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똑같은 복장의 남녀가 또 기내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들어오더니 재빠른 동작으로 객실 통로를 마구잡이로 쓸며 나간다. 밀폐된 기내에서 그 많은 먼지는 어떻게 할 건지. 아테네 공항 등에서는 얌전하게 차려입은 중년여성이 진공청소기로 살살 청소해 가면서 연신 “Sorry, Sorry.” 했는데, 북경의 기내청소는 희한했다. 일부 승객이 따라 내리는 이유를 알만 했다. 말로만 듣던 홍위병을 이제 바로 옆에서 보게 된 것이다. 혹시나 하는 걱정까지 든다.
북경공항은 한산했다. 멀찌감치 보이는 공항청사는 옛날의 타일 건물이었고, C-46 같은 「프로펠라」 비행기가 청사 앞에 계류 중이었고, 「제트」기란 우리가 타고 간 B707 Air France 한 대 뿐이었다. 이리저리 약 한 시간이 지났을까, 여권을 가져갔던 두 홍위병이 나타나더니 주인을 찾아 여권을 하나하나 돌려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여권은 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던 월남전에 참전했다던 젊은 미국인 사업가도 여권을 돌려받지 못했다.
아마도 적성국가로 간주되는 한국이나 미국은 「PARSONA NON GRATA」인 모양이다. 아주 당황스럽고 민망하기까지 했다. 바짝 다가가서는 “Where is my passport?” 했더니 대뜸 나오는 대답이 “You are not supposed to come to Bejing without a proper Visa!” 라고 지껄인다. 아주 유창한 영어로 답하는 것이 아닌가? 분별없는 마구잡이 홍위병이 갑자기 일등 관헌으로 탈바꿈 하는 것 같았다. 순간 잘못 다투다가는 끌려 내려가는 불상사 봉변을 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 어물어물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2, 3분 생각하다 안 되겠구나 싶어 우선 내 발아래 깔고 있는 007가방의 주요 서류들을 어떻게든지 내 몸에서 떼어내야 할 것 같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로서 일신상의 안위야 그때 가서 볼일이고, 우선 국가적인 중요한 서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난감했다. KAL기 납북 때 우리 형님이 「비밀취급인가증」을 기내에서 씹어 삼켰다 하지만 그 두툼한 수권의 계약서를 삼킬 수도 없고! 그때 언뜻 생각한 것이 동경으로 계속 여행하는 수교국(우방국) 사람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첫째 핵주기개발기술이전계약서 그리고 차관계약 그리고 그동안 추진해 왔던 내용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는 나의 두툼한 일기장, 이것들은 국가일급비밀(Top secret)에 속했고, 만일 중공이 이 문서들을 입수하면 우리의 핵개발계획이 일거에 노출될 것이고, 소련과 북한에까지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생각되었다.
비상대책이 필요했다. 다행히 앞좌석에 앉아있는 중년신사는 서독출신이었고 일본에 사업차 여행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간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의 고교시절 익혔던 독일어를 간혹 섞어 쓰는 바람에 그의 호감을 사기도 했거니와 동독에 대해 비교적 비판적인 발언을 듣고 적색 이념과는 거리가 있구나 하는 사전조사도 되어 있었다. 슬그머니 귀에 대고 앞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반응은 좋았으나 ‘걱정마라, 괜찮을 것이다.’ 라는 편한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야, 이 사람들 예측 불허하고, 우리나라와는 3년 동안 전쟁을 했단 말이야 아직도 휴전 중이고, 우리는 상호 적이야.’ 했더니 좀 이해가 가는 모양이었다. ‘부탁이 있는데 내 발 밑에 깔고 있는 가방에는 아주 중요한 서류가 들어있어. 대단히 죄송하지만 만일 내가 납치 억류된다면 이 가방, 동경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전달해 주시면 좋겠어.’ 했더니 머리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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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진 중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홍위병들 (출처 ; 바이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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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에 만사가 해결되는 기분이었다. 재빨리 호주머니에 있는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가방에다 집어넣고 발로 톡톡 차서 앞좌석 아래로 밀어 넣었다. 그때 마침 통로로 지나가는 승무사무장에게 나의 패스포트를 돌려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더니, “Don’t worry. This is French territory. The French sovereignty!” 라고 말하고는 휙 지나간다. ‘걱정 마세요. 여기(기내)는 프랑스 영토입니다. 프랑스 주권이 통하지요.’ 라는 요지인데 그래도 걱정이 앞선다.
조금 있더니 여권 하나를 가지고 와서 내 옆 좌석의 미국사업가에게 전하더니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직업이 뭐냐?’고 명함 등등을 처리한 후인지라, 공직 신분을 좀 숨길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서울에 있는 KOREA UNIVERSITY의 교수’라고 들이댔다. 어디론가 또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웬일인가, 비행기 출발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북경에서 탑승할 손님이 하나 둘 비행기에 오르기 시작하는데 나의 여권은 감감무소식이다.
납치 억류는 못한다 하더라도 다음 비행기 편으로 보내기로 하고 일시 심문에 응해 주도록 비행기회사와 타협을 할 수 있겠다 싶어 각오는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 좌석이 거의 빽빽이 차 가는데 남자 홍위병 하나가 다가오더니 맨 끝으로 나의 여권을 건네주면서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 이를 지켜 본 옆에 있던 미국 친구, 앞줄의 독일 친구가 웃으면서 악수를 청한다. 이윽고 비행기 문이 닫히고 출발이 시작된다. 고공으로 치솟아 고도를 잡을 때까지 멍하게 앉아 있었다. 만감이 교차된다.
홍위병이 나의 여권을 돌려줄 때 비신사적인 행동에 항의라도 하고픈 마음이 생겼으나, 순간 홍위병의 생리를 많은 외국 언론을 통해 접해본 나로서는 그만두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공 원자탄개발의 시조인 첸쌍창(錢三强) 박사 내외를 청화대(淸華大) 연구실에서 끌어내서 갖은 모욕을 주고, 「반동학술권위자」로 몰아 숙청하고 시골로 내쫓는(下放) 홍위병을 내가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註 : 부인인 허쩌후이(何澤慧) 박사와 첸(錢) 박사는 독일에서 핵물리학 분야 학위를 마치고 2차 대전 후 바로 프랑스에 건너와 핵물리학 분야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48년 귀국해 1958년 드디어 핵반응로를 개발하고 첫 핵실험에 성공한 중국 핵개발의 원조이다.)
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곧이어 후지 산이 멀찌감치 눈 아래 보이며 아, 이제 나는 자유의 몸이구나, 의식하게 되었다. 하네다 공항에는 나의 죽마고우인 동경 거주의 안영식(安泳植) 사장이 나와서 맞아주었다. 이제 고국의 직장과 가족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음을 자신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36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중국의 변화를 보면 언제 그러한 때가 있었든가 꿈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런 경험을 통해 후진국, 또는 중진국들도 결코 안 된다고 낙심만 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Leadership만 존재한다면 발전은 시간문제라는 사실을 단언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19년은 우리나라를 빈국에서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키우는 초석이 되었고, 개혁개방 30여년 만에 중국은 명실상부한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처음 10년은 나라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20년, 30년 후면 천지개벽이 이루어질 수 있는 초스피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북경사건과 관련해서 나에게 소중한 또 하나의 교훈은 「이웃」과 좋게 지내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줄 독일 사람과의 몇 분간 대화로 위급한 상황에 좋은 우군이 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