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를 끝내고 상경했다. 무임소장관실에서 나의 마지막 임무는 청와대에 가서 장관의 퇴직 전별금을 받아 오는 일이었다. 새로운 내각(內閣)이 발표되고 김현철 내각은 모두 사표를 제출했다.
청와대(최고회의의장 비서실)는 떠나는 장관들에게 금일봉(金一封)을 하사한 것이다(박정희 장군은 매섭게 차가우면서도 인정이 많은 분으로 알려져 있다. 당신을 반대했던 많은 동료들이 구속, 수감되어 있을 때에도 생활이 어려운 분에게는 가족에게 뒤로 꼭 생활비를 챙겨 보냈다.).
1963년 12월 17일 밤, 5대(代) 대통령 취임과 6대(代) 국회 개원을 축하하는 경축연회가 중앙청 중앙홀에서 열렸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새로 임명된 최두선(崔斗善) 내각, 6대 국회의원 그리고 외교사절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아버님은 최두선(崔斗善) 총리에게 “광양 .구례 출신 김선주(金善周) 올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아니, 광양의 김현주(金鉉周) 선생과는 어떻게 되시는지?” 하고 물으셨단다. “예, 저의 백씨(伯氏) 올습니다.” 하셨더니 많은 귀빈이 모인 자리에서 “그래, 30여년 전에 현주(鉉周) 씨에게 크게 신세를 졌지!” 하시면서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다고 한다. “내일쯤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까 했습니다.” 하셨고 다음날 오후로 약속을 하셨다.
다음날 만난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선친께서는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 부탁을 하신 모양이다. “영어(英語)할 줄 아는 사람 필요하지!” 하면서 임윤영(林胤英) 비서실장에게 선친이 가지고 가신 이력서를 건넸고 익일 출근하라는 전갈이 와서 나의 공직(公職)생활이 시작되었다.
10여일 후 甲辰年 새해가 밝았고 아버님을 따라 성북동 최(崔) 총리 댁에 세배(歲拜)를 갔다. 많은 세배객이 모인 사랑방에서 최(崔) 총리는 정식으로 우리 큰댁 백부님 김현주(金鉉周)와의 교우관계를 들려 주셨다.
때는 1932년,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이 보성전문(普成專門 : 지금의 高麗大學校)을 인수하시고 학교 재건기금을 모집하기 위해 팔도강산 전국 곳곳을 누비면서 소위(所謂) 민족자본가(民族資本家)를 찾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제일 먼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거쳐 강원도, 경상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라도를 지나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긴 여행을 약 3개월에 걸쳐 하셨다고 한다.
이때 경남(慶南)에 들어서면서 함안, 진양, 하동을 거쳐 광양군 진상면 지원리(光陽郡 津上面 旨元里) 우리 큰댁에 당도하셨다. 백부(伯父)님과 처음 인사를 나누고 조부님 김상의(金商義) 옹(翁)을 알현했는데 가장 인상적인 말씀을 들으셨다 한다. “참 좋은 일을 하십니다. 보낼만한 학교가 국내에 없어서 우리 자식들을 몽땅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도 좋은 대학을 가져야지요.”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당시 동행은 인촌(仁村) 선생, 김준연(金俊淵) 선생 그리고 최두선(崔斗善) 선생 세분과 보전학감(普專學監) 한 분이였다고 한다. 조부님의 말씀에 모두 감명을 받고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셨다. 2개월여의 긴 여행길에 여름철이었고 매우 지쳐들 계셨던 모양이다.
사교(社交)에 능한 백부님은 ‘기부금 걱정 마시고 산수 수려한 고을에 요양 오셨다 생각하고 한 일주일 푹 쉬어 가시도록’ 간곡히 말씀드렸다고 한다. 땀이 밴 내의를 모두 비벼 세탁을 해서 입혀 드리고 낮에는 숭어, 장어 낚시하고 밤에는 바둑 대항전을 펼치며 재미있는 4박 5일을 보내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으로는 애저(兒猪 : 새끼돼지 요리) 그리고 장어구이였다고 한다. 광양불고기 외에 이 두 가지가 그 고을의 자랑할 만한 요리로 지금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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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대 국무총리를 지낸 최두선 [출처 ; e영상역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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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떠날 무렵 백부님은 상당한 거액(巨額)을 약정하시고 하동, 순천 등지의 은행에 가셔서 약정금액의 반을 현금으로 찾아서 일행에게 챙겨 보냈다고 한다. 그 후 백부님은 사업상 상경할 때마다 이분들을 찾아뵙고 교우를 했으며 특히 매년 11월에 첫 김(海苔)이 출하되면 반드시 인촌 선생 댁과 최두선 선생 댁에 선물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최 총리께서는 흥분된 어조로 약 2, 30분 동안 우리 집안을 내빈들에게 자랑해 주셔서 매우 뿌듯함을 느꼈다.
최 총리께서 부연하시기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성북동 이집 말이야, 아주 어렵게 돈을 모아 건축을 시작했어.” 겨우 주춧돌을 놓을 무렵에 인촌 선생께서 모금운동을 함께 나가자고 재촉하시는 바람에 현장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3개월 후에 돌아와 보니 집이 완성이 되었다 한다. 전혀 당신의 설계가 반영이 되지 않아 불만이 많다고 하셨다. 어느 때 인촌 선생께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공선사후(公先私後)”라 하시드란다(최두선 선생은 나중에 총리와 적십자 총재를 그만 두시고 수유리 솔밭에 집을 지어 이사하시고 거기에서 호젓한 여생을 보내셨다.).
지금 생각해도 여기에는 많은 교훈이 담겨 있다. 선대(先代)에서 베푼 은혜가 후대(後代)에 반드시 축복(祝福)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나는 선대의 덕으로 이렇게 취직이 되고 비교적 일찍 주요 분야에서 일할 수 있었다.
총리실(總理室)에서의 근무는 편하고 재미있었다.
최(崔) 총리께서는 인자하신 할아버지 아니 자상하신 교장선생님 같이 느껴졌다. 전혀 관료사회의 위계질서나 권위 같은 것을 느낄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가끔 영문법에 관해서도 한 마디씩 하셨는데 “아니, 그것은 동명사가 아니고 부사야, 부사!” 하시면서 마치 고등학교의 교무실 같은 분위기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면서 편하게 해 주셨다.
나는 우선 정무비서실(政務秘書室)에 배치되었다. 무임소장관실에서 T/O 관계로 졸지에 3甲(서기관) 비서관이 되었으나, 총리실에서는 나의 이력을 재심(再審)한 결과 3乙로 시작하도록 했다.
외무관료 출신인 임(林) 실장은 원리원칙주의자였다. 그리고 매우 애국심이 강하고 국가관도 확실한 분이었다. 실장님은 처음에 나를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곁다리 유학이나 다녀온 젊은이로 생각하셨는지 모른다. 그러나 겪어 본 후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셨는지 많은 지도를 해 주셨다. 외국 대사(大使 : 케냐, 태국)로 나가 계실 때에는 집안일 등을 나에게 맡기시고, 작고하신 후에도 사모님이 자주 연락을 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