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에서 귀국한지 일 년 만에 막내딸 성미가 누상동 이수정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1964년 6월 15일 새벽 2시, 천장에 매달린 전기불이 눈에 뿌옇게 인멸되는 순간 아기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전기불이 눈에서 사라지는 것은 매번의 통과의례이고, 진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3일간 요양 후 세검정 집으로 돌아왔다. 세검정 집은 피난집이나 다름없었다. 전세방을 전전하기 싫어서 간이 살림집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이제 아이들 셋에 우리 내외, 다섯 식구가 방 하나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워졌다.
생활은 박봉이었지만, 과외수업(인근에 사는 대학 진학할 사대부고 학생 2, 3명의 영어 과외지도를 함), 큰댁에서의 보조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에 서울에 자기 집이라도 한 채 가지고 있으면 부자였다.
어느 날 같이 근무하던 김형무(金炯武) 씨가 솔깃한 제의를 해왔다. “형님! 나의 가까운 분이 홍제동에 택지개발을 하고 있는데, 땅 하나 사서 집 짓고 이웃하며 삽시다.” 한다. 귀가 확 틔는 제안이었다.
다음날 현장에 가 보니, 진입로가 다소 가파르고 옹색하지만 차는 다닐 수 있고, 정남향으로 아늑한 자리였다. 다만 건너편 안산 아래 장제장(葬祭場)인「홍제동 화장터」가 있는 것이 좀 꺼림칙했다. 김형(金兄) 왈, 화장장이 1년 후에 벽제로 이전하게 되어 있으니 걱정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단지(團地)개발의 첨병 역할(제일 먼저 와서 집 짓고 사는 사람)을 하게 되니 땅값도 아주 싸게 제의했고, 월부로도 가능하단다. 당장에 계약을 했고, 김형무 씨는 위 터로, 나는 길 하나 사이에 아래 터를 선택했다.
아내도 인근에 마산여고 동창 김영옥(金英玉), 임영애(林英愛) 씨가 거주하고 있어 그쪽으로 이사 가는 것에 대환영이었다. 그리고 세검정 상명(祥明)국민학교에 다니던 큰딸과 아들은 스쿨버스로 등교가 가능했다.
모든 것이 안성맞춤이라 곧 건축허가를 신청하면서 자재를 수배하고 착수했다. 네모반듯한 단층집으로 방이 두개, 서재 그리고 부엌이 딸린 벽돌집이 되는 것이다.
퇴근 후에 매일 현장에 가보면 조금씩 집의 형태가 이루어지는데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건축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매우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약 60여일의 작업 끝에 드디어 살 집이 완성되었고, 도배까지 끝내니 이것은 완전히 대궐이었다. 30평인데 전기가 들어오고 수도까지 연결되니 호화판 생활로 생각되었다. 아내는 거의 매일 현장에 매달려 있었고, 그 더운 여름에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리면서 집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아뿔싸,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마지막 「슬라브」를 치는 물 공사하는 날 이상기온으로 북풍이 몰아치면서 갑자기 영하 7~8도로 급냉해지고, 도급업자는 가마니, 돌가루 종이 등으로 슬라브가 얼지 않도록 응급조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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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년 홍제동 양성화지구의 모습 [출처 ; 서대문구청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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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1월 초순이었다. 약 일주일 후에 거푸집을 뜯어내는데, 슬라브는 온전해 보였고, 내장(內裝) 일을 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손수 지은 집인지라 각별한 애착도 있었다. 기본 설계도 외국에서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택했기 때문에 「레이아웃」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땐가 여유가 생기면 2층으로 증축할 수 있는 설계도를 채택했다. 온 가족도 만족해하고, 아이들도 각방을 갖게 되니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이듬해 3월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하면서 천장에서 빗물이 줄줄 새는 것이다. 급한 김에 비닐을 치고, 한쪽에서는 동이, 대야에 물을 받고 야단이 났다. 한두 곳이 아니라 슬라브 전체가 문제다. 아마도 갑작스런 추위에 물 공사가 얼어버리고, 양생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급히 청부업자를 불러 대책을 세웠다.
우선 방수공사라고 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100% 보장할 수는 없단다. 예측한 대로 전보다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군데군데 새고 있는 것이다. 재시공을 하고 2층을 올려야 누수를 완전히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아래층 시공과 땅값에 전력투구를 했으니 증축할 여유가 전혀 없어 난감했다. 큰댁에 지원받은 것이 있으니 또다시 손을 내밀기 어렵고, 형님한테로 찾아가 상의했다. 일부 도와주기로 약속을 받고, 우기(雨期)에 앞서 빨리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착공했다.
살림을 하면서 집을 고친다는 것은 상상 외로 어려운 것이었다. 여하튼 외상 등으로 최대한 융통하면서 30여일 만에 드디어 2층이 완성됐다. 우리에겐 대궐 같은 집이었고 부족함이 없었다.
두 번에 걸친 건축을 통해서 아내는 집짓는데 이력이 생겼다. 부분적으로 도급을 주고 직영하면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옆 공터에 하나 더 지어서 팔기로 작정했다. 땅 주인에게 상의했더니 쾌히 사용동의를 해 주고 집이 팔린 후에 땅값을 치르기로 약정이 성립됐다.
한참 새집을 짓고 있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사겠다는 작자가 생기고 쉽게 명도가 이루어졌다. 천운이랄까, 모든 것이 이렇게 훌륭하게 척척 맞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이제는 여유가 생기고 새집 짓는데 좀 넉넉한 마음을 갖고 건축을 추진할 수 있었다. 2층에 벽난로를 넣고, 마당에는 아이들을 위한 조그만 수영장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아버님도 몇 차례 와 보시고 며느리를 칭찬하시면서 “너, 사주(四柱)에는 권(權)이 두 개가 들어있어 남자라면 공직(公職)이나 정치를 해야 하는데, 여자니까 창조적인 일, 즉 건축이 팔자에 맞는 모양이다.” 하셔서 모두 웃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할까, 그해 연말에 형님이 KAL기(機) 사건으로 납북되어 온 집안이 수심(愁心)에 잠기고 말았다. 그 해가 아버님 회갑이었는데, 행사도 중단되고 무사귀환만을 고대하는 지경이 되었다.
형님은 사회 성분으로나 공무원이라는 신분으로나 그리고 엽총까지 가지고 탑승했으니 돌아오기 어려울 것으로 나는 짐작했다.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집 짓는데 그렇게 도와주신 형에 대한 의리 등으로 내심 형님 가정을 내가 앞으로 책임지겠다는 각오까지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