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幼年時節)_1 (155회)
  제20장 나의 성장기1

나의 어린 시절의 첫 생각은 대충 4세 때의 일들이다. 뒷방 할머니를 형과 삼촌들과 합세해 놀리던 일이 기억이 난다. 

증조부님 성하(性夏)의 후실 쯤 되시는 분이다. 당시 나이 드신 어른들이 상배(喪配)를 당하시면 당신의 주변을 보살피는 여인이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뒷방 할머니 강(姜)씨는 호적에도 등재된 적이 없는 분인데 처녀의 몸으로 증조할아버지를 지근에서 모시다 증조부님이 돌아가시자 막내인 우리 조부님이 부양하게 되었다.

서모(庶母)이지만 어린 나이에 들어왔으니 우리 조부님과 나이가 비슷했던 모양이다. 아이들 키우는 문제로 조부님과 티격태격했다고 한다. 특히 조부님이 상처(喪妻)를 하고 후처를 맞아들이게 되자 두 분의 관계는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후실 며느리를 맞이하면서 뒷방 할머니는 죽은 첫 며느리에 대한 의리 같은 감정 때문에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이때 차남인 우리 아버님을 당신의 친자식처럼 끼고 키우기 시작하면서, 후실 조모님과 조부님이 아이 키우는데 일체 간섭을 못하게 하였다. 이 뒷방 할머니 덕으로 나의 아버님과 셋째인 희주(禧周, 어머니 車씨가 돌아가실 때 3세였음) 삼촌은 모든 면에서 우선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뒷방 할머니는 힘이 어떻게나 좋은지 지계리(智溪里)로 제사 모시러 갈 때는 나의 부친을 꼭 업고 가는데, 중간에 비촌 쯤에서 딱 한 번 쉬고 지계리까지 총 30리를 곧장 돌파했다고 한다. 집에다 두면 아버지와 계모에게서 매를 맞는다고 출타 시에는 반드시 업고 다녔다고 한다. 따라서 아버님에게는 장성할 때까지 뒷방 할머니의 모성애가 지극했고, 생모인 차(車)씨는 거의 기억에 없으셨다 한다.

이 할머니가 환갑이 지나면서 치매가 시작이 되었고, 점점 심해지자 안채 뒷방을 쓰시던 할머니는 뒷방 할머니라는 별호를 얻었다. 정신이 점점 없어지자 밥상을 받으면 잡수시지 않고 농 밑에다 넣어 두었다가 수시로 꺼내 드시거나, 며칠씩 두었다가 완전히 상한 것을 드시거나,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큰 어머님이 수시로 청소를 하고, 몸을 씻어 드리며 고생이 대단하셨는데, 이 분이 우리들 장난꾸러기들의 조롱거리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이 할머니가 드디어 돌아가셨다. 초상을 치르는데 우리 아버님이 그렇게나 우시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 나의 첫 기억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후일담인데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는, 뒷방 할머니를 위해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제사를 극진히 모셔드렸고, 형님도 뒷방 할머니의 제사를 모셨다.

다음 기억나는 것은 마을 안에 있는 서당 출입이다. 애기 보는 도우미 누나 손에 이끌려 서당에 갔다. 셈과 언문 ‘가갸거겨’를 배웠고, 일어(日語) ‘아에우에오’ 정도를 배운 것 같다. 아마도 지금의 유치원 정도의 레벨일 것이다. 

서당 입구에 좀 높지막한 언덕 위에 조그마한 집이 하나 있다. 언덕 계단 양쪽에 흐드러지게 핀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그렇게도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 집은 교회 목사님 집이라 했다. 교회가 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데 왜 목사님은 여기서 사실까 좀 의아했다. 그때는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손잡고 따라가면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고 집에 올 때는 가끔 ‘꽃표’라고 하는 총천연색 카드를 하나 얻어 가지고 돌아온다. 
 
▲ 1930년대 서당풍경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그때 당시에 책에 흑백 그림도 신기한데, 색깔이 들어간 눈밭에 서 있는 멋쟁이 교회, 밝은 별빛에 서 있는 목동과 지팡이를 들고 도포 입은 사람들의 그림, 특히 양떼와 낙타의 그림을 나는 좋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선교사들이 고국에서 온 X-mas 카드, 부활절이나 발렌타인 카드 등을 모았다가 글자가 든 부분을 잘라내고, 그림 부분을 모아 우리들에게 나눠 주었을 것 같다. 이쁘고 신기해서 벼람박(벽의 전라도 사투리)에 붙여놓고 몇 달씩 감상하곤 했다. 

