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과 산하(山河 : 고향의 풍경) (137회)
  제18장 나의 집안과 친가

풍광(風光)

고향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신이 난다. 고향은 나의 실존의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안의 원천이다.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 당장 「집합!」 호령이 떨어지면 직계는 물론 조카들, 사촌들이 만사 제쳐 놓고 모여든다. “고향 내려가세!” 하면 그 중에서 4, 5명은 바로 따라나설 수 있다. 우리 집에는 아직도 효(孝)가 건재하다. 고향에는 숙부님 일가(一家)가 있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위토와 집을 장(長)조카가 그대로 유지,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고택(古宅)은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의 시대 그리고 일제와 해방의 소용돌이, 여순사건과 함안, 진동전선으로 행하던 수많은 의용군의 쉼터가 되면서 그 고난과 역경의 시대를 잘도 견디어 냈다.

동(東)으로는 국사봉(447m)과 사루봉으로 둘러싸이고, 북쪽 저 멀리 백운(白雲)의 줄기 억불봉(億佛峰 또는 億君峰)이 굽어보는 자리, 백운산록에서 발원한 수어천(水魚川)은 굽이굽이 돌아 큰 내를 이루고 고향 지원(旨元)마을을 지나며 넉넉한 수량(水量)을 과시한다. 그리고 드넓은 송광(松廣)들의 젖줄이 되고 유유히 흘러 섬진강 하구로 유입된다.

자고로 산(山)은 인물을 낳고, 물(水)은 재물을 창출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고을은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근대에는 황매천(黃梅泉), 현대에 들어 엄상섭(嚴祥燮), 조재천(曺在天), 김옥주(金沃周) 같은 많은 정치인, 법조인을 배출하였고, 하구에는 제철소가 들어섬으로써 고을의 경제를 확 바꿔 놓았다. 

다행히 우리 고을은 산업단지와는 8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다소 오지 쪽에 위치해 있어 공해하고는 무관하다.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언제나 「My Home Town」이라는 포근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맑고 수량이 풍부한 수어천(水魚川)은 용계촌(새내강병이라고 불렀음) 근방에 거대한 댐이 건설되어, 여수화공단지와 광양제철과 시(市)가 필요로 하는 물을 공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갈수기를 대비해 거대한 산(우리는 열두모랭이라 함)을 뚫어 섬진강 상류의 물을 끌어와 합수를 시켜 넉넉하게 식수와 산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시골 친구를 만나면 “광양, 여수 사람들 아침 세수하기 전에 수어천 댐 쪽으로 돌아서서 꾸벅 절하고 물을 쓰기 시작해야 양반 소리 듣는 것이여!” 일갈한다.

특산물

요산요수(樂山樂水)가 있으면 그곳에는 고장의 사람에게 풍성함을 선사하는 명산물이 있기 마련이다. 산해진미가 즐비한 곳이다. 높은 산에는 풍부한 임산물과 약수, 들에는 오곡이, 강에는 민물고기, 은어와 참게, 고동 그리고 바다에는 각종 생선, 김, 파래 등이 가득했다. 명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발동할 만한 명품들인지라 여기에 열거해 보기로 한다.

초봄, 아지랑이가 시작되는 우수, 경칩 때는 위장병, 신경통에 특효인 고로쇠 약수(단풍나무 수액), 우리 가정의 상비약인 매화의 매실 그리고 민물에서 사는 게지만 알을 짠물에서 낳는 수어천의 명품 참게와 방뎅이, 또한 아무리 가뭄이 심해 흉년이 들더라도 우리들의 선조가 굶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준, 강에서 서식하는 갱조개(재첩)와 백합조개, 그 밖에도 벼가 누릇누릇할 때쯤 광양만에 나타나는, 보양식으로 최고의 맛을 선사하는 전어가 있다. 

그 것 뿐인가, 비타민 C가 풍부하여 성인병과 감기예방에 특효인 감과 밤, 가을 향기의 원천인 노란 유자(柚子) 그리고 민물에서 자라고 가을철이면 광양만을 지나 태평양까지 내려가 알을 낳고 다시 회귀하는 뱀장어, 너무 잘 알려진 김(해태, 속칭 광양 김, 하동 김) 그리고 서민들이 일년 열두 달 맛볼 수 있는 어른 팔뚝만한 숭어 등 명산, 명품들의 보고(寶庫)가 바로 우리 고장이다.
 
▲ 사랑채 정문에서 본 故宅

탄생(誕生)

나는 풍광이 수려하고 물산이 넉넉한 고을, 광양군 진상면 지원리(光陽郡 津上面 旨元里) 1329번지에서 1932년 음력 11월 27일 (양력 12월 26일) 인시(寅時)에 아버지 김선주(金善周)님, 어머니 황금효(黃金孝)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님 진규(秦圭)가 태어나고 3년 만의 탄생이었다. 

