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그동안 변화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광화문 네거리의 「아치」에는 정치구호가 여전히 나붙어 있고 정부 각(各) 부처 건물에는 주요행사에 관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청와대 옆 효자동을 지나 세검정 집에 도착한 것은 오후 두서너 시(時)경이었다. 가족들은 그동안 큰댁과 처가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살아왔고, 아이들도 모두 건강했다. 큰딸 효성(孝星)이는 다섯 살, 아들 성한(星漢)이는 세 살 모두 귀엽게 자라 주었다.
약 한달 간의 해상(海上)생활에서 검게 탄 나의 얼굴이 좀 이상했던지 아이들이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는다. 잠자리에서도 애를 먹인다. 큰딸은 자지도 않고 엄마 옆에 앉아서 울고 보채기만 한다. 엄마가 달래도 소용이 없다.
예민했던 우리 딸은 새까만 어떤 낯선 남자가 엄마 방에서 잔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가 보다. 내가 “아빠야, 아빠. 아빠하고 같이 자는 거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딸이 하는 대답은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이었다. “우리 아빠, 저기 있어” 하며 벽에 걸린 나의 장교복장 사진을 가리킨다. 그러고는 제 속내를 털어 놓았다고 더 사정없이 울어댄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는 것은 이렇게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해외 현장에서 근무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초를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선물공세 그리고 대화하고 같이 산보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 한 후에야 서서히 접근해 왔다. 일주, 이주 점차 나아졌지만 약 한달 정도 지나서야 겨우 간격이 좁아졌다. 역시 사내아이는 달랐다. 성한이는 덥석덥석 안기고 하니 서로 경쟁의식이 생겼던 것도 친해지는데 한 몫 한 것 같다.
그동안 부산 장모님 오빠 되시는 종필(鍾弼) 삼촌이 세검정 근처에 이사를 오셔서 많이 돌봐 주셨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꼬마 처남들, 길우(吉雨)와 광우(光雨)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토끼, 포인터 강아지 등 무엇이든지 구해다 주었단다. 지금도 그 정을 잊을 수가 없다.
용산에 사시던 큰댁은 주위의 도움으로 상도동 고갯길 마루턱에 땅을 사서 집을 새로 짓고 이사를 하셨다. 다소 품위 있는 생활로 되돌아 온 것이다. 아버님은 여전히 정치에 관심을 두고 계셨다. 내친 김에 꼭 한번은 고향에서 당선되고 싶어 하셨다. 지난번 민주당(民主黨) 때의 패배를 설욕하는 뜻도 있고 그때 닦아 놓은 기반을 아버님은 큰 자산으로 생각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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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년 서울을 사는 한 풍경 [출처 : 보배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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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은 대단히 혼미했다. 그해 10월 15일, 5대 대통령 선거는 군부(軍部) 중심의 공화당(共和黨)과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민정당(民政黨)의 각축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윤보선(尹普善) 후보 쪽은 박정희(朴正熙) 의장의 약점인 여순사건(麗順事件)을 물고 늘어지고 소위(所謂) 사상논쟁으로 끌고 가 결판을 내려는 참이었고 서울 일간지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아버님은 정당 선택을 신중히 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선거구 관리가 중요한데, 지난 선거에서 활동했던 진용(陣容)들이 서서히 가동되기 시작하고 수시로 전화로 또는 상경해서 상황을 알려 왔다. 지난번 무소속으로 출마해 조직력이 약했던 것을 극복하기 위해 정당 공천으로 출사표를 던지기로 작정하신 모양이었다. 경기(京畿 : 옛날 제일고보) 동기인 정운갑(鄭雲甲) 선생과 매일 접촉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정치 초년생인지라 Pro에게 정치의 흐름을 교습 받고 계시던 것이다.
