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황이 고정되면서 의용군 모집이 본격화되었다. 각 학교별로 등교학생을 무조건 의용군에 강제지원 시켜 간단한 소총훈련 후에 남하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좌익학생들의 자진입대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병력이 부족해지니까 동(洞) 단위로 강제징집을 했다.
물론 의용군이니까 형식은 조국통일, 해방전선에 영웅적 참가라는 명분이었다. 인해전술의 수단으로 이용된 이들은 무기도 소지하지 않고 맨몸으로 야간 도보행군으로 전선에 내려갔다. 부상자, 사망자의 무기를 회수해서 지급하는 것으로 거의 육탄 투입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어머님이 나가시더니 한참 만에 돌아오시면서 나에 대한 의용군 문제로 동 인민위원회에서 다녀갔다고 하신다. 식량 구하러 산골에 갔다고 했으니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앞으로가 문제라고 하신다.
마침 돈암동에 사시는 사촌형님 진성(秦成)이 우리 집에 들렀다. 역시 의용군 문제로 피신을 온 것이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사촌형님은 나보다 다섯 살이 위였고 모험심과 투지가 만만치 않은 분이었다.
협의 끝에 지방으로 일시 피신을 가기로 결정했는데 위장을 하기 위해 용산 철도 관사에 사는 또 하나의 사촌동생 진식(秦式)이를 대동하기로 했다. 진식이는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다. 우리는 용산역 근방에 살다가 폭격으로 집이 없어지고 가족이 모두 흩어진 피난가족으로 위장했다.
우리 세 사람에다 윤응철 이라는, 진성이 형님의 중학, 대학의 동창생이 합류했다. 평양중학을 다니며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체포 직전에 이남으로 탈출한 아주 당찬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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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제 징집된 인민의용군들 (사진출처 :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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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선지를 윤 씨와 진성 형님이 자주 등반했던 남한산성으로 결정하고 초저녁 7시쯤 출발해서 일차로 천호동 나루까지 왔다. 다행히 야간통행 금지가 그 시기에는 없었고 다만 야간에 나룻배만 다니지 못하게 했다.
다음날 첫배로 한강을 건너 곧 남한산성 장수대에 도착했다. 이미 한 팀이 와 있었는데, 조(趙)학생이라고 경복중학 6년 재학 중이며 우리처럼 동생을 끼고 와 있었다. 식량을 어디서 구했는지 윤 선생이 한 말 정도 가지고 와서 하루 두 끼 이밥을 지어 먹을 수 있었다.
남한산성에서의 일과는 딱 하나이었다. 저공으로 한강을 따라 비행하면서 교량 또는 녹음 속에 숨겨진 인민군의 군수물자를 찾아 폭격하는 미군 전투기들을 멀찌감치에서 구경하는 것이다. 보면서 그 아슬아슬한 비행기술에 탄복하곤 했었다.
피난 온지 3일째인데 빨치산 복장을 한 두 사람과 평복을 한 발을 많이 저는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우리들의 신분을 조사한다. 학생증을 보여주었더니 간단하게 인적사항을 묻고 고생한다면서 위로의 말을 던지고 하산했다. 우리는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다음날 아침을 해서 먹고 있는데 그 두 사람이 이번에는 총을 메고 나타났다. 말인즉 오늘 광주군 동부면 인민위원회 주최로 「미제타도 조국해방」 궐기대회가 있으니 참가하라는 권유였다.
먼저 내려가라고 했으나, 같이 동행하기를 우기는지라 설거지를 진식 동생에게 맡기고 우리 셋과 옆방의 조 학생 등 4명이 따라 내려갔다. 동부면 양조장을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고, 약 한 시간 정도 기다린 다음 위원장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네 사람을 앉혀 놓고 전쟁의 당위성과 김일성 장군의 위대함을 역설하면서 결론은 의용군 지원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조국해방전선의 위대한 전사가 되어 주시오” 하는데 거기에 토를 달면 바로 반동이 되는 것이다. 오늘밤 8시에 총궐기대회가 있고 곧이어 출정 행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 윤 선생이 위원장 귀에다 대고 조용히 뭐라 한마디 하더니 구석방으로 같이 들어가고, 조금 후 진성이 형님을 불러 둘이 그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한참 삼자가 면담을 하는 사이 나는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두 분이 면담 후에 나오면서 손을 치켜들더니 빨리 산으로 올라가라고 신호를 하는 것이었다. 헐레벌떡 장수대로 뛰어오르고 두 형은 뒤에서 쫓아 따라오면서 “빨리 짐 챙기고 튀자” 하는 것이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 북문 쪽으로 빠져 걸음아 날 살려라, 야산과 논밭을 줄달음질로, 허리까지 차는 냇물을 허우적거리며 건너, 드디어 지금의 봉은사(奉恩寺) 근처에 도달했을 때 날이 어둑어둑해 졌다.
근처 어느 시골 마을 끝에 있는 꽤 큰 집에 찾아가 잠자리를 요청했더니, 헛간 밖에 없다 하면서 들어오라고 한다. 그 와중에서도 불빛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조심(방공으로 야간에 절대 불을 켤 수 없으며, 낮에는 거울 등 반사경을 소지하면 간첩으로 몰림) 하면서 밥을 지어 먹었다.
주인 할머니가 된장에 열무김치를 주신다. 학생들 고생 많다면서 자기 아들이 남한 경찰관이며 남하(南下)했다는 사실까지 털어 놓으며 동정해 주었다. 우리들은 이제 안도했다.
조금 안정된 후에 동부면 인민위원장과의 면담 내용을 듣자하니 요절복통할 일이었다. 윤 선생이 최근에 발행된 당원증을 위원장에게 제시하고, 광주군 인민위원회 연락사항이 있어 왔던 길인데 가까운 친구가 남한산성에서 임시 피난처를 마련하고 있다 해서 잠깐 들른 길이라고 허위 작전을 꾸민 것이다.
위원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는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가입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심사가 걱정스럽다고 하면서 윤 선생에게 은근히 협조를 요청하는 태도로까지 발전된 모양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성이 형을 불러들인 것이다. 타협은 진성이 형이 먼저 자신은 오늘밤의 의용군 발기대회에 참가하고, 동생들 둘은 가족을 찾아 서울로 돌아가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요지였다. 위원장도 쾌히 동의한 모양이다. 동생들을 떠나보내고 오늘밤 발기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