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님의 작고로 우리 집 대들보가 사실상 무너지고, 그 이후 우리 큰댁 가세의 전진은 중지되고 말았다. 효자에게도 재앙이 닥친 것이다.
백부께서는 부산에 내려오셔서 철도국장 관사에서 편하게 지내셨으나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님이 걱정이 돼서 안절부절 못하셨다고 한다. 당시 백운산과 지리산에는 많은 빨치산의 출몰로 특히 하동, 구례, 광양 등지의 산촌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철도국, 경찰, 우체국 전화로 할아버님은 무사하시고 또한 여덟째, 아홉째 삼촌이 잘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부님은 이름 있는 효자인지라, 하루 속히 당신을 가서 뵙고 직접 모셔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모시러 가시다가 세상을 떠나시게 됐다고 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지금 고향의 선산 양지바른 좋은 자리에 세 분의 묘를 모시고 있다.
전북 경찰국(全北 警察局)에 계시던 여섯째 정주 삼촌은 경남 부산지방 경찰국 사찰과장(査察課長)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계셨다. 당시 사찰과는 사상관계(思想關係)를 담당했다. 정주 삼촌이 이런 중책을 맡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 정부가 부산에 피난정부를 열게 되자, 민심 수습 차원에서 대대적인 내각 개편이 있었고, 조병옥 박사가 내무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조 박사는 자기가 아끼던 다섯째 계주 삼촌을 경찰국장으로 발탁할 생각으로 수소문했던 모양인데, 계주 삼촌이 납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인 정주 삼촌을 불러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게.” 해서 20대 후반(29세)인 삼촌을 사찰과장으로 기용했다는 뒷이야기를 들었다.
이래저래 약 1주일이 지났다. 갑자기 생활 패턴이 바뀌고 피난 부산의 무질서와 돌아가는 일들이 모두 혐오스러웠다. 피난 중에도 경남도청 강당에서 개최한 국회는 매일 싸움박질이고, 계엄령도 소용이 없었다
경남중학교 동기(5회)들도 대부분 출전하여 헌병 7기(憲兵 7期)에 많이 입대했는데, 금화지구(金化地區)에서 아침 구보 중 적의 정찰대 기습을 받아 몽땅 죽었다. 남아있던 일부는 전시 연합대학(戰時 聯合大學)에 원서를 내고 있었고, 일부는 공군, 해군 등 군 입대를 서두르고 있었다. 학교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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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당시 부산 피난민들의 모습 [사진출처 : 국가기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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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집에 돌아와 보면 좁은 방 두 개에 여덟 식구가 오개조개 끼어 자는데, 어디 몸 붙일 데가 없었다. 형님은 시골에 계시다 부산으로 피난을 와 경찰에 들어갔다. 그런데 부산을 중심으로 양산, 밀양 등지에서 출몰하는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동래병원에 누워 있었다. 이런 저런 상황이 나로 하여금 부산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어느 날 답답한 심정을 철도국장 작은아버지께 가서 말씀드렸더니, “너는 영어를 하니까, 부산에 남아도 소일거리가 있는데......”하신다. 그러나 전방으로 가고 싶다고 했더니, 여기저기 연락을 하시더니 마침 강원도 원주역 R.T.O(철도수송지휘부 : Railroad Transportation Office)에 통역이 필요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여행증을 만들어 주셨다. 취직이 된 것이다.
열차를 여러 번 갈아타며 이틀 만에 원주역에 도착했다. 이제 겨우 몇 개의 인입선이 가설되어 있고, 미 제 439공병단의 주관 하에 원주역 일대를 대대적으로 개발해 중. 동부 전선(中. 東部戰線)의 보급기지로 조성하고 있었다. 도착하던 첫날부터 객차에 마련된 R.T.O에서 근무했다. 식당, 침실이 모두 객차 안에 마련됐다. 미군 사병 3명이 근무하고 있었고, 책임자는 439에서 파견된 준위가 와서 지휘했고, 밤이면 본대 막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민간인으로서 철도국 직원으로 역장을 비롯하여 약 10여명이 원주역에 근무하고 있었다. 처음 발령은 철도국 파견요원 이었으나, 현장에 도착해서 미군 R.T.O요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급료문제로)
우선 철도에 관한 용어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각종 기관차와 객차 및 여러 종류의 화물차 등, 그리고 역사(驛舍) 내의 통신시설(원주 구(舊) 역사는 완전 파괴되었음), 홈과 조차장(操車場)의 각종 철로 및 분기점의 포인트 등을 금방 익히고, 통역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일주일 이내에 숙달되었다.
문제는 같이 생활하는 미군 선임하사 Mr. Walker 이었다. 미국 남부 알라바마주 출신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대단한 자였다. 약 한 달이 지나면서부터 둘이서 싸운다. 한국 사람을 “Guk, Guk” 하면서 폄하하고 욕하는 데는 아주 질색이었다. 아마도 미국 내부에서 흑인을 다루던 그런 선입견이 머리에 꽉 찼는지 아무리 선한 방법으로 납득을 시키려 해도 통하지 않았다.
부딪히기만 하면 싸운다. 전방의 보병부대 또는 특수부대에서의 미군과는 완전히 질이 달랐다. 할 수 없이 책임자인 준위에게 보고를 했더니, 그때뿐이고 개선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약 2개월 버티며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 시내 어느 식당에 갔다가, 나의 종씨(宗氏)로 평소에 무척 좋아하던 김용규 형(金龍圭 兄 :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 재학 중 6.25가 터짐)을 만난 것이다. 그는 지금 양구 근처의 미군 이동외과병원의 한국인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거기는 의사, 간호사 등 인텔리 집단이기 때문에 근무하기 편하고, 보급품이나 식사 등이 아주 고급이라 했다. 귀가 솔깃했다.
자리를 옮길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고, 그전에 화상을 크게 입은 팔의 부위가 아물긴 했지만 온도변화에 민감하고, 당기면서 가려울 때는 박박 긁어 피가 나곤 했던 것이 미군의 유능한 외과 의사에게 상의하면 무슨 방법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용규 형님에게 이야기 했더니, 유능한 외과의사, John's Hopkins 그리고 하버드를 졸업한 최고 외과의사, 심지어 뇌수술을 하는 신경외과(당시에는 최첨단 의학)팀이 병원에 배속되어 있다고 한다.
다음날 형님을 따라 붙기로 했다. R.T.O에 와서 책임자에거 3일 간의 휴가를 허락 받았다. 나 없이 한번 당해봐라 하는 행패 섞인 고약한 마음도 작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