어머니는 안채 작은 방을 정식으로 인수한 자리에서 나를 낳고, 산고(産苦)를 벗어나는 비몽사몽 가운데 은은하게 들리는 대밭골 교회의 종소리가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강보에 쌓인 애기를 한번 쳐다보고 당신의 배를 한번 만져보고, 너무 장하구나 느끼셨다고 한다.

부모님은 서쪽 대문 칸 방을 개조해서 신혼을 시작했었는데, 안채 큰방에 계시던 조부모님이 벅수거리 쪽으로 새집을 지어 나가시는 바람에 백부님 내외분이 큰방으로 옮기시고, 드디어 작은 방을 9남 4녀 중 차남이셨던 아버님 차지가 되어서 나를 그 방에서 낳게 되셨다고 한다. 가운데 큰 대청 방은 주로 제사 등 행사 때 쓰고 평소에는 고모들이 사용했다.

내가 크면서 가장 좋아했던 쪽방 하나가 있었다. 우리가 거처하던 작은 방을 끼고, 앞마루에 연결되어 있는 커다란 다락방이 그 쪽방이다. 여기가 백모님이 관리하시는 보물창고이다. 곶감, 대추, 엿, 과일, 유과, 정과, 조청, 건어물 등 기막힌 먹거리가 줄줄이 들어가고 나오는 「알리바바」의 보물창고였다. 

다락문 여는 「삐-걱」 소리만 나면 재빨리 뛰어나가고, 큰 어머님 손에서 전해지는 간식을 한입 물고 방으로 돌아오는 그 재미를 어디다 비교할 것인가, 사랑방 출입 손님을 위한 주안상의 안주거리들이 상시 보관되어 있고 집안의 큰 며느리인 백모님이 열쇠를 관장하고 계셨다.

약간 남서쪽으로 향한 3,000평의 부지에 중앙에는 안채, 바로 앞에 안사랑, 왼쪽으로 바깥사랑 그리고 남문채, 서문채가 있었다. 남문채에는 문간방, 머슴방 그리고 칙간(변소)과 함께 소 서너 마리를 키우는 소외양간이 있었는데, 어느 날 용하다는 풍수의 권유로 출입하는 남대문을 폐쇄하고 말았다. 지금은 창고와 함께 지었던 서문이 우리 큰댁의 정문이 되었고 우리는 이 대문을 들락거리며 발목이 굵어졌다.

안채 바로 뒤뜰 언덕 위로 5칸 겹집 초가가 하나 있었다. 이 초가집이 바로 할아버님이 한참 재산을 모으실 때 거처하시던 터전이었다. 그 뒤로는 1,000평의 대(竹)밭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언덕 위의 강한 북풍을 잘 막아 주었다. 

대밭과 안채 사이에 큼직한 돌배나무와 가을 소식을 제일 먼저 알리는 치자나무는 우리 숨바꼭질의 가림 역할을 잘 했다. 누님, 고모들의 손톱 물 들이기에 사용되던 치자 열매는 항상 여기에서 공급되었고, 큰 어머님의 구수한 노란색 유과의 채색도 역시 여기에서 얻었다.

장난꾸러기였던 나와 사촌 그리고 어린 삼촌들의 은신처인 이 초가에는 위장할만한 짚더미, 보릿대들이 항상 마련되어 있어 여차하면 기어들어가 피신하곤 했다. 장난이라고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두 분이 또 있었다. 나의 형님과 규주(圭周) 삼촌이다. 어른 흉내 낸다고 담배 장난하다 짚더미에 불이 붙고, 옆에 있던 그해의 수세(收稅) 받아 쌓아놓은 산더미 같은 볏가마 절반을 태운 불상사도 일어났다.

대밭 쪽 평평한 풀밭은 우리들의 일등 놀이터다. 이웃집 개를 잡아다 우리집 개들과 싸움 붙이고, 새로 선물 들어온 닭을 우리집 터주대감 장닭과 싸움시키고, 가지가지 신나는 놀이의 장소다. 

때때로 대밭 땅속에서 보물을 캐내기도 했다. 한참 할아버님의 재산이 불어나던 시절, 의병 또는 떼강도를 피하기 위해 단지에 돈을 넣어 땅에 묻어 놓았던 엽전 항아리를 우리들이 발견한 것이다. 대부분 싸구려 엽전으로 엿장수 손에 넘어가고, 바꾼 엿으로 우리들은 입천장이 헤지도록 씹으며 엿먹기 잔치를 벌인 기억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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