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林) 실장의 선친(先親)인 임학준(林學俊) 선생은 구한말(舊韓末) 우리나라가 배출한 첫 전기기사(電氣技師) 출신으로 상해(上海)에 망명을 가셨을 때에도 기사(技師) 자격증 덕분에 현지에서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있었다 한다. 그런 연유(緣由)로 임(林) 실장은 일찍 외국인 사립학교를 다니고 상해에서 기독교학교로 유명한 「세인트 존스」의 영문과(英文科)를 졸업하셨다. 그래서 중국어(中國語)뿐만 아니라 King's English를 제대로 구사한 분이었다. 그 실력 덕택으로 한독당(韓獨黨) 계열로 치부되었는데도 경무대(景武臺)에서 이(李) 박사를 모시기까지 했다.
자유당(自由黨) 때는, 김구(金九) 선생과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에 많은 견제가 있었고 외무부 내에서도 좋은 보직(補職)에서 항상 밀리곤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5.16 후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 가끔 총리와 임(林) 실장 자신의 사신(私信)을 영문(英文)으로 기안해 오라는 지시가 있었다. 나름대로 다듬어서 가지고 가면 많은 수정(修正)을 가해서 돌려준다. 하나도 불만이 없는 교정이었다.
구문(構文)이나 단어(單語)의 선택은 다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 내가 쓴 것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고쳐 주면 젊은 혈기에 자존심이 상하는 법이다. 그러나 임(林) 실장의 수정작업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고 ‘그래, 그렇지’ 하고 수긍할 수 있는 수정이었다. 많은 학습이 되었다.
정무실(政務室)의 첫째 임무는 각 부처(部處)에서 올라오는 국무회의(國務會議) 안건을 의결사항(議決事項), 보고사항(報告事項) 순(順)으로 분류하고 요약해서 총리께 올리는 일이었다. 쟁점(爭點)사항이 될 만한 것은 장관이 직접 총리께 사전(事前) 보고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정무실(政務室)에는 수명(數名)의 비서관이 있어 몇 개 부처를 묶어, 담당자가 지명되어 있었다. 나는 건설부를 포함한 몇 개 경제부처와 군(軍) 장교(將校) 출신이라는 이유로 국방부 업무도 담당했다.
두 번째 주요임무는 실제로 법령상(法令上) 총리실의 유일한 임무로 명시된 사항이다. 5 .16 혁명으로 중지된 지방자치법에 서울특별시의회 기능을 잠정적으로 국무총리가 대행하는 「서울특별시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있었다. 이 법(法)에 의하면 서울시의 조례제정(條例制定), 예산승인(豫算承認), 기채승인(起債承認) 그리고 예산(豫算) 외 의무부담(義務負擔)에 관한 사항은 총리가 자치법(自治法)이 시행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관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막강한 업무를 회계원(會計院 : 감사원(監査院)의 전신(前身)) 출신 서기관(書記官) 한 사람과 보조 사무관 단 둘이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 서기관은 대단히 유능한 당시로서는 회계의 대가였으나 서울市 일반회계(一般會計) 약 3억(三億 : 당시 부산시 세출예산(歲出豫算)이 약 1億, 이것도 김현옥(金炫玉) 씨가 취임해서 만든 예산이었음)을 일주일(一週日) 내에 축조심의(逐條審議)해서 승인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관료는 최대한 자기의 권한을 챙겨 보려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적극적인 쟁의(爭議)란 남의 권한 도치점(倒置點)이나 공백이 존재하면 빼앗아 오려고 한다.
나는 정무실 입실 후 약 5, 6개월쯤 후에 시정업무(市政業務)를 돕도록 지시를 받았다. 업무파악을 한참 하고 있는데 총무처(總務處)에서 시정업무(市政業務)를 주관하겠다고 나섰다. 이석재 총무처 장관은 혁명주체(革命主體) 중에서도 이론가로 자타가 인정하고 성격도 꼬장꼬장해서 대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분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하루는 총무처의 서(徐) 조직국장(組織局長)이 우리 사무실에 찾아와 장관과 총리 사이에 양해가 된 사항이니 시정(市政)업무를 인수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총무처와는 중앙청 3층에서 같은 층을 쓰고 있기 때문에 서로 왔다 갔다 하는 사이였다.