상도동 아버님 댁은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호구지책 마련이 시급했다. 우선 대소가(大小家)를 다니면서 귀국인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구직활동을 할 계획을 세웠다. 부산에 내려가 장인, 장모께 인사를 갔다. 장인 영감님께서 특히 반겨 주시면서 ‘오늘은 김(金) 서방과 격의 없이 한 자리 해야 한다’ 하시면서 밖으로 끌고 나가신다.
한참 걸어가시더니 서면 네거리 어느 건물 지하로 들어가신다. 상상도 못했던 지하 바-, 맥주집인데 이쁜 젊은 아가씨들이 줄줄이 나오면서 “문(文) 사장님, 어서 오세요.” 하며 대단히 반긴다. 집 가까이에 있는 주점(酒店)으로 친구들과 자주 들르시는 곳인 것 같다. 당신 평생 이것이 처음이고 다시는 없을 것이라 선언하신다. 술은 얼마든지 살터이니 아가씨들도 즐겁게 마시고 당신도 기분이 좋아 오늘은 한 잔 하시겠다고 사전 예고를 하신다.
평소에는 반주로 정종을 주로 드시는데 어쩐 일인지 찬 맥주를 연거푸 두 잔을 드신다. 아마도 사위는 술이 신통치 않아 약한 술이 맞는다 싶어 맥주 바로 데려가신 모양이다. 몇 잔을 드시고 나에게도 권하시더니 이제 서서히 본론이 시작 된다. “그 친구들이 말이야, ‘자네 큰 사위 다시 보기 틀렸네’ 하며 부아를 돋우었네.” 하신다. 무슨 말씀인가 했다.
친구 분들이 ‘사위가 지상 낙원에 가서 공부하고 거기서 새 장가 들어 이 구질구질한 한국에 올 생각이나 하겠는가!’ 하면 처음 한두 번은 장난으로 듣곤 했으나 자주 그런 소리를 들으시면 혹시나 해서 걱정도 해 보셨다 하신다.
그래도 “이 사람들아, 그 많은 미국 간 유학생이 전부 그런 배신자가 된다 해도 우리 사위만은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야 내기하세!” 하셨단다. 귀국해서 아이들과 함께 찾아온 것이 말할 수 없이 기쁘고 반가우셨던 것이다.
가족을 부산에 두고 진주, 하동을 거쳐 고향인 광양 진상(津上)으로 갔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1961년 말(末) 할아버님이 92세(歲)로 작고하셨다.
귀국하면 할아버님을 한 2주(週) 정도 모시면서 파란만장한 그 생애를 녹취해서 전기(傳記)를 출판할 계획이었다. 근검절약으로 그 많은 재산을 일구었던 일, 의병(義兵)들과의 대결,(한국외대의 정진석 교수가제국의 황혼 「100년 전 우리는」》에서 ‘순수한 우국충정에서 시작된 의병항쟁이었지만, 불량배가 뒤섞여 민간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고 언급한 바와 같이 지방에서는 의병 무리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두목에게 약을 써도 또 졸개들이 와서 행패 부리고, 그리고 다른 무력 집단에는 통하지 않아 또 다시 받으러 오곤 했다 한다) 하동 장에 가시는 도중 열두 모롱이 험한 재를 내려가다 산도둑과 맞닥뜨려 활극을 벌인 일, 표범을 몽둥이로 때려잡은 일(겨울에는 그 범 가죽위에 앉아 계시곤 하셨음). 그리고 고전적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셨던 일 등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가지고 계셨다. 참말로 아쉬웠다.
선산에 모셔진 할아버님의 묘소를 비롯해 큰댁, 작은댁 산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생모님 모신 곳에 들러 귀국인사를 드렸다.
할아버님은 시골에서 여덟째 삼촌이 모시던 중 돌아가셨는데 장례비로 25만 여원(지금 돈 약 2,000만원)을 벽장에 마련하여 두셨더란다. 5.16으로 벼슬이 모두 떨어진 아들, 손자들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미리 당신께서 몇 년 저축을 해 놓으신 것이다. 이렇게 우리 조부님은 무서운 분이셨다. 면(面)에서 주관하는 장례식이 되었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