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소위 「서울의 봄」이 오면서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가 바야흐로 활짝 열리는 듯 했다. 전상근(全相根) 형과 나는 이 기회에 정계에 진출할 뜻을 세웠다.
상근 형은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춘 분인데 윤보선 대통령의 질서(姪壻)라는 당시의 「핸티캡」과, 친형님인 개신교계의 원로 전성천(全聖天) 목사의 끊임없는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낙인이 꽉 찍혀 있어서 차관, 장관 추천에서는 언제나 밀리고 또 낙방을 먹었다. 이제 1급 공무원의 꼬리마저 떨어져 원자력연구소 감사로 하방(下放)까지 되었다.
나와는 과기처 연구조정관으로 근무할 때 같은 유학파이고 해서 친근하게 지냈다. 그리고 2, 3년 후 원자력연구소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상근 형은 윤 대통령 측과 상도동 사이에 이미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와 상도동과의 관계는 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경남중 2년 선배인 YS(3회), 김택수(金澤壽:1회) 선배가 이끄는 경남중 축구팀에서 「센터보드」를 맡아 그 단단한 체력으로 종횡무진 잘도 뛰는 YS 선배를 눈여겨 보았다.
그런가 하면 YS의 사촌동생 김영호(金泳昊)가 5회로 나와 동기이고 2학년 때 짝꿍이어서 YS 주변의 일은 간간이 접하고 있었다. 영호 군은 체구는 작지만 당차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상황판단이 정확하고 좌담 때의 어휘구사가 아주 능한 책사(策士) 같은 인상을 주는 인물이다. 평생을 형님 정치 수발을 위해 노력해 왔고, 핵심 중 핵심의 역할을 했으나 말년에는 당료파와 마찰도 없지 않았다.
10.26 이후 대권을 향한 각 진영의 행보는 분주했다. 우리에게 비친 가능성은 JP가 50%, YS가 30% 그리고 DJ가 20% 정도 세력으로 보였다. 그러나 JP의 공화당은 재편(再編)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었다. 지난 10년 동안의 JP 가지치기로 막강했던 창당파들은 많이 제거되었다.
민간 출신 당료파들은 Anti-JP가 많은 것으로 보아 대세에 따라 여차하면 분당(分黨)의 가능성도 엿보이는 처지였다. 공화당이 위기에 몰리면 덕을 보는 쪽은 YS이고 JP는 고정세력만 남게 되리라고 본 것이 우리들의 당시 판단이었다. 즉 여차해도 YS 진영은 최악의 경우 제 1야당으로 남는 것은 가능해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0.26 직후 JP를 중심으로 한 과거 창당시절의 공화당 사무국 출신들이 은밀하게 전국의 쓸 만한 새 인물을 가려내는 작업을 했었는데, 그 작업을 지휘했던 나의 고교 동기 한 사람의 귀띔에 의하면, 나도 영입대상으로 고향에서 조사되어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나 YS 쪽으로 기운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는 그 지긋지긋한 연좌제에서 해방되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부관학교 군사영어 반에서 일등을 함으로써 동기생 중 유일하게 서울 소재 연합참모본부에 배치되었고, 거기에서 유능한 선배 장교들을 만나게 된다. 79호 실장 이후락(李厚洛) 준장, 막 주미대사관 무관을 마치고 귀국한 이(李) 장군은 연합참모부에서 Houseman 대령과 함께 새로운 정보기구를 구상 중에 있었다.
나의 Boss였던 비서실장 서국신(徐國信) 대령과 두 분이 각별했고, 나는 두 분의 심부름을 자주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청와대 경호실장이된 박종규(朴鍾圭) 당시 소령, 그리고 후에 청와대 총무, 인사를 맡았던 나병직(羅炳稷) 대위(나의 대학선배) 등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우리 육군 군번 3번인 유재흥(劉載興) 장군을 같이 모시기도 했다.
그 후 이분들이 청와대에 있을 때 나는 그쪽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몇 차례 했고, 이력서도 보냈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라’ 라는 것이었다. 총리실에 근무 중이었는데 ‘정 총리 진영으로부터 사람을 빼 온다’ 는 인상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납득이 가지 아니하였다.
