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 3월의 격전지였던 횡성을 지나고, 국군 6사단(6師團)이 중공군의 공세에 크게 당했던 사무라치(삼마치) 고개, 홍천을 지나 관대리에 도착했다. 미 제10군단 사령부가 있었다. 7, 8개월 만에 10군단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험한 고갯길을 넘어 드디어 양구 입구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이동외과병원에 도착했다.
다음날 호인형인 외과 과장을 만나 나의 팔을 보였다. 또 하나의 의사(성형외과 전문의 정도로 생각된다)가 합류해서 이리 비틀고 자리 비틀면서 상처를 꾹꾹 눌러보기도 한다. 대단히 동정적인 눈치였다(아마도 미, 소의 이념전쟁에서 희생된 어린 학생, 그 모진 고난을 이겨낸 젊은이가 불쌍하다 생각한 모양이다). 용규 형님이 화상에 관한 역사를 잘 설명해줬던 모양이다.
예쁘게 생긴 금발의 간호장교가 왔다 갔다 한다. 아주 평화스럽고, 완전히 별천지 같았다. 치료 방법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한다. 흉터를 다소 적게 만들려면 성형수술을 해야 하는데, 엉덩이 또는 발, 대퇴부 등에서 피부를 떼어내 이식하는 수술을 받던지, 아니면 멘솔 비슷한 연고를 계속 바르면서 피부를 무마시키는 방법이 있다 했다. 뼈 움직임에는 전혀 이상이 없고, 팔을 사용하는 데는 이렇다 할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보기에 흉측하고 당기고 가려운게 문제였다.
수술을 완전히 끝내려면 약 2, 3개월이 소요된다고 했다. 다른 몸 부위에서 피부를 떼어낸다면 거기도 흉터가 생긴다. 온 몸이 흉터 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수술을 아니 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의사들도 잘했다고 동의하면서 “Good luck!” 한다. 너무 감사했다.
온 김에 X-Ray 등 기본적 건강 체크를 받았다. 그런데 안과에서 무슨 안약을 넣는데 금방 초점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안과 진단 방법이었던 모양인데 회복하는데 하루가 걸렸다.
떠나는 날 아침 인사차 병원장인 L.T.Col Hayes를 사무실에 들어가 만났다. 아주 준수하게 생긴 머리가 허연 인자한 분이셨다. 자기 소개를 하면서 부모님 그리고 친척들이 한국 선교사로 활동한 집안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 많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참 좋은 만남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Mr. Kim(나를 가리킴)이 만일 원한다면 병원에서 통역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일단 전황이 급박해져서 부상자가 발생하면, 우선 인근 병원에 후송해서 응급처치를 해 주는 것이 UN군의 규칙이었다. 따라서 전상(戰傷)을 입으면 K.S.C 요원, 한국군, 미군은 물론이고 이 이동 외과병원에 「앰뷸런스」 또는 「헬리콥터」로 실려 오는 이는 무조건 응급처치부터 한다. 죽으면 시체로, 살면 안정된 후에 소속 군(軍)으로 이송하는 것이다. 한국인 부상자도 많이 들어온다. 통역과 한국군 이동외과 병원과의 Coordinator(조정자, 협력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심 병원에서 편히 근무하면서 미국의 인텔리들과 생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보금품 수령차 원주로 가는 이동외과 병원차를 타고 4일 만에 원주 R.T.O에 귀대했다. Sgt. Walker는 그동안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매우 고생을 한 모양이어서, 나를 반기는 기색이었지만 또 하루 이틀이 지나자 그 나쁜 근성이 튀어나와 다시 오만 불손하기 짝이 없다.
“I will quit. No way to work with you! Period.”(나 그만둔다, 당신하고는 더 이상 같이 일 못하겠다. 이제 끝장이다) 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면서 “Where are you going?” (어디로 가느냐?) 한다. “None of your business.”(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라고 쏘아 붙였다.
미 439공병단은 계속해서 동하, 지평, 양평 그리고 양수리 철교에 이르는 철도 복구에 전력을 다 했다. 그리하여 서울까지의 중앙선(中央線) 철도가 드디어 개통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양구 이동외과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1951년 어느 늦은 가을, 양구의 미군 이동외과 병원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용규 형은 한국인 전체 근무자의 책임자이고, 나는 병원(ward) 내의 의사들, 특히 외과 의사들과 같이 일했다. 인텔리 그룹과의 일을 배울 것도 많았고, 영어가 틀리거나 간혹 내게서 G I English(군인 졸병들이 사용하는 영어)가 나오면 교정을 해주는 자상한 분들도 있었다. 특히 간호사들이 어린 High school boy가 집을 떠나 전방에서 근무하는 것이 안타까운지 신경을 많이 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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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구에 주둔하고 있던 미 MASH HOSITAL에서 김용규 형과 함께 / 뒷줄 가운데가 필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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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좋은 것은 식사의 질이 일등이다(한국인은 별도의 취사를 했으나, 책임자, 통역 등 4, 5명은 미군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러다 한식이 먹고 싶으면 언제나 쌀밥, 김치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기름 등 연료가 풍부해서 그 추운 삭풍 속에서도 우리 막사는 항상 따뜻했다.
미 10군단이 북진 당시 함흥에서 합류한 한국 의사(Dr. Lee) 한 분이 가족과 함께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920년대에 「세브란스」의전을 나오시고 고향 함흥에서 공의(公醫) 개업을 하고 계셨는데, 해방 후 5년을 공산당 치하에서 고생을 많이 하신 모양이다.
특히 이 가족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다. 병원 주둔지 주변에 한국교회가 없으니 영어로 설교하는 병원교회에 이 선생님은 꼭 참석하시고, 가족예배도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휴전 후 제대를 하고 부산에 내려와 개업하였고 아이들 셋이 모두 좋은 대학에 진학하였다.
어느 날 병원에서 서양장기의 일종인「체스」천재를 만났다. 약국장(藥局長)을 하고 있는데, 자신은 유태인 출신이고 New York에서 약방을 경영하다 입대했다는 사람이다. 아주 가냘프고 깨끗하게 생긴 하사관 출신인데, 한국 장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는 우리 장기의 말 가는 법을 대충 가르쳐 주었더니, 나하고의 대국 세 판 만에 완전히 터득을 하고 나에게 강한 적수가 되었다. 다음날부터는 열 번 두면 열 번 패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저도 재미가 없었던 모양인지, 나하고는 대국을 하지 않고, 한국인 종업원 중 몇몇 고수들을 찾아가 도전하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매니저」가 된 셈이다. 두세 판 뒤에는 병원 전체를 석권했다. 알고 보니 이 약국장은 New York의 체스 챔피언이며, 이름 있는 선수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