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행주 삼촌에게서 약 100호가 있는 우리 마을의 근황을 대충 브리핑 받았다. 다행인 것은 里인민위원장인 양도만 씨가(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집사였음) 치우치지 않고 원만하게 처신하고 있으니 걱정이 없다고 했다. 다만 야간에 해안가 방어진지 구축에 동원되는 일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우리 면(面)에서는 아직 강제의용군 모집은 없고 지원자 중심으로 보내지고 있다고 했다. 다만 젊은 사람이 많이 몰려다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주간에는 근신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따라서 낮에는 큰댁 뒤에 거대한 대밭이 있었는데 가운데쯤 대나무를 자르고 공터를 만들고 평상을 놓고 「아지트」 를 만들었다. 밤에는 나와서 다니다가 마을의 친한 집에 가서 잠자리 신세를 졌다.
어느 날 막내삼촌을 대신하여 해안선 방어 교통호 축성 작업에 자진 참가했다. ‘왼쪽 손을 동여매고 있으니 심한 일을 시키진 않겠지, 그리고, 연행은 아니 하겠지’ 하는 자신감에 일행에 따라 붙었다. 요는 머릿수가 문제였으니까.
초저녁 약 두 시간을 걸어 지금의 광양제철의 뒷산 골약면 금호리에 있는 높은 능선을 따라 기나긴 교통호를 만들고 있었다. 따발총을 멘 인민군 병사가 작업을 지도하고 있었다. 나는 삽으로 조금씩 흙을 떠서 올리는 정도의 일을 했고, 힘든 일은 마을 어른, 장골들이 해냈다. 새벽이 되자 나뭇가지를 꺾어 작업장을 대충 덮어 놓고 철수했다. 낮에는 매일같이 제트 전투기 또는 종종 무스탕(F-51)이 날아와 정찰하고 가는데 F-51은 대부분 태극기를 달고 있었다. 쳐다볼 때 마다 모두들 흐뭇한 모양이었다.
새벽녘이면 수 백 명의 의용군이 우리 마을로 들어와 주로 우리 큰댁의 안사랑, 바깥사랑에 진을 치고 있다가 오후 6시쯤 되면 썰물처럼 하동 방향으로 빠져나갔다. 가끔씩 대화를 해 보면 충남, 전북, 전남 지역에서 모집된 우리 또래의 학생들이 대부분이고 마을 또는 학교 단위가 많았다. 어떻게나 인민군의 각종 노래, 적기가, 그리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불러대는지 체계적으로 교습을 받지 않아도 어느덧 나도 모르게 그들의 모든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혼자 생각엔 남쪽에는 파란만장 해외에서 40여년을 독립운동을 해왔던 이승만 박사, 백범 김구 선생님이 계시는데 왜 찬양하는 노래 하나 없는가? 독립운동의 경력도 비교가 되지 않고, 내세우는 보천보(普天堡) 대첩이라고 하는 만주 일대에서의 항일투쟁이라 해도 철기 이범석(鐵驥 李範奭) 장군의 청산리(靑山里) 전투에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저들은 그때부터도 노래 등으로 벌써 수령 유일체제의 길을 굳히고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지난 60여년의 북한 권력 투쟁사를 보면 너무 자명하다.
첨언 / 일차적으로 한국전쟁 실패의 책임을 씌워 박헌영 같은 알짜 공산주의자, 남로당 지도자, 그리고 이강국(李康國) 같은 핵심이론가를 숙청, 형장의 이슬로 끝을 내고 그것도 남쪽 공산주의자에게 가장 치욕적인 죄명인 「美國의 간첩죄」 를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 같이 월북했던 중견들은 살아남기 위해 충성맹세를 하고 지방 농촌으로 하방(下放), 거기서 생을 마감한 이가 대부분이다. 다음에는 북한정권 수립을 도왔던 소련파(蘇聯派) 를 숙청 귀환시키고, 끝으로 남아있던 중국출신 연안파(延安派 : 인민군 창설의 핵심이며, 南侵 時에 최선봉에 세웠던) 마저 숙청, 무력화시켰다. 그리하여 남로당 제거 시작부터 10년 이내에 김일성 유일체제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라디오, 전화 등 통신수단이 없는 시골마을에서는 전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시골에 내려온 지 약 3, 4주 쯤 후에 사발통문이 도는데 UN군의 대부대가 진주 쪽에서 하동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쩐지 2, 3일 전부터 그 많은 의용군의 발길이 뚝 끊어진 상태였다. 우리 가족 중 장정들과 뜻이 통하는 마을 청년들은 조(組)를 짜고 일진, 이진 해서 마을 뒷산, 옛날 봉화대가 있는 <고무니 산> 에 올랐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섬진강 바로 건너 진주에서 하동으로 넘어오는 황토재(채병덕 전 육군총참모장이 급한 김에 국군병력을 이끌고 남하하는 인민군을 막겠다고 진주에서 하동으로 가던 도중에 인민군의 기습을 받고 전사한 그 유명한 재)에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수많은 UN군의 기갑부대를 눈 아래 본 것이다. 진격부대 전방에는 계속 전투기가 날라 다니면서 엄호를 하고 있었다. 방향은 구례 쪽이었다.
