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아지트 습격 (15회)

순식간에 위, 아래로 포위를 했다. 첨병을 이끌던 경위에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도록 소리 지르기를 명했다. BAR 몇 발을 쏘고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나와서 투항해라.”고 고함을 질렀으나 기척이 없다가 갑자기 저쪽에서 총성이 났다. 일제 사격 명령이 내려지자 콩 볶는 소리가 난다. 산울림까지 겹쳐서 순식간에 요란한 전쟁터가 됐다. 나도 가세해 난생 처음으로 인간을 표적으로 ‘카빈’총을 쏘아댔다.

정조준을 훈련 중에 귀가 아프도록 들었건만, 총구만 대충 그쪽으로 대고 방아쇠만 정신없이 당긴다. 약 10분 후 사격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첨병 중 한 사람이 재빨리 아지트 토치카가 있는 쪽으로 자세를 낮추고 달려가더니, 수류탄을 한 번, 그리고 두 번 핀을 뽑아 토치카에 집어넣는다. 쿵-쾅 하더니 사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태풍이 멎은 뒤의 고요함이다.

포위 상태에서 일개 분대를 내려 보냈다. 적들 일부는 이미 도피했고, 사망자 및 부상자 등 10여 명이 남아 있다가 사살된 모양이었다. 각종 총기 약 15정과 탄약, 수류탄을 수습했고 일부 서류뭉치가 나왔는데 경북 영주군 인민위원회의 일부 요원과 인민군 장병들의 집합체로 보였다.

10명 중 중상을 입은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대퇴부에서 허리 쪽으로 관통 당했지만 아직도 맥박이 뛰고 있었다. 위생병 책임자 Sgt. Papas가 이리저리 살피더니, 출혈이 심해서 응급처치를 해도 후송할 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렘지 부대장이 나를 부르더니, 후미 BAR 사수에게 부상자를 다른 사망자가 있는 적의 아지트에 끌어다 넣고, ‘안락사’로 처치하도록 명했다.

우리는 부대를 정돈하고 출발, 하산을 시작했다. 약 10분을 행군하자 후미에서 BAR소리가 요란했다. 약 10여발이 두르륵 나간 것이다. 행군하던 렘지 대위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갓뎀!” 하면서 매우 불쾌해 했다. 이유인즉 처치는 한두 발이면 족하지 10여발을 쏘는 것은 과잉행위로서 비인도적이라는 것이다.

귀대한 그날 밤 BAR 사수는 앞으로 3일간 ‘호 파는 노동(Hard labor)’ 처분을 받았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이지만 인도적으로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미국 보병 장교들의 철저한 마음가짐은 본받을 만 했다.

희생자 없이 작전을 무사히 마친 부대장은 다음날 제천 근방에 주둔하고 있던 미 10군단 사령부에 노획한 무기를 전하려고 의기양양하게 갔다. 나를 포함한 3, 4명의 병사가 15~16정의 총기를 각각 나누어 들고 G-3(작전처(作戰處))라고 표시되어 있는 막사로 들어갔더니 “갓뎀”, “지저스 크라이스트” 욕지거리를 하며 고함을 지르며 고급장교 한 사람이 튀어나온다.

우리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재빨리 렘지 대위가 “Yes, Sir!” 하더니 우리더러 “Out.”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엉겁결에 밖으로 나왔다. 다시 들어간 부대장은 한참 만에 나왔다. 부대장이 나온 후 병기참모부에 들러 접수하고 부대로 되돌아 왔다.

오는 도중 렘지 대위도 어이가 없었는지 우리에게 미안해했다. ‘아까 그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 중세의 못된 귀족 중 한사람’ 이라고 일괄하고, 우리에게 사과 겸 한마디 했다. 아마도 적에게서 노획한 더러운 물건(병기)를 어디라고 감히 참모부에 가지고 들어오느냐는 것이었으리라.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그 더러운 무기를 빼앗아 오는 우리 야전군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도 그 광경을 생각하면 섭섭하고 울화통이 터진다. 상부와 말단의 괴리는 있기 마련이지만, 언제나 위에 있는 사람은 아래를 보살피고 그 애로를 이해하는 자세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전이 없을 때는 의무실을 중심으로 대민봉사에 많이 힘썼다. 총상을 입은 사람, 피난 중 다친 사람, 등창 등으로 모진 부스럼에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이 피난길에 올랐지만 일부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은 그대로 남아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

영춘에서는 우리 식량을 줄이고 마을 사람들에게 C-레이션을 마구 풀었다. 당시 피난 도중 영월 근처에 있는 철도 터널에 숨어있다 우군기에 폭격을 당해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일이 있었다.

그중 24~25세 됨직한 어느 애기 엄마는 젖가슴에 파편이 박혀 빨갛게 상해 있었다. 남편은 전쟁에 나가고, 시아버지하고 아기하고 기구하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녀는 민간요법으로 환부에 고약을 붙이고 있었는데, 위생병이 그 고약을 떼어내자 차 있던 고름이 왕창 쏟아지는 것이다.

고름이 다 쏟아지자 한바가지나 되던 애기 엄마의 젖가슴이 갑자기 반으로 쪼그라든다. 소독 거즈로 상처부위를 닦아내고 거즈로 채우고 해서 ‘페니실린’ 주사를 한대 놓았다. 미국 위생병의 솜씨는 날랬고, 나는 그 병사가 거룩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녀는 다음날 다시 드레싱을 하러 왔다. 고름도 많이 적어지고, 오래간만에 잠을 푹 자고, 보채는 아이에게 한쪽 젖을 물리고 잤다 한다. 눈물겨운 일이다.

나는 그때 ‘페니실린’의 위력을 실감했다. 치료 3일 만에 쪼그라든 젖가슴이 살아나는 것이다. 속살이 벌겋게 솟아오르고 외부 모습이 정상 젖가슴으로 변해오는 것이 아닌가. 참말로 기적의 주사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