총리실 정무수석(政務首席)인 박정수(朴正秀 : 조달청 미주지역 구매관 이었다가 귀국한) 씨는 관료 출신으로서 가급적 총무처와의 마찰을 피하고 싶어 했고 입장이 난처하니까 풋내기인 나에게 실무를 맡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나는 시정(市政) 업무를 시작하면서 관련법규를 검토해 보았기 때문에 대항논리는 부족함이 없었던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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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장 임윤영 씨가 대사로 떠나고, 홍성철 실장이 부임했다. 앞 세 분 중 우측이 박승복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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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徐) 국장실로 옮겨서 토론이 시작됐다. 서(徐) 국장은 장관의 지시라면서 업무를 이양할 것을 강력히 요구해 왔다. 그러나 나는 특별법을 강조하면서 총리실의 확실한 업무인데 넘기려면 법을 개정하든지 해야 한다고 우겼다. 서(徐) 국장은 총무처 장관도 총리 보좌기관으로 보면 되기 때문에 업무를 위임만 하면 간단한 일이라고 역공을 해 왔다.
둘이서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는다. 서(徐) 국장이 잠시 밖으로 나가더니 약 5분 후에 돌아왔다. 이(李) 장관이 좀 보자고 하신단다. 따라 들어가니 이(李) 장관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귀관(貴官)은 왜 고집을 부리나? 총리실은 업무수행 능력이 없지 않냐 말이야!” 듣자하니 슬그머니 부아가 나는 순간이었다.
“능력이야 위원회 등으로 보완하면 되고, 저는 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했더니 장관이 아주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총리 각하와 이야기가 끝난 일이야!” 한다. “저는 아직 지시받은 바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서울 시정(市政)을 총무처(總務處)가 감독한다면 각 시도(市道)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내무부(內務部)와 싸우실 겁니까?” 했더니 장관(長官)이 대답을 못하고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신다.
서(徐) 국장이 나의 소매를 잡아끄는 판이라 슬그머니 밖으로 따라 나왔다. 밖에서 듣자 하니 “뭐 저런 친구가 다 있어!” 한다. 내가 총리의 부하인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서울시(市)에서는 총무처나 내무부의 감독을 받는 것을 결사반대하고 있던 때였다. 슬그머니 이(李) 장관과 윤치영(尹致英) 시장 사이에 싸움을 붙이는 것이 오히려 쉬운 해결 방법이 아닌가 생각했다. 두 분의 용호상박전은 볼만할 것이라고 상상하면서 혼자 실소(失笑)를 금치 못했다.
돌아와서 박(朴) 비서관에게 그런 경과를 보고했다. 임(林) 실장 방으로 갔더니 최(崔) 총리께서는 약속하신 바 없고, 아침 Coffee Time 때 장관이 지나가는 말로 서울 시정(市政)의 방만한 운영을 걱정하면서 좀 챙겨보겠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오고간 것으로 말씀이 나왔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李) 장관은 몹시 심기가 불편했단다. 나의 배경에 대하여도 좀 알아본 모양인데 ‘아버지는 여당 국회의원이요, 좀 상대하기 버거운 일군사령관 서종철(徐鍾喆) 장군의 부관(副官)을 지냈고, 장관과 가까운 친구이며 혁명주체의 동지인 박원빈(朴圓彬) 장관의 비서를 했고 또 2, 3개월 전에 유학(留學)에서 돌아온 원칙에 충실한 풋내기 관료’ 라는 것을 알았는지 더 이상 이 문제에 말썽이 없었다. 그분과는 그 후 초창기 예비군 조직(豫備軍 組織) 때에 자주 만나 편안한 관계가 되었다.
여하튼 거대한 서울시를 감독하기에는 총리실의 인원과 조직으로서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해 연말에 예산심의(豫算審議)때부터 관계부처의 쟁쟁한 과장급(課長級), 기획원(企劃院) 예산국(豫算局)의 베테랑 유필우(柳必雨) 과장, 내무부 지방재정과장(地方財政課長) 그리고 총리실 산하 기획조정실(企劃調整室)의 조정관(調整官), 행정개혁조정위원회(行政改革調整委員會)의 국장급을 망라한 심의위원회(審議委員會)가 조직되어 심도 있는 예산검토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경제기획원(經濟企劃院)의 산업계획국장(産業計劃局長)으로 있던 심창유(沈昶裕) 씨가 정무비서관이 되면서 시정(市政) 감독기능이 강화되었다. 그 후 정일권(丁一權) 총리가 부임하면서 정무비서관 자리가 1급(一級)으로 격상되었고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계시던 박승복(朴承復) 씨가 입성하게 되면서 시정(市政) 감독은 본 궤도(軌道)에 오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