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_1 (127회)
  제16장 정치에의 꿈과 5.18 광주

대한민국 현대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 찾아왔다. 박(朴) 정권을 철권정치니 독재니 하지만 5 .16 한강 도강 때 대항군으로 배치되었던 헌병 2, 3명이 첫 희생되었고, 황태성(黃泰成) 같은 거물 간첩, 반국가 인사 등 재판에 의해 몇몇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 외에는 성남(城南) 소요사태, 부마(釜馬)사건 그리고 긴급조치로 인한 계속된 학생들의 데모에도 집단적 희생은 거의 없었다. 

인명에 관한 한 박(朴) 정권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고, 수사과정에서의 과촉(過觸)행위는 군데군데 있었으나, 소위 「매스커」라고 하는 「학살」로 치부되는 사건은 없었다.

문창재 대기자(大記者)는 「역사는 하늘보다 더 무섭다」라는 명제를 말했는데, 신군부(新軍部)는 어떠한 정당성을 앞세우더라도 5.18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뼈아픈 갈등의 단초를 제공함으로서 역사에 크나큰 죄를 저지른 것이다. 다행히 후광 김대중(後廣 金大中) 씨가 대통령에 한번 선출됨으로써 많은 원한이 해소되었지마는 그래도 그 비극의 잔영은 세기에 걸쳐 악령처럼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대통령은 중동(中東) 출타 중이었고 어른 없는 이 나라의 신군부는 역사의식도 없이 미숙한 판단과 절제 없는 행동으로 한 지역을 「아마겟돈」으로 만들고 말았다. 「왕창하면 화끈하게 끝날 것」으로 이들은 알았다.

1980년 5월 들어 전두환 장군의 중정부장 서리 임명 등으로 정국은 날이 갈수록 어수선해 졌고, 5월 15일 데모대는 서울역 광장에 모이게 되었다. 소위 「서울역 회군」이었다. 이에 신군부는 계엄확대라는 조치로 응수하면서 33사단 병력을 풀어 국회를 점령하고 정치활동 중단을 발표하며 사실상의 헌정(憲政) 중단이라는 악수(惡手)를 들고 나왔다. 

상도동에는 무장한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이 들이닥쳐 본격적인 가택연금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광주에서 소요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어 갔다. 그러나 상도동 쪽에서는 모든 정보가 차단되다 보니 사태의 실체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급기야 광주의 시민군이 무기를 들고 대항하는 사태로 발전하면서 그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정치의 극도의 취약성이기도 한데, 정치 지도자들이 모두 지역 대표성을 극복하지 못한 점이 우리의 한(恨)이 되고 있다. 당시 상도동에는 호남 쪽의 「에이전트」가 대단히 약했다. 제대로 정보와 현황을 전해주는 루트가 전무한 상태였다. 통신이 두절되면 인편이라도 활용해야 하는데, 이러한 수단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측근 중에 유일하게 호남 출신 보좌관으로는 김덕룡(金德龍) 의원 같은 분이 있지마는 김(金) 의원은 전북 익산 쪽이 되어 광주 전남에는 연고가 그다지 없는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서기로 했다. 광주에는 일가친척 그리고 후배가 많이 있어 실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당장 내려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계속 피를 흘리는 대결이 진행되고 목포까지도 시민군이 장악하면서 전남 중서부 일대가 전장(戰場)으로 변해 있었다. 

최(崔) 대통령이 중동 석유외교를 중단하고 급거 귀국하고 수습에 나섰다. 전남 도청 일대에서의 시민군의 마지막 항거가 무산되면서 드디어 광주 지방으로의 여행이 가능해 졌다. 통행이 재개된 5월 29일 바로 다음날 광주에 내려가 금남로에 있는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고재청(高在淸) 의원이 그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다. 고(高) 의원은 나를 보더니 멍한 표정으로 “심각하시.” 한 마디 하고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1937년~38년 경 우리 가족이 잠시 광주에 살 때 고(高) 의원의 형님 고재호(高在鎬) 선생이 소유하던 집에 살게 되었다. 당시 광주 서중(西中)의 졸업반이던 고 의원을 우리집에서 하숙생으로 데리고 있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우리 집안하고는 오랜 연고가 있는 분이었다.
 
