Span이 긴 다리를 두 개나 가지고 있다.
미군수송선(美軍輸送船 M.S.T.S) General Sultan호
3만 톤의 거대한 군(軍) 여객선 Sultan호는 9월 초 어느 날 오후 6시에 출항했다. 수많은 환송인파가 부두에 늘어섰고 군악대와 의장대의 멋진 시범을 뒤로 한 채 서서히 샌프란시스코 만(灣)을 가로질러 금문교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학위를 마친 우리 한국 유학생들 12명의 동무가 있어 무료하지 않겠다 싶어 안심이 되었다.
이 운송선에는 한국으로 가는 미군 교대병력 약 5천여 명이 탑승했다. 태평양 지역 일대의 미군기지에 인원(人員)과 보급(補給)을 추진하는 임무를 띤 아주 중요한 정기선(定期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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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달간 인천까지 오는데 신세를 졌던 미 해군의 M S T S General Sultan호(30,000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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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 중에는 여자도 몇 명 끼어 있는데 이들은 선상의 Cabin에 입실하도록 배려하고 우리 남자 일행은 배 중간쯤에 침실을 배정 받았다. 같이 귀국길에 오른 일행 중에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돌아오시는 최종성(崔鍾聲 ; 前 총신대 총장) 목사님, 하버드 의대에서 공부했던 김정근 박사(金正根 : 前 서울대 신경외과 교수) 등이 있었다. 교수, 음악가 등 좋은 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지성인들의 집합소였다.
우리를 승선시킨 목적은 한미재단이 주최가 되어 염가로 유학생을 귀국시키는 데 있었지만 미군 측에서도 한국의 지성인들을 약 20여일 미군장병과 같이 선상 여행을 시킴으로서 상호 이해를 돕고 한국문화와 풍습을 미리 접할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 같다. 아주 가치 있는 Arrangement라고 생각했다.
Sultan호는 속도를 줄이며 서서히 금문교 밑으로 미끄러져 지나간다. 밑에서 쳐다보는 금문교의 위용은 장관이다. 안개가 약간 낀 어스름한 석양에 비친 다리는 괴물 같아 보였다. 다리를 지나자 갑자기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런 파도는 생전 처음이다. 3만 톤의 거함(巨艦)도 큰 파도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큰 덩치를 내맡길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물속으로 한참 들어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뱃머리가 위로 솟구치는 기분이다. 갑판에 서서 난간을 붙들고 용을 쓰는데 어질어질해지더니 웬걸 토하기 시작했다. 선상요원들에게 듣자하니, 여기는 언제나 너울 파도가 심한 지역이라 했다. 즉, S. F 내항(內港)의 물과 거대한 태평양 물이 교합하면서 생기는 현상인데 오늘은 약과라고 했다.
좀 잠잠해지면서 밑창에 있는 Mess Hall(사병식당)로 내려갔다. 벌써 장사진이다. 배에서 하는 일이란 세끼 밥 챙겨 먹는 일 외에는 거의 없다. 따라서 밥 때만 되면 미리 나와 긴 줄을 서서 그 자리에서 대기하며 담소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선상(船上)의 식사는 아주 사치스럽다. 배에는 보급품을 많이 실을 수 있고, 해군 특유의 호화판 식단까지 곁들여 아주 맛있고 푸짐하다. 육군의 일선부대 식사와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물도 풍족해서 24시간 샤워를 할 수 있다. 찌는듯 한 더위 속에 항해하려면 샤워 없이는 잠을 잘 수가 없다.
한 가지 불편한 것은 비상훈련이다. 수시로 실시됐다.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구명조끼를 재빨리 끼어 입고 갑판으로 쫓아 나가서 해산할 때까지 꼼짝 못한다. 비상에 대비하는 미군의 노력은 철저했다.
우리 유학생 일행의 진가(眞價)가 서서히 발휘되었다. 일요일 예배시간에는 최종성 목사님이 좋은 설교와 기도를 주도해서 장병들의 인기를 독차지했고, 김정근 신경외과 의사와 경북대 의대로 부임하는 내과 최 박사님은 장병들의 건강문제를 상담해 주고 성악가 소프라노 조(趙) 선생은 「오 대니 보이」와 우리 가곡을 멋들어지게 불러 갈채를 받았다.
나는 가끔 「한국전쟁과 미(美), 소(蘇)의 대결」에 대해 강의하고 한글 읽기를 간단히 설명하는 수업을 가졌다. 모두들 좋아했고, 동승한지 약 1주일이 되자 우리 한국 학생들은 모두 Doctor(박사님)로 통했다. 이제 식사시간에 식당에 당도하면 무조건 앞으로 가서 배식을 받으라고 양보해 준다. 아주 편하고 후련한 선박여행을 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