그 후 얼마 있다 홍종철(洪鍾徹) 씨가 사정(司正)으로 부임하면서 자기 밑에 일급 보좌관이 필요하게 되어 사람을 물색 중에 있었다. 나와 가까이 지내던 나의 육촌 매형이 홍(洪) 수석의 삼촌숙(三寸叔)벌 되는 분이 있었다. 그분이 내가 언뜻 생각이 나서 이력서를 작성해서 보내라고 전갈이 왔다. 홍 수석에게 나의 이력서를 보였더니 대뜸 ‘경력이 너무 화려해서 걱정’ 이라고 하더란다.(사정비서관은 주변에 많은 사람과 친분이 있으면 업무수행에 지장이 있다함)
그런데 다음날 연락이 왔다. 발령이 좀 곤란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 해묵은 나의 신원상의 특기(特記)가 또 불거진 모양이다. 1963년 대통령 선거 때 사상논쟁으로 인해, 청와대에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연좌제를 철저히 지켜나가는 중이었다.
제헌의원 김옥주(金沃周)와 사변 때 납치되어 행방불명된 다섯째 삼촌인 전(前) 경찰전문학교 교무과장 김계주(金桂周)가 언제나 나의 신원조회에 따라다녔다. 이때 내가 절실히 느낀 것은 이런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는 정계에 진출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여권으로 진출하면 특기(特記)가 계속 문제가 될 것이고, 아예 말을 바꿔 타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나의 군대생활까지 합친 「커리어」 20여년으로 봐서 그리고 아버님의 예전 소속 당으로 봐서 마땅히 공화당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나 자꾸 YS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역할이 상도동쪽에 더 필요한 것으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선 상도동은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투사들이 필요했고, 따라서 「테크노 크랫」이나 행정가들은 주변에 별로 없었다. 이제 집권을 향해 세차게 나가는 마당에 구색을 갖추고 기능을 보강한 필요가 있었고, Shadow Cabinet도 구상할 단계에 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일은 시작이 되었다. 상근 형과 나의 첫 번째 임무는 그동안 YS의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보여준 미국 조야(朝野)의 적극적인 지지에 대해 감사의 인사 편지를 YS 명의로 작성해서 영미(英美) 출신 교수, 때로는 주변의 친근했던 선교사에게서 감수를 받아 상도동에 보내는 일이었다. 한글 초안은 상도동의 문장인 박권흠(朴權欽), 김덕룡(金德龍) 제씨의 것으로 알고 있다. 주로 Edward Kennedy 그리고 Carter 대통령 등 민주당 계열의 인사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79년 11월말 쯤 이제 상도동 Camp에 합류하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도 공직에 있으면서 정치 일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고, 적당한 시기에 신분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상근 형과 상의 끝에 내가 먼저 건너가기로 했다.
어느 일요일에 신촌에 있는 김영준 한국전력 사장 댁으로 찾아갔다. 사임하는 것 외에 사적인 대화도 필요했기 때문에 사저(私邸)로 찾아가 뵈었다. 사임의 동기 그리고 앞으로의 나의 계획 등을 대충 말씀드렸더니 ‘정치란 어려운 것이고, 당신도 고향인 경북 예천에서 두어 번 출마할 생각을 했었는데 그 막대한 선거자금, 농촌의 지역적 민원 문제 등 행정만 하던 우리에게는 너무 벅차고 칙칙한 일들이 뒤따른다. 그래서 포기를 하였고, 선거기만 되면 지금도 지역의 친지들이 올라와서 괴롭힌다’ 고 하셨다.
나도 두어 차례 경험한지라 충분히 공감을 했다. 작별인사를 하려는데 김 사장 왈, “김 부사장, 지금은 난세(亂世)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소. 몸조심 하시오.” 마지막으로 후배에게 당부 말씀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분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 같다.
상도동에서 또 연락이 왔다. 손세일(孫世一) 씨를 언론특보로 그리고 나를 행정관계특보로 발령을 낸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아직 신분정리를 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니 약 2주 만 말미를 달라고 했다.
손세일 씨는 그 다음 월요일 조간에 특보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나는 지금 정치라는 격전장에 나서는 마당에 건강 문제 등을 두루 살펴야 했다. 평소 맹장 쪽에 만성 통증이 있어 이참에 아예 맹장수술을 하고, 회복 후에 합류해도 늦지 아니할 것 같았다.
금세기 초, 한국에 부임하려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 달간의 항해와 수술 여건이 좋지 않은 Korea에 와서 맹장이라도 터지면 큰일이니까, 출발 전에 아예 맹장 수술을 받는다는 말을 들은 바도 있었다.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하고 주변 정리를 한 다음 원자력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이틀간의 회복 시간을 가진 다음 집에 돌아와 요양을 하는데 소위 12.12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청천벽력이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서 서울의 봄은 순조로울 것으로 믿고 있었다. 12 .12 사태 직후에도 그러했다. 신군부(新軍部)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소위 3김(金)에 접근 ‘국가 위난사태인데 자기들은 정치를 모르니 정국수습을 위해 협조해 달라’ 는 애소까지 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