누가 선도할 것도 없이 우리는 “대한민국 만세” 를 소리높여 외쳤다. 외치고, 또 외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절로 터져 나왔다. 감격의 한 순간,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을 광경이었다.
모두 마을로 내려와 우리 큰집 바깥사랑에 집결하고 국군, UN군을 환영할 준비를 하기로 하고, 우선 숨어있던 농업학교의 미술선생을 불러 광목으로 플래카드를 만들고 우리들은 한지를 찾아내 태극기, 미국기를 밤새 만들었다.
그러고 있는데 아뿔싸, UN군이 우리 쪽으로 오지 않고 계속 북진(北進)만 하는 것이 아닌가? 섬진강 이쪽은 완전히 진공상태가 되고 말았다. 진상보안서 지소에서 우리 동네 불순분자를 색출하려고 곧 달려온다는 소식까지 들려온다. 우리는 작업물을 모두 치우고, 대밭 그리고 뒷산으로 모두 튀어 도망갔다.
곧이어 연락이 왔는데, 보안대 관련자들과 지방 좌익골수분자들은 백운산(백운산~지리산 끝자락) 쪽으로 입산했다 한다. 그 소식을 듣고 모두는 안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2년 동안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과의 치열한 공방과, 지방의 많은 무고한 양민들의 떼죽음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 정권이 받아주지 않아 복귀를 거부당한 많은 빨치산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저항하다 고혼이 되고 말았다.[빨치산 출신 이태(李泰)의 증언]
인천 상륙으로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되고 38선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을 접한 지 며칠 후 육군 중령 계급장을 달고 권총까지 휴대한 희주(순천 철도국장, 그리고 교통부 후생과장을 역임한 분으로서 군 수송관으로 특별임명 됨)숙부님과 운전병이 GMC 트럭을 가지고 시골로 오셨다. 영자 동생은 오빠인 진규 형님에게 맡기고, 나는 숙부님 가족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순천역에서 트럭을 열차에 싣고, 가족은 모두 화물칸에 탄 채 상경하는데 남원, 전주를 지나 이리(裡里)에서 다시 트럭에 타고 대전 근방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리까지 오는 도중 경찰 병력이 열차에 동승해서 산악지대를 통과할 때 계속해서 위협사격을 하였다. 패잔병들이 수시로 출몰해서 열차를 공격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새벽 다시 트럭에 올라 서울로 달렸다. 호남 쪽과는 달리 중간 중간 쌍방의 격전이 있었던 곳이 정리가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천안 가까운 서정리에서는 불에 탄 인민군 탱크 4대와 부서진 야포들을 봤다. 야포는 한결같이 포구가 빠개져 벌어져 있었는데, 남은 포탄을 모조리 사용하여 최후까지 무리하게 쏜 탓이다. 아마도 소련제 대포들의 금속 재질이 좋지 않은 점도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오는 도중에는 많은 중소도시가 파괴되어 있었다.
한강인도교에 오후 2시쯤 도착했다. 다행히 미군들이 부교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어 무사 통과, 드디어 용산 철도관사에 이르러 해산했다. 걸어서 필동 집으로 갔다. 용산역과 서울역 근방이 많이 파괴되어 있었으나 우리가 거주하는 필동 일대는 온전했고, 가족도 모두 무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