가끔 주일이면 파란 눈의 서양 선교사가 마을 앞 다리까지 반짝거리는 <다꾸시>(택시, 승용차)를 몰고 도착했다. 노란머리의 키 큰 남자와 여자는 아마 선교사 부부였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큰 구경거리를 제공했다.

용모도 우리와 다르지만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는데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수어천에는 피라미, 붕어 등 물고기가 많았다. 선교사 한 분이 물고기를 가리키며 ‘피쉬, 피쉬’ 한다. 아마 내가 배운 첫 번째 영어 단어가 ‘Fish’ 였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보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흥미진진했다. 새로운 인식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나의 단단한 두 다리, 달리기도 가능해진 건각은 흥미를 찾아 하루 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소일했다. 배가 고플 때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손잡고 따뜻하게 인도하던 언니도 필요 없어졌다. 나의 신비한 새로운 세계를 탐사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의 집 큰 강아지와 고삐 풀린 숫소 외에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첫 번째 이사(移徙)

뒷방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많이 슬퍼하시는 아버님을 옆에서 쳐다보고 저분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때까지 나의 어른은 할아버지와 큰 아버지 두 분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동경 유학시절 태어났고, 집에는 가뭄에 콩 나듯이 방학 때에나 드문드문 오셨으니 부친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우리를 꼬마 학생복으로 갈아입힌 어머니는 우리가 이사를 간다고 하셨다. 형님도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고, 아래 여동생 영자(英子, 갓 돌이 지났음)는 수술이 달린 꽃모자를 쓰고 있었다. 동구 밖, 선교사의 자동차만 가끔 와서 주차하던 곳에, 노란색 트럭과 까만 색 <다꾸시>가 와 있는 것을 목격하고 무척이나 마음이 설레었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 영자 그리고 식모라고 하는 ‘명내미’ 언니는 까만 다꾸시를 탄다고 했다. 그리고 나와 형은 노란색 트럭에 올랐다. 트럭에는 <고리짝>, 장롱 등이 실려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많은 분들의 전송을 받으며 드디어 출발이다. 고향산천을 뒤로 하고 신작로를 따라 미지의 세계로 달리는 것이다. 가로수가 휙휙 지나가고, 산이 다가오더니 다시 멀어지는 요지경 속에서 한참을 달려갔다. 참말로 ‘호식’이 이를 데 없었다(승차감이 좋다는 사투리).

갑작스러운 꽥, 꽥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형과 나는 밖에 새까만, 집채만 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형은 놀랐는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좀 무섭기는 했지만 신기해서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운전수가 ‘기차야, 기차!’ 하면서 ‘느이 아부지와 엄마는 저 기차로 광주에 오시는 거야.’ 한다. 엄마, 아버지 소리를 들은 우리들은 그제서야 좀 안도감을 가졌다. 운전수는 좋은 사람이었나 보다. 도시와 마을을 지날 때마다 우리들에게 지명 같은 것을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향산천 밖에 모르는 무식한 우리들에게 별 참고가 되지 못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지금까지 보지도 못한 대형건물 앞에 트럭이 멈췄다. 버스 같은 큰 차가 몇 대 보이고, 사람들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마도 버스 종착역, 즉 터미널 같은 곳이었다. 날은 컴컴해 으스스한데 건물은 크고, 불안했던지 형님이 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보다 세상을 좀 더 많이 본 것이 탈이었다. 운전수는 형님을 진정시키느라 “아버지가 곧 여기 오실거야, 여기서 만나기로 했거든.” 등 별소리를 다 하며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나는 좀 불안했지만 울 정도로 불안하지는 않았다. 조금 있으니 헐레벌떡 아버님이 나타나시고, 입주할 집으로 인도하셨다. 어머니가 있고, 동생이 보이고, ‘명내미’가 반겨 주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일 년 남짓한 광주 생활이 시작되었고, 소학교까지 입학하게 되었다. 1938년 봄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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