▲ 80년 광주항쟁 당시 진압군과 대치하고 있는 광주시민

마침 사촌인 진호(秦皓) 동생이 아이들 교육 때문에 광주에 내려와 있어서 불러들이고, 나의 친구인 서수열(徐守烈) 선생을 만났다. 오랜 교직생활을 하던 분으로, 언제나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후배이다. 나를 만나자 마자 “형님, 나의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잔인하기 그지없습니다.” 한다. 
 
조금 후에 서 선생의 동생으로 학원 원장을 하는 성열(聖烈)이가 와서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데모에 직접 참가했었고, 진압하는 수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했다 한다. 도망가면 놓아 주는 것이 원칙인데 끝까지 쫓아가서 ‘곤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찌르고’ 말할 수 없는 참극을 목격했다면서,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라고 했다. 그리고 급기야 사생결단으로 시민들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을 가져다 무장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나의 매제인 김여석(金麗錫) 군의 형님인 여성(麗成) 씨가 그 당시 전남대 부속초등학교 교장으로 계셨는데, 방문했더니 그때의 참상을 증언해 주었다. 전남대 학생들이 진압군에 쫓겨서 학교로 도망을 오는데 화단에까지 따라와 곤봉으로 마구 쳐 댔다. 이를 목격한 초등학교 어린 학생들이 교장실로 뛰어 들어와 “교장 선생님, 공산군이 와서 마구 때려 죽여요.” 하더란다. 전남대 학생들이 바로 눈 아래 화단에서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끝으로 전남일보의 당시 편집국장으로 있던 신용호(申龍浩), 나의 사촌 매제이고 대학 동기인 신(申) 국장을 통해 5.18 광주의 시작과 끝을 Pro.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귀중한 자료를 나는 얻을 수 있었다. 그가 편집한 사건 후 첫 신문의 일면, 「아, 무등산(無等山)만이 모든 것을 알리라」도 입수해 왔다. 전모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5/17 밤 특전사 7여단, 11여단 소속의 일부 병력 약 1,000명이 광주에 파견되어 육군교육사령부(보병학교 근방)에서 정비하고 있었다.

② 5/18 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교문 앞에 학생 약 200여 명이 나타나자 공수부대원들은 곤봉 등으로 강제해산시켰다.

③ 여기에서 쫓긴 학생과 새로 합세한 학생 총 300여 명은 오후 3시경 시내 금남로 Catholic Center 앞에 운집하고, 본격적인 시위에 돌입했다.

④ 5/18 해거름부터 공수부대의 강압적 진압이 시작되면서 19일 오전 그 진압의 정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MBC 편파보도의 이유로 학생들이 난입, 불을 지르는가 하면 ‘전라도 씨를 말린다’는 유언비어와 함께 격분한 시민 10여만 명은 20일 드디어 금남로에 몰려나와 택시, 버스 기사들을 앞세워 이제 민간기계화부대의 출격이 시작됐다. 그리고 동시에 피를 흘린 시민들은 예비군 병기고에서 무장을 하기 시작하자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돌변했다. 

피해자와 목격자들의 공통된 사태의 설명은 ‘대한민국 국군이 대도시 중심가에서 백주에 보이는 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끔찍한 진압봉으로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발가벗긴 채 비인간적인 기합을 주고, 트럭에 짐짝처럼 실어가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공통된 증언이었다.

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공수부대를 포함한 계엄군은 21일 광주 외곽으로 물러났다.

⑥ 5/22 종교지도자들과 광주의 양식 있는 원로들은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22일 밤, 「김대중 광주 폭동의 배후」라고 당국이 공식 발표를 해버리는 바람에 영영 사태는 굳어지고 무력진압이라는 최악의 사태로 가버리고 말았다.

⑦ 드디어 5/27 모든 시외전화가 끊어진 가운데 새벽 3:30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은 최후통첩을 했고, 반응이 없자, 도청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개시했다. (3공수가 투입됐다)

⑧ 계엄사는 189명(군인 23, 경찰 4, 민간인 162명) 사망 그리고 380여명이 부상 했다고 발표했으나, 대부분의 시민은 사망 800여명, 부상 2,000여명으로 안다고 했다.

 
  정계진출의 꿈은 무산되